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최근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 보상 대책을 내놓은 가운데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묻는다는 원칙을 지키지도 않고, 대다수 강제징용 피해자를 배제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접근하는 태도와 다르다.

박근혜 정부 당시인 지난 2015년말 한일 정부는 ‘일본이 낸 10억엔을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 형식으로 준 뒤 문제를 끝내자’는 내용으로 일본군 ‘위안부’ 합의를 했다. 문재인 정부는 해당 합의가 일본 책임을 은폐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며 10억엔을 피해자들에게 주기 위해 만든 조직인 ‘화해치유재단’을 지난해 11월 해산했다. 

해산 이후 적절한 후속대응이 없다는 지적은 있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 ‘일본 정부의 사과가 있어야 하고 돈의 성격은 배상금이어야 한다’는 대원칙을 거스르지 않았다. 하지만 똑같이 국권을 잃으며 발생한 사건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 대응은 달랐다. 

외교부가 지난 19일 강제징용 배상판결 후속 조치로 ‘한국 기업과 소송당사자인 일본 기업이 자발적으로 출연금을 조성해 확정판결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해 당사자 간 화해가 이뤄지는 방안’을 일본정부에 제안했다고 했다. 한국 대법원은 지난해 일본 전범기업인 미쓰비시중공업에 소송한 6명, 신일본제철에 소송한 4명에게 각각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했다. 

▲ 1962년 10월 오히라 일본외상(오른쪽)과 회담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일본군 '위안부', 원폭 피해자,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 등은 1965년 한일 협정에 포함되지 않아 청구권이 남아있다는 게 피해자들과 다수 시민사회계 주장이다. 사진=연합뉴스
▲ 1962년 10월 오히라 일본외상(오른쪽)과 회담하고 있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 일본군 '위안부', 원폭 피해자,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 등은 1965년 한일 협정에 포함되지 않아 청구권이 남아있다는 게 피해자들과 다수 시민사회계 주장이다. 사진=연합뉴스

해당 소송을 도왔던 이들은 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소송대리인단(최봉태 변호사 등)과 지원단(민족문제연구소 등)은 이날 “역사적 사실 인정과 진심어린 사과, 배상을 포함한 적정한 피해회복 조치, 재발방지 노력을 포함해야 하는데 한국 정부입장은 역사적 사실인정과 사과 관련 아무런 내용이 없다”면서도 “다만 양국간 협의 개시를 위한 사전조치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정부안 지지 메시지를 담았다. 

소송대리인단·지원단은 하루 빨리 승소한 피해자들에게 금전지원이라도 해야 한다는 판단에 정부 안을 ‘비판적 지지’했다고 볼 수 있다. 외교부 입장에선 일본 측이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현실을 감안한 조치라고 볼 수 있지만 원칙과 실리 모두 놓친 조처다. 일본 정부는 이날 한국 정부의 제안을 즉각 거부했다.  

이번 정부 대응의 절차에도 문제제기가 나왔다. 정부가 피해자 목소리를 외면했다는 주장이다. 소송대리인단·지원단은 이날 “정부 입장 발표 이전에 대리인단·지원단을 포함한 시민사회와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에서 유감”이라고 밝혔다. 그나마 정부가 대리인단·지원단의 입장을 형식적으로나마 참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 지난 1월18일 일본의 '나고야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 소속 일본인 활동가들이 일본 도쿄(東京) 마루노우치(丸ノ內)에 위치한 미쓰비시(三菱)중공업 본사 앞에서 이 회사에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에 응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지난 1월18일 일본의 '나고야미쓰비시 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을 지원하는 모임' 소속 일본인 활동가들이 일본 도쿄(東京) 마루노우치(丸ノ內)에 위치한 미쓰비시(三菱)중공업 본사 앞에서 이 회사에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에 응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더 큰 문제는 이번 소송에 참여하지 않은 대다수 강제징용 피해자의 목소리가 묻혔다는 점이다. 백장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유족총연합회장(강제동원유족회)은 24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큰일 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소송한 10명 정도만 해당하는 얘기”라고 말했다. 정부는 이번에 일본 정부에게 ‘확정판결 피해자들’만을 언급했다. 강제동원유족회에는 강제동원 피해자와 그 유족들로 구성했는데 회원이 약 3만명이다. 강제동원 전체 인원은 약 20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백장호 회장은 “(승소한 이들 중엔) 노무자만 있는데 끌려간 수십만명의 군인·군속들도 강제동원 피해자인데 이번 대법 판결과는 관련이 없다”며 “승소 판결을 받아내는데도 몇 년이 걸리고 받아내더라도 국가 재정을 지출하지 않겠다는 게 정부 입장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이어 “군인·군속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해야 하는데 사실상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군속은 군인을 돕는 이들로 전쟁 막바지엔 군사훈련을 받고 실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목소리도 묻혀있다. 신윤순 사할린강제동원억류피해자한국잔류유족회장(사할린강제동원유족회)은 24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사할린 강제동원 문제는 한일협상에도 없고 대책이 없다”며 “해방 75년이나 됐는데 아직도 정부가 무능하다”고 비판했다. 사할린강제동원유족회에는 피해자 인원만 약 3000명 있다. 사할린에 끌려간 인원은 3만명으로 추산한다. 

백 회장과 신 회장은 모두 ‘정부와 소통 창구조차 없다’고 말했다. 여론에서 주목도가 높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경우 정부가 화해치유재단을 해산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지만 그 외 다양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정부에서도 외면 받고 있다는 것. 신 회장은 “정부가 일제강점기 피해자 입장에 눈높이를 맞춰 소외되는 피해자 없이 가야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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