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당과 정의당이 격돌했다. 지난달 11일 헌법재판소가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헌법불합치를 선고했다. 나흘 뒤 이정미 정의당 의원이 형법‧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하자 당내 ‘여성주의자 모임’은 당일 비판 성명을 내며 맞섰다. 이후 민주노총, 녹색당, ‘모두를 위한 낙태죄폐지 공동행동’ 등도 입장을 내고 정의당 법안을 비판했다.

정의당의 형법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은 여전히 임신중지를 금지하는 전제 하에 ‘일부 허용’하는데 그쳤다.

정의당 법안, 헌재 결정 테두리 내 제한적

정의당 법안은 임신기간을 14주 이전과 14~22주, 22주 이상 등 세 구간으로 나눠 기간에 따라 기준을 다르게 적용한다. 14주 이전까지는 임신중지가 가능하고 이후부터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예외사유를 뒀다. 14~22주까진 사실상 현행법의 허용사유(성폭력으로 인한 임신 등)에 ‘사회‧경제적 사유’를 더했다. 22주는 WHO를 비롯한 의료계가 태아가 모체를 떠나 의학기술로 생존할 수 있다고 보는 시기다. 22주 이상일 땐 ‘여성의 건강에 중대한 위해를 끼칠 경우’에만 임신중지가 가능하다.

헌재의 결정 취지는 무엇일까. 단순위헌과 헌법불합치 의견을 종합하면, 여성 요청에 따른 임신중지 허용 범위는 14~22주 사이다. 다수의견(헌법불합치‧4명)은 결정문에 “임신 22주 내외에 도달하기 전이면서 동시에 임신유지와 출산여부에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는 시기까지 낙태에 국가가 생명보호 수단과 정도를 달리할 수 있다”고 밝혔다. 단순위헌 의견(3명)은 나아가 임신 14주까지는 사유를 요구하지 않고 임신여성 자신의 판단 아래 임신중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하한’을 뒀다.

▲  정의당 여성위원회 관계자들이 4월11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결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정의당 여성위원회 관계자들이 4월11일 오전 국회 정론관에서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위헌 결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정의당안은 14주 뒤부터 여성 요청에 따른 임신중지를 금지해, 단순위헌이 정한 하한선을 그대로 법안에 옮긴 셈이다. 정의당 측은 법안이 ‘헌재 결정에 가장 부합한다’는 입장이다. 정의당 관계자는 “단순위헌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며 ”기본 주수 개념을 12주와 24주로 기점 삼는 법안을 준비하다가, 헌재 선고가 나온 뒤 결정문의 주수개념을 따랐다”고 말했다. 한편 다른 정의당 관계자는 페이스북을 통해 “법안 통과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라고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

후기 임신중지 애초 극히 드물어, 제한 여부 무관

여기서 제기되는 의문은 반드시 임신중지에 ‘제한’이 있어야 하는가다. “맘대로 임신중지할 수 없게 하려면 제한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극단적으로는 ‘출산 하루 앞두고 임신중지하는 걸 합법화하자는 거냐’는 반발도 존재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것이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주장이라고 지적한다. 임신중지를 하루아침에 결정할 수는 없는 데다, 임신 후기로 갈수록 임신중지는 ‘아이를 살릴까 말까’보다 모체 건강 문제가 되는 까닭이다.  우석균 ‘건강권 실현을 위한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위원장은 “임신 후기로 갈수록 임신여성 신체에 대한 위해가 커 분만에 준한다. (법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이때엔 대부분 태아나 모체의 건강을 사유로 임신중지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 후기 임신중지는 극히 드물다. 의료계는 22주 이후 임신중지 비율을 1% 미만이라고 본다. 지난 2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실태조사에 따르면 12주 이내 임신중지가 95.3%로 나타났다. 사유와 주수 제한 없이 여성의 요청에 따라 임신중지를 허용하는 캐나다의 보건당국 자료를 보면 2017년 21주 이후 임신중지 비율이 0.66%에 그쳤다.

▲ 4월11일 의료인들이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헌재의 낙태죄 위헌 결정을 촉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 4월11일 의료인들이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헌재의 낙태죄 위헌 결정을 촉구했다. 사진=김예리 기자

그렇다면 임신 22주 뒤엔 ‘모체 건강을 해치는 경우’만 임신중지를 허용한 정의당 법안이 타당하다 말할 수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윤정원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여성위원장은 “후기 임신중지가 극히 드문 만큼, 각기 사연을 보면 절박하고 자원이 부족한 상황이 대부분”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후기 임신중지는 여성이 △임신중지를 못하도록 억압 받았거나 △상대 남성의 폭력성이 개선되길 기대하며 임신을 유지했거나 △청소년이라 임신 사실을 모르거나 밝힐 수 없었던 처지 등 위기상황 속에서 이뤄진다. 임신 중 출혈을 월경으로 착각해 임신 사실을 뒤늦게 알기도 한다.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이 20주 이후 시간이 흐를수록 수술 비용이 높아져 알바를 하느라 28주에서야 큰 액수를 내고 받는 사례도 있다. 윤정원 여성위원장은 “이런 위기 상황에 늦었단 이유로 증명을 요구하고 제한하면 임신중지는 더 뒤늦고 위험한 상황에서 이뤄진다”고 말했다.

