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영호남 방문이 ‘1일 1실수’ 논란을 빚고 있다. 일정은 해프닝으로 기억됐고 메시지에는 힘이 없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2일 귀국 했다. 이튿날인 13일부터 활동을 시작해 14~15일 곧바로 고향인 충청권을 방문했다. 이어 16일부터는 3박4일 동안은 영남과 호남을 가로지르며 사실상 대권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각 장소에서 내놓은 메시지는 명확하지 않았고 더러는 현 상황과 맞지 않는 다는 지적도 나온다. 16일 방문한 경남 거제의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반기문 전 총장은 세계 지도자들과의 네트워크를 강조하며 “정상외교를 통해서 얼마든지 (수주량을) 확대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7일 경남 김해 봉하마을을 찾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사진=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페이스북 페이지 


반기문 전 총장은 공공선박을 발주해 내수 시장을 키우겠다는 정부 계획을 언급하면서 “노사와 협력업체, 지역경제 전체가 마음을 모아야할 것”, “허리띠를 졸라매고 공생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내 조선업계 불황은 전 세계적인 수주 감소에서 발생했다. 반기문 전 총장이 정상외교를 통해 없는 수주를 만들어 낼 능력을 가졌다는 것인지 의문이다. ‘외국 수주’를 끌어오겠다는 단편적인 대안보다는 국내 연관 산업을 함께 발전시켜야 한다는 방안을 내놔야 했다는 평가다.

사드 배치와 관련해서도 애매한 답변을 내놨다. 반기문 전 총장은 “국내에 논란이 있었던 거 같다”며 “사드는 순수하게 디팬스(방어)하는 것”이라고 강조하면서도 부지 선정 문제를 두고서는 “님비 현상”이라고 비판했다. 또 중국의 보복조치에 대해서는 “외교로 풀 수 있다”고 자신했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지난 tbs라디오 ‘색다른 시선, 김종배입니다’에 출연해 반기문 전 총장이 “사드 문제와 관련해서는 미국이 하자는 쪽으로 입장을 정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며 “미국이 하자는 대로 끌려가면 우리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결정이나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평가했다.

청년 문제와 관련해 반기문 전 총장은 “해외로 진출해야 한다”며 “정 다른 일이 없으면 발런티어(자원봉사자)로 세계도 다녀보고 하는 게 중요하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 있다”고 말했다.

▲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7일 전남 진도 팽목항을 찾아 세월호 희생자 분향소를 방문하고 있다.  사진=반기문 전 총장 페이스북 페이지 


그는 “3포 세대, 5포 세대라는 말이 있지만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면서 “좋은 호텔에서 지내다가 요즘 화장실이 하나 밖에 없는 온돌방에서 직원들과 같이 잠을 자는 체험을 하고 있다”는 소개를 하기도 했다.

청년 일자리 문제나 청년층의 비정규직 문제 등에 대한 준비된 대답이었는지는 의문이었다. 추혜선 정의당 대변인은 18일 “박근혜 대통령의 밑도 끝도 없는 ‘청년 중동진출’ 타령과 닮았다”고 꼬집었다.

반기문 전 총장의 명확하지 않은 메시지는 실무팀의 혼선과도 연결된다. 중앙일보는 “실제 김숙 전 대사가 이끄는 외교관·측근 그룹과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 곽승준 고려대 교수 등 친이명박계 인사들 사이 갈등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매끄럽지 못한 대언론관도 문제다. 반기문 전 총장은 일정 지연을 이유로 행사지에서 예정됐던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을 미루거나 건너뛰고 지나가버렸다. 17일 팽목항에서도 반기문 전 총장을 기다리던 기자들은 그의 뒷모습만을 봐야했다. 18일 전남 여수 방문 일정이 미뤄지면서 예정돼 있던 질의응답을 진행하지 않았다.

