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강제징용 배상판결 후속 조치로 ‘한국 기업과 소송당사자인 일본 기업이 자발적으로 출연금을 조성해 확정판결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해 당사자 간 화해가 이뤄지는 방안’을 일본정부에 지난 19일 제안했다. 일본 정부는 이날 즉각 거절했다. 한국 정부가 사과와 배상금을 요구한 것도 아닌데 거절하자 ‘일본이 한국을 만만하게 보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이뿐 아니다. 일본 정부가 지난 4월 외교청서에 강제징용 문제를 다루며 ‘민간인 징용공’이란 표현 대신 ‘한반도출신 노동자’를 썼다. 지난해 한국 대법원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청구권이 있다는 판결을 내리자 강제성을 포함한 ‘징용공’을 ‘노동자’로 바꾼 것이다. 해당 외교청서에는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는 등 한일 각종 현안에서 한국에 날을 세웠다.  

일본이 반성 없이 사실을 왜곡하고 피해자를 공격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때 한국 정부는 얼마나 피해자들에 관심을 가졌는지 봐야 한다.   
 
지난 2015년 12월 강제동원을 조사하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대일항쟁기위원회)’가 폐지를 앞두고 정부와 국회에 제출한 인수인계용 자료를 보면 “위원회 폐지가 한국 정부 스스로 일제의 강제동원 가해사실에 대해 종지부를 찍은 것으로 일본 정부 및 우익단체에 그릇된 메시지를 전달할 사태가 우려된다”고 경고했다. 

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 조사과장을 지낸 정혜경 일제강제동원평화연구회 위원은 지난 21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일본정부·기업을 상대로 한국 정부가 협상을 할 때 한국 피해자를 챙기면서 해야 명분이 생기는데 정부는 피해조사도 안하고 지원도 안하면서 일본에 얘기를 하면 잘 안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 위원은 “중국은 피해신청을 지금도 받고 있다. 전시관 등에 신청서가 쌓여있는데 제3자라도 ‘내가 보니 아무개가 피해를 당한 것 같다’고만 적으면 정부가 나서서 조사를 한다”며 “한국에선 신청하려면 근거를 다 대야 하고 신청서가 복잡해서 나도 못 쓰겠더라”고 말했다. 

중국정부는 1985년 중국 남경대학살동포기념관을 설치해 일본군이 1937년 자행한 난징학살피해를 상시조사하고 있다. 2015년 유네스코가 이를 세계기록물유산에 등재했다. 이스라엘 국회는 1953년 ‘이스라엘 야드바셈’이라는 상설조사·기념시설을 설치해 나치가 1935~1945년 자행한 만행을 조사해왔다. 

중국과 이스라엘은 무제한 피해신고가 가능하지만 한국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2005년 2월~6월, 2005년 12월~2006년 6월, 2008년 4월~6월 등 세 차례만 접수를 받았다. 대일항쟁기위원회는 결국 사라졌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만 남았다. 

재단 관계자는 2015년 11월 위원회 폐지를 앞두고 연합뉴스에 “피해자 보상업무는 다 끝났고 위원회가 활동기한을 연장하려는 것은 자기들 ‘밥그릇’ 지키려는 것”이라며 “혹시 남은 업무가 있더라도 행자부와 재단이 하면 된다”고 말했다. 

백장호 일제강제동원피해자유족총연합회장(강제동원총연합회)은 24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피해자지원재단이라고 하는데 실제 피해자들에게 지원해주는 건 없다”며 “주로 학술세미나하거나 1년에 한번 위령제 지내는 등의 활동을 해서 차라리 재단을 없애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서도 확인했듯 재단을 설립해서 피해자들을 실질적으로 구제하거나 역사를 바로잡을 순 없다. 

그나마 국회에서 강제동원 피해자들 의견이 담긴 법안을 발견할 수 있다. 김동철 바른미래당 의원은 지난 2월말 ‘일제강점기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에 대한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근로정신대지원법)’,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안(대일항쟁기지원법)’, ‘사할린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사할린지원법)’ 등 3가지 법안을 대표발의했다. 