사유 제한이 오히려 위험 낳기도

임신 중지 요건을 맞추려 일부러 몸에 상해를 입힐 수 있고, 까다로운 조건 탓에 임신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정신건강을 잃거나 자살 시도를 하는 경우도 있다.

유럽 국가들이 임신중지 사유인 ‘건강’의 개념을 점점 넓히는 추세인 것도 이 때문이다. 유럽에서 가장 엄격하게 임신중지를 제한하던 영국 자치령 맨섬 사례는 시사점이 크다. 맨섬은 지난해 법을 개정해 15~24주 사이 여성이 ‘건강상 이유’로 임신중지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조건은 ‘여성이 그렇게 이야기했다(according to woman)’고 주치의가 인정하는 경우로, 실상 여성이 요청하면 임신중지를 허용했다.

▲ 지난 4월11일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낙태죄 위헌 여부를 결정하는 헌법재판소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 지난 4월11일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이 낙태죄 위헌 여부를 결정하는 헌법재판소 앞에서 연 기자회견에서 한 참가자가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우석균 정책위원장은 “여러 국가가 ‘질병으로 인한 사유’ 범위를 넓히는 추세다. 이렇게 제한사유를 정해놓고 나중에 넓히려면 오히려 따지기가 복잡해진다. 한국이 임신중지 관련 법제를 개정하며 해외의 시행착오를 따를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한편 임신중지 허용 사유인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도 그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의당안은 ‘성폭력처벌법’상 성폭력 범죄로 국한하지만, 데이트성폭력부터 부부강간, 여성이 피임을 요구했지만 따르지 않는 스텔싱(몰래 콘돔에 구멍을 뚫는 행위)까지 임신중지 허용 사유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윤정원 위원장은 “현재 우리나라는 여성에게 상담확인서와 판결기록 등 증명을 요구하는데, 해외에서는 여성 진술을 그 자체로 인정한다”며 “성폭력 개념확장은 여성인권은 물론 증명에 드는 시간을 줄이는 데에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근본은 ‘원치않는 임신’ 줄이기, 정책입법 조용

정의당안이 헌재 결정문을 기계적으로 반영하긴 했지만 선고 취지엔 반하는 측면도 있다. 헌재는 여성의 기본권을 새로 해석해 “어떻게 하면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면서도 낙태를 실질적으로 감소시켜 태아의 생명을 보호할지”를 입법논의에 맡겼다. 그러나 국회는 새로운 정책로드맵을 짜기보다 ‘임신중지를 몇 주에서 제한할까’를 둘러싼 논의에 멈춰섰다. 

이유림 ‘모두를 위한 낙폐죄폐지 공동행동’ 집행위원은 “헌재는 국가가 어떤 기본권을 보장할지 판단했다면, 정치권은 이 기본권을 한국의 보건의료시스템과 정치 상황에서 실현할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 그런데 국회는 ‘낙태 금지를 원칙으로 하되 예외적으로 허용한다’는 기존 프레임을 계속 가져간다. 어떻게 여성의 건강권과 재생산권을 보장하고 의료접근성을 높일지는 무관심하다”고 비판했다.

▲ 국회 본회의장. ⓒ 연합뉴스
▲ 국회 본회의장. ⓒ 연합뉴스

윤정원 위원장은 “태아의 발달상태와 생존가능성, 모체와 태아 건강, 분만할 경우 입양이나 양육과 관련한 정보제공과 전문상담, 지원책을 어떻게 마련할지 여부는 여성의 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국회는 이 부분은 얘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함께 논의해야 할 과제도 많다. 활동가들은 원치않는 임신 자체를 줄이고 출산여성에 대한 낙인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피임교육과 성평등, 입양·양육 등 임신과 출산에 근본 영향을 미치는 복지정책 논의를 병행해야 한다.

이유림 집행위원은 “나아가 국가가 여성의 일생에서 얼마나 성평등을 보장하느냐에 따라 여성의 선택도 달라진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번 헌재 결정은 순전히 여성들이 거리에서 만든 결과다. 정치권은 주도하지도 기여하지도 못했다. 지금이라도 폭넓고 풍부한 입법논의를 본격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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