급기야 18일 한일 위안부 합의 관련 말바꾸기 논란에 대해 질문한 기자를 두고 반기문 전 총장이 “내가 마치 역사의 무슨 잘못을 한 것처럼…나쁜 놈들이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었다.

▲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 14일 사회복지시설 꽃동네를 찾아 식사 봉사를 하고 있다. 식사를 제공하는 반기문 전 총장이 턱받이를 하고 누워있는 노인에게 음식을 떠먹인 것은 위험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사진=포커스뉴스


해당 질문을 했다는 조정훈 오마이뉴스 대구주재 기자는 19일 오마이뉴스 “반 전 총장님, 제가 그 질문을 한 나쁜 기자입니다” 기사에서 “행사를 전혀 방해하지도 않았고 반 전 총장님의 발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질문을 한 것입니다. 오히려 경호원들이 옷을 잡아당기는 등 취재방해를 했다”며 해명을 요구했다.

이번 영호남 방문에서 명확해진 것은 반기문 전 총장의 정당행에 관한 것이다. 그는 지난 16일 기자들과 만난 저녁 자리에서 “설 이후 입당 여부가 가닥이 잡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이 없어 손으로 땅을 긁는 심정”이라고 조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예전에는 피고용자 입장이라 정부에서 차와 사무실을 지원했는데 이제는 차도 두 대나 사고 운전수와 비서도 고용하고 사무실도 내 돈으로 직접 얻었다. 꼭 돈 때문에 당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이라며 말끝을 흐리기도 했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정당이 현금인출기도 아니고 필요에 따라 돈을 이유로 (정당을) 고르겠다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 정치 수준에 또 한 번 먹칠하는 상식 이하의 발언”이라고 비판했다.

▲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12일 인천공항으로 입국하면서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포커스뉴스


반기문 전 총장의 입당 정당에 대해서도 윤곽이 드러나고 있다. 반기문 전 총장은 스스로 “새누리당이 쪼개져서 그럴(경쟁)상황이 아니다”고 말했다. 자신을 보수 후보로 자리매김하는 동시에 입당 고려 대상에서 새누리당을 배재했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노컷뉴스는 19일 반기문 전 총장이 바른정당에 입당을 타진했다고 보도했다. 반기문 전 총장 측이 새누리당에서 추가적으로 탈당할 가능성이 있는 충청권 의원들과 마포캠프의 친이계 인사 등으로 정당 규모를 갖추고 난 후 바른정당과 당 대 당 통합을 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시나리오도 제시됐다.

윤태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19일 SBS라디오 박진호의 시사전망대에 출연해 “국민의당은 전당대회를 거치면서 자강론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고 최근 반기문 전 총장 행보를 봤을 때에도 무슨 득이 되겠냐 싶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윤태곤 실장은 이어 “바른정당 쪽하고 (입당) 이야기가 많이 되고 있다는 기사도 나오는데 이것 역시 문제”라며 “정당 여러 개를 거느려서 하위 파트너로 삼는 게 아니라 선택지가 하나 밖에 없어진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귀국 전까지 여타 정당의 구애를 받았던 반기문 전 총장이 귀국 후 입지가 좁아지는 모양새다. ‘입국’이라는 이슈가 있었음에도 지지율이 제자리를 맴돌면서 ‘반기문’ 카드에 대한 의구심도 생기고 있다. 귀국 후 일주일 간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결국 반기문 전 총장이 특정 정당에 먼저 입당을 타진할 정도로 세가 위축됐다는 관측도 가능하다.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는 이날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김성덕입니다’ 인터뷰에서 “반기문 전 총장이 대통령을 생각한다면 대국민 메시지가 있어야 하고 어떤 분들과 정치하겠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며 “하지만 메시지도 없었고 보여준 사람도 실패한 세력인데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실패한 탄핵당한 정권의 뒤를 이어가는 듯한 발언을 하면서 엄청난 실망을 주게 됐다”고 혹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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