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게이트가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며 언론과 기자들 사이에서도 ‘특종경쟁’이 붙었다. 많은 기자들이 타사에서 나오는 특종에 좌절감을 느끼고, ‘안 나온 새로운 이야기’를 찾기 위해 무엇이든 뒤지고 있다. 해외연수 중에 최순실 일가를 찾아나선 SBS 하현종 기자의 ‘취재 후기’를 싣는다. <편집자주>

해외연수, 그리고 현장 취재

지난 달 19일부터 SBS는 최순실 게이트를 정면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타 언론사에 비해 다소 늦은 출발이었다.

국내 취재에서는 한겨레나 JTBC, TV조선 등에 비해 후발 주자였던 만큼 당장은 최순실이 회사를 세우고 이주하려 했던 독일 취재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파리에서 어학연수 중이었던 나는 보도국에 독일 취재 합류를 자원했다. 해외 특파원 3년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기자들의 해외연수. 하지만 고민은 없었다. 도리어 적지 않은 출장비만 허비하고 현장에서 별 다른 내용을 건지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프랑크푸르트는 파리에서 TGV로 3시간 50분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SBS 파리특파원인 배재학 선배는 이미 며칠 전부터 독일 슈미텐에서 취재를 하고 있었다. 해외에서 다큐멘터리나 기획 뉴스를 취재하는 경우는 많지만, 이른바 스트레이트 기사를 취재하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그것도 재해/재난 등 ‘사고’가 아닌 ‘사건’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유럽에서의 사건 기사 취재라니. 그저 부딪혀 볼 수밖에 없었다.

해외 교포 사회는 의외로 좁다는 점에 착안해 우선 한인회와 교회, 한식당 등 한인들이 모이는 곳을 중심으로 탐문 취재를 시작했다. 최순실과 현지 조력자들에 대한 여러 소문은 들을 수 있었지만 뚜렷하게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다행히 배재학 특파원이 발 빠르게 움직여 최순실의 비덱타우누스 호텔과 숨겨진 자택에 대한 현장 취재를 타 언론사보다 한발 앞서 끝낸 상태였다. 국내 취재건 해외취재건 결국 기본은 현장이다. 비덱 호텔과 은신처 주변을 다시 짚어가며 취재하는 과정에서 최순실이 독일에 세운 회사인 비덱스포츠의 도이체방크 은행거래내역을 입수할 수 있었다.

▲ 10월22일자 SBS 8뉴스 갈무리

작은 성과, 그리고 은밀한 덴마크행

이 서류를 토대로 비덱스포츠와 더블루케이 독일 법인이 내부 거래를 하는 페이퍼컴퍼니라는 사실, 비덱스포츠의 자금이 최순실 일가의 독일 생활비로 이용되고 있었다는 사실 등을 단독 보도할 수 있었다. 독일에 설립된 최순실 회사의 성격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에서 유의미한 성과였다.

하지만 취재의 핵심은 역시 당사자인 최순실을 만나는 것이었다. 10월 중순 쯤 독일 슈미텐을 떠난 것으로 보이는 최순실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단초는 은행거래내역에서 나왔다. 독일에서 덴마크로 이어지는 독일 A7 고속도로 선상의 주유소와 덴마크 올보르그의 아시아 식당 및 호텔, 그리고 헬그스트란드 승마장에서의 은행거래 흔적. 최순실 일행이 독일을 떠나 덴마크로 향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단서였다.

지난 달 23일 내부 회의를 거쳐 독일 취재팀을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배재학 특파원 팀은 독일에 남아 취재를 이어가고, 나는 덴마크 올보르그로 이동해 최순실 일행을 추적하는 것으로 취재의 가닥을 잡았다. 자동차와 기차로 얼마든지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유럽에서 철저히 몸을 숨기고 있는 사건 당사자를 찾아내는 일. 언론계에서 흔히 말하는 ‘맨땅에 헤딩’하는 취재였지만 상황은 급했다. 되든 안 되든 시도는 해봐야 했다.

독일 ICE와 자동차 등 육로를 통해 덴마크 올보르그에 진입했다. 직항 항공편조차 거의 없는 소도시였다. 덴마크에서는 4번째로 큰 도시라지만 우리나라로 치면 군 정도의 크기랄까. 도착한 이후 우선 일식, 태국식, 베트남식 식당과 주요 호텔들을 위주로 탐문 및 잠복 취재를 진행했다. 은행거래 내역서 분석 결과 최순실 일행이 현지식 보다는 한식이나 아시아 음식을 선호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었다.

