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명의 시민이 모인 촛불집회 이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또 다른 변곡점이 다가오고 있다. 내주 안으로 검찰이 최순실씨를 기소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찰은 하야 요구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대통령 연설문 첨삭’에 대해 ‘대통령기록물 관리법 위반’ 혐의를 적용하지 못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현행 대통령기록물법을 둘러싼 해석이 다양하고 청와대 안의 업무가 법이 규정한 ‘기록물’에 의해 운영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광철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16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사태와 대통령 기록’ 토론회에서 기록물의 성립 및 생산시기에 대한 세 가지 견해를 소개했다.

첫 번째 견해는 ‘탑재설’이다. 대통령의 직무수행과 관련되어 문서관리시스템(참여정부의 경우 이지원)에 문서가 탑재되면 그 순간부터 모두 대통령기록물이 된다는 견해다. NLL 대화록 사건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박지영 대통령 기록관 연구원은 이 같은 ‘탑재설’에 따라 대통령이 결재하기 전에도 청와대에서 생성된 문서는 기록물이 될 수 있다는 취지의 증언을 했다.

▲ 10월 24일자 JTBC 뉴스룸 갈무리

두 번째 견해는 ‘결재설’이다. 시스템에 탑재된 문서에 대해 결재권자가 결재를 해야 기록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결재’란 무엇인가라는 쟁점이 남는데, 결재권자인 대통령인 열람을 했다면 결재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검찰은 NLL 대화록 ‘사초폐기’ 사건에서 이 같은 입장을 취했다. 결재권자인 노무현 대통령이 열람한 문서였기에 NLL 대화록 초본도 대통령기록물이며, 이를 삭제한 것은 문서 폐기라고 주장한 것.

세 번째 견해는 ‘등록설’이다. 대통령의 열람이나 결재가 있다 해도 문서관리시스템에 최종적으로 문서가 등록돼야 기록물이라는 것이다. NLL 대화록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장은 이지원 시스템에서 종료 버튼이 눌러지지 않은 문서는 기록물로 성립되지 않으며 등록절차가 곧 기록물의 생산이라고 밝혔다.

세 가지 견해 중 어느 것을 따르느냐에 따라 최순실 게이트를 둘러싼 청와대 비서관들과 박근혜 대통령 등에 대한 처벌 유무가 달라진다. ‘탑재설’에 따르면 최씨에게 유출된 연설문과 국무회의 발언 자료 등은 기록물이며 이를 유출한 것으로 추정되는 박근혜 대통령과 정호성 비서관 등은 처벌대상이다.

‘결재설’에 따르면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다. 박근혜 대통령이 결재하거나 열람한 문서가 최씨에게 유출됐다면 박근혜 대통령과 정호성 비서관은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언제 결제가 있었는지를 두고 박근혜 대통령 및 청와대 비서관을 대상으로 한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이광철 변호사는 “결재권자인 대통령이 문서를 열람하고, 문서성립을 의사를 표시한 때가 언제인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등록설’에 따르면 청와대 문서는 문서관리시스템에 등록된 이후 대통령기록물이 되기 때문에 박근혜 대통령도 청와대 비서관들도 처벌 받지 않게 된다. 검찰도 이 등록설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검찰 특별수사본부 관계자는 지난 8일 취재진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 기록물법 적용이 어렵다”고 밝혔다. 해당 문서들이 ‘최종본’이 아니라는 이유였다.

문제는 검찰의 ‘그 때 그 때 다른’ 기소가 대통령 기록물에 대한 개념 정의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검찰은 박근혜 대통령이 ‘찌라시 수준의 문건’이라고 규정했던 정윤회 문건을 공식 기록물로 판단하고 박관천 청와대 경정 등을 기소했다. ‘탑재설’보다도 넓은 의미로 기록물을 정의한 셈이다. 또한 NLL 대화록 폐기사건 때는 NLL 대화록이 초본이라도 대통령이 열람했으니 기록물이라며 관련자들을 기소했다. ‘결재설’을 따른 셈이다.

