방송 스태프가 처한 살인적 노동환경은 방송사의 외주하청 구조와 창의성‧자율성을 강조하는 방송노동 문화가 결합한 산물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불안정노동철폐연대 부설 노동권연구소는 26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첫 노동권 기획토론회로 ‘권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을 개최했다.

이젊은 노동권연구소 연구위원은 이날 발제에서 “방송계에선 노동자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성에 기대는 이른바 ‘창의노동’ 담론이 통용된다. 이것이 외주하청으로 일하는 노동자의 노동조건까지 희생시킨다”고 말했다.

방송스태프 노동자들은 살인적인 노동시간과 낮은 임금, 인권침해에 시달린다. 민주노총 서울지역본부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드라마 현장 스태프는 하루 평균 20.4시간 일했다. 올해는 18시간이다. 과로사와 사고사도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스태프는 방송사가 아닌 프로젝트 외주를 받은 감독에게 일회성으로 채용돼, 법적 고용관계도 없다.

▲불안정노동철폐연대 부설 노동권연구소는 26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첫 노동권 기획토론회로 ‘권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을 개최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불안정노동철폐연대 부설 노동권연구소는 26일 오후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첫 노동권 기획토론회로 ‘권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을 개최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방송산업의 노동조건은 1990년대 외주화 시장이 커지며 급격하게 나빠졌다. 상업방송이 출범했고, 정부가 ‘독립제작 활성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외주제작시장이 생겼다.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이 시행되며 파견제가 양산됐다. 방송사들은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이젊은 연구위원은 “방송사는 인력 다운사이징 전략을 추구하고, 외주제작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원하청 관계는 위계 피라미드가 됐다. 그만큼 외주제작사에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도 증가했다”고 했다.

그는 방송사와 외주제작사의 관계가 단순한 시장 분화라기보다 외주하청 위계구조라고 강조했다. 방송사를 중심으로 한 불공정거래 관행이 끊이지 않고, 외주제작사나 협력사가 방송사에 실질적으로 종속된 까닭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시간‧저임금‧불안정고용으로 악명 높은 방송 노동시장에 들어오는 이유는 뭘까? 이 연구위원은 ‘방송콘텐츠를 만드는 노동은 다른 노동과 달리 창의적 생산활동’이라는 인식을 꼽았다. 방송제작 노동자가 공짜 초과근무를 하면서도 ‘재미’라는 보상을 얻는다고 여기고, 이 같은 ‘자율성’이 오히려 스스로 책임 지우는 통제수단으로 작동한다.

‘방송콘텐츠 제작은 창의노동’이란 인식은 기술직인 하청노동자에게도 희생을 강요하는 수단이 된다. 원청 노동자가 고용이 불안한 하청노동자에게도 같은 강도의 노동을 요구할 때다. 이 연구위원은 “첫째는 (원청노동자가) 자신의 희생을 하청 노동자에게도 그대로 요구해 열악한 노동조건이 확산한다. 둘째로 자신이 가진 ‘자율성’을 하청노동자에게 적용하면서 결국 노동자가 모든 책임을 지게 된다”고 했다.

▲이젊은 전국불안전노동철폐연대 부설 노동권연구소 연구위원. 사진=김예리 기자
▲이젊은 전국불안전노동철폐연대 부설 노동권연구소 연구위원. 사진=김예리 기자

방송 드라마 제작현장에서 나타나는 ‘턴키’ 계약 문제도 이같은 위계구조에서 나타난다. 턴키계약은 방송사나 제작사가 스태프와 직접 계약하는 것이 아닌, 각 팀의 감독들과 도급계약을 맺는 방식을 말한다. 각 팀의 감독들은 지급받은 제작비 내에서 제작비와 스태프 인건비를 나누고, 고용관계 책임도 진다.

이 연구위원은 “직종이나 직급에 따라 기꺼이 자기착취를 수행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하청계열화 구조 아래선 강제 자기착취가 이뤄질 수 있다. 이를 따르지 않으면 방송산업에 종사하지 못하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연구위원은 “기존 방송‧문화산업 분야 종사자 연구는 방송PD와 작가 대상으로 진행됐다”며 “앞으로는 실제 방송 스태프 노동권과 ‘창의노동’ 담론 사이 관계를 연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