▲1994년 3월 14일 관부재판 첫번째 당사자 본인 신문을 위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법원으로 향하는 원고들. 왼쪽부터 근로정신대 양금덕 할머니, 위안부 고 이순덕할머니, 원고들을 도운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 사진=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제공
▲1994년 3월 14일 관부재판 첫번째 당사자 본인 신문을 위해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법원으로 향하는 원고들. 왼쪽부터 근로정신대 양금덕 할머니, 위안부 고 이순덕할머니, 원고들을 도운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이금주 회장. 사진=근로정신대할머니와함께하는시민모임 제공

근로정신대지원법(국회 여성가족위원회)은 “국내에서 지금도 ‘정신대’와 ‘위안부’ 개념이 확실하게 구분돼있지 않아 전시 여성인권 관련 조사·연구·교육 등 사업있어야 한다”며 “서울시를 비롯한 몇몇 지자체는 조례를 마련해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지만 전국적인 실태조사조차 없는 등 국가적 차원의 보호·지원이 미흡하다”고 법 제안이유를 밝혔다. 

[관련기사 : 정신대는 위안부와 같은가]

이 법안들은 바른미래당 뿐 아니라 김종훈 민중당 의원, 장병완 민주평화당 의원,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 정양석 자유한국당 의원 등 여러 당 의원들이 발의자에 이름을 올렸다. 다만 현재 국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은 상황이라 논의에 어려움이 있다. 

▲ 안개낀 국회 모습. 사진=민중의소리
▲ 안개낀 국회 모습. 사진=민중의소리

김동철 의원실 관계자는 미디어오늘에 “근로정신대 생존자가 소수인만큼 연 21억5000만원(비용추계 결과)에 불과할 정도로 예산범위도 적은데 여가위 상정이 어렵다”고 말했다. 여가위 핵심관계자는 미디어오늘에 “(근로정신대지원법을) 몰랐다”며 법안을 검토한 후 “취지에 공감하고, 통과여부를 떠나 국회 내부에서 환기해야 할 부분”이라고 말했다. 

김동철 의원이 발의한 대일항쟁기지원법(국회 행정안전위원회)은 대일항쟁기위원회를 국무총리실 산하에 신설해 추가 조사 등을 진행하자는 내용의 법안이고, 사할린지원법(국회 외교통일위원회)은 ‘사할린동포지원위원회’를 설치해 사할린 동포 전반에 대한 조사와 피해자 지원 등을 규정한 법이다. 

백 회장과 정 위원은 소위 ‘김동철 3법’이 강제동원 피해자 전반을 다루는 법안이라며 통과를 주장했다. 다만 대일항쟁기지원법에서 규정한 대일항쟁기위원회 기간이 1년이라 한계가 있는데 오제세 민주당 의원이 2021년 6월 말까지로 한 법안을 지난 2월말 발의했고, 김민기 민주당 의원은 2029년말까지 존속하기로 한 법안을 지난 5월 발의해 보완이 가능하다. 

▲ 지난해 12월 방송한 YTN 기획특집 '이산의 섬, 사할린' 화면 갈무리
▲ 지난해 12월 방송한 YTN 기획특집 '이산의 섬, 사할린' 화면 갈무리

사할린 강제동원 피해자를 돕는 다른 법안도 최근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신윤순 사할린강제동원억류피해자한국잔류유족회장은 미디어오늘에 “취지는 공감하지만 김 의원 법안은 외교부에서 반대할 우려가 있다”며 “윤상현 한국당 의원 법안도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윤 의원이 지난 7일 대표발의한 ‘사할린한인 국내유족에 대한 지원법’은 관심 밖에 있던 국내에 있는 유족에 주목해 의미가 있다. 

강제동원총연합회는 지난 20일 한국당 앞에서 “현재 발의된 지원법안 통과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라”며 집회를 열었다. 백 회장은 “제1야당인데 법률안에 미온적이라고 생각해 한국당에 법안 통과를 요구했다”고 전한 뒤 “국회가 열리고 법안이 통과된 뒤에도 열심히 전파해야 지원법안이 있는지 모르는 유족들에게 도움이 된다”며 관심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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