그랬던 검찰이 이번 최순실 사건에서는 연설문 등이 최종본이 아니라는 이유로, 즉 ‘등록설’에 따라 기소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광철 변호사는 “(검찰의) 이런 논리로 최순실씨에게 유출된 청와대 문건들이 대통령기록물이 아니라고 한다면 남북전상회담 회의록 초본도 박관천 경정이 작성한 문건도 대통령기록물이 아니다”라며 “앞의 두 건의 법 적용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기인한 검찰권 행사임을 자인하는 태도”라고 지적했다.

▲ 최순실씨가 10월31일 오후 3시 미르·K스포츠 재단 강제 모금 의혹과 대통령 연설문 등 청와대 자료 사전 열람 의혹 조사를 위한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했다. 사진=이치열 기자
기록물 유출보다 기록물의 생산과정에 민간인이 개입한 것이 더 큰 문제라는 비판도 나왔다. 최재희 이화여대 기록관리연구원 교수는 “기록물을 자의적으로 왜곡시키고 변화시켰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며 “아무리 민주주의제도에 맞게 기록물 법과 제도 만들어서 시행해도 운영하는 사람이 이렇게 활용한다면 의미가 없다”고 지적했다.

기록관리 관련 국제표준인 ‘ISO 15489’는 “기록은 진본성, 신뢰성, 무결성 등을 확보할 때 공식적으로 승인된 업무 증거가 된다”고 규정한다. 진본성이란 ‘기록이 표방하는 그대로의 기록인지, 그것을 생산하거나 보낸 것으로 되어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생산하거나 보냈는지’ 등을 뜻한다. 신뢰성은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진 개인에 의해, 일상적으로 활용하는 시스템에 의해 생산된 것인지’ 등을 의민하며 무결성은 ‘기록이 허가받지 않은 변경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권한도 없는 민간인 최순실씨의 개입은 이런 기록물의 관리 기준을 모두 파괴했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도 대통령 기록물에 대한 ‘손상’, 또는 ‘멸실’을 금지하고 있다. 최 교수는 “(이번 사건은) 기록물에 대한 학대”라고 지적했다.

기록관리라는 관점에서 최순실 게이트가 정치권력에게 잘못된 신호를 남길 수도 있다. ‘투명하게 일을 처리하겠다’가 아니라 ‘추후에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최대한 법적인 기록물이 아닌 자료를 공유하거나 기록물 자체를 남기지 말아야겠다’는 인식을 줄 수 있다는 것. 이미 많은 부분 청와대의 의사결정은 기록물이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세월호 7시간’ 기록을 두고 청와대를 상대로 정보공개청구 소송을 진행했던 하승수 변호사(전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은 “소송과정에서 청와대는 ‘세월호 참사 관련해 대통령에게 구두로 보고한 부분이 있는데, 구두 보고한 부분에 대해서는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이 보고를 받고 지시를 할 때에는 100% 구두로 했기 때문에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고 밝혔다.

하 변호사는 “조선시대 왕조차도 말 한 마디, 행동 하나를 꼼꼼하게 다 기록했는데 대통령의 지시 내용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우리의 후세들은 배가 침몰해서 300명이 넘는 생명이 사라져가는 상황에서 대통령이 뭐라고 했는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영삼 서울시 정보공개청책과 과장(전 대통령비서실 기록연구사)은 “2011년 대통령 기록 관리에 대한 글을 쓰면서 이명박 정부의 대통령 비서실에서 기록을 어떻게 생산하는지 3-4년 정도 추적한 적이 있다. 아주 일부 업무에서 기록물이 시스템 하에 관리되고 있었고, 정책 결정이나 보고 과정은 기록되지 않고 있었다”며 “지금도 같은 상황일 가능성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이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기록물의 범주를 다양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조영삼 과장은 “기록물 관리의 구멍은 이메일이다. 전자기록관리 업무시스템 체계 하에서 업무와 소통이 이루어지면 좋은데 그런 시스템이 아니라 업무가 이메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행정관들이 이메일로 각 부처에 지시를 하고 보고받는 일이 다반사다. 이메일을 기록물로 만드는 것을 법제화함으로써 가급적이면 많은 업무행위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 과장은 “BH 본관 VIP 집무실 등의 공간은 상시적으로 녹음이나 녹화 되어 자동 기록화되는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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