역시나 올보르그 곳곳에서 최근까지 최순실 일행이 머무른 흔적이 발견됐다. 헬그스트란드 승마장에서는 바로 2주 전에 정유라를 목격했다는 직원의 진술이 나왔다. 그들이 독일을 떠나 도주했다면 바로 여기일 것이다! 어느 정도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식당에서, 호텔에서, 또는 아기가 있다는 점 때문에 Bilka라는 덴마크의 대형할인마트나 소아과 병원, 유아용품 전문점 등에서 최씨 일행을 포착해낼 수 있으리라.

1차 낙종, 태블릿 PC

최씨 일행이 등장할 만한 장소를 꾸준히 짚어가던 중 JTBC의 태블릿 단독 보도가 터져 나왔다. 개헌을 뒤집어버릴 정도의 대형 특종. 기자로서 낙종에 대한 자책과 함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정농단에 대한 충격과 자괴감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었던 큰 기사였다.

▲ 10월24일자 JTBC 뉴스룸 갈무리

당초 독일에서는 국내 미르재단과 케이스포츠재단에서 독일 비덱스포츠로 이어지는 자금 유출 흐름을 추적하고, 덴마크에서는 최순실 행적을 쫒기로 했던 양 갈래 취재 전략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국정농단이 사실로 드러난 만큼 의혹의 당사자인 최순실을 직접 찾아내 화면에 담고 인터뷰를 따내는 방향으로 취재력을 집중하기로 결정됐다. 현지 취재인력 보강을 위해 새롭게 합류한 SBS 임찬종 기자를 포함해 기자 3명이 독일과 덴마크에서 최순실이 은신하고 있을 가능성이 단 1%라도 있는 곳은 모조리 이 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2차 낙종, 최순실 인터뷰

하지만 또 다시 낙종의 쓰라린 경험을 해야 했다. 세계일보가 사진과 함께 최순실 단독 인터뷰를 지면에 실은 것이다. 인터뷰 장소도 세계일보의 말대로라면 덴마크가 아닌 독일 헤센주 근교였다. 한동안 정신이 멍했다. 맥이 풀리고 다리에 힘이 빠졌다. 하지만 낙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침 세계일보의 인터뷰는 최씨의 일방적인 해명 위주여서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기에는 미흡하다는 여론이 일었고,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음모론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최씨를 찾아내기만 한다면 공격적인 2차 인터뷰를 통해 만회할 여지가 있어 보였다.

아직 희망은 남아 있다! 8시간에 이르는 한국과의 시차. 낮에는 잠복 취재를 하고, 밤에는 국내 취재팀의 출근 시간에 맞춰 취재내용을 공유하고 전략 회의를 하느라 하루 수면시간이 2~3시간에 불과했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그때까지도 올보르그에서 최씨의 흔적이 발견됐다는 사실은 대외적으로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티즌 수사대의 집단지성은 위대했다. 낭설 수준의 음모론이 점차 구체화되더니 결국 일부 네티즌들이 덴마크 올보르그를 지목하기에 이르렀다. 세계일보의 사진에서 발견한 콘센트 모양과 SBS의 기존 보도 내용을 조합해 추론한 것이었다.

▲ 10월27일자 세계일보 1면

올보르그에서 일주일째 잠복하던 취재팀은 속이 바짝 타들어갔다. (사실 덴마크에서 확인해본 결과 세계일보 사진 속의 콘센트의 위치와 모양이 덴마크의 그것과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네티즌 수사대가 덴마크 올보르그를 정확히 지목했다는 점에서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결정을 내려야 했다. 최씨 일행의 덴마크에서의 행적을 보도한다면 최순실 추적 취재는 거기서 끝이었다. 설령 덴마크에 있더라도 보도를 보고 다른 곳으로 도주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보도를 늦추고 추적을 이어가자니 인터넷 상에서 최순실의 덴마크 은신 의혹이 눈덩이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보도냐 추적이냐. 결국 최씨 일행의 덴마크 도피 행적을 단독으로 보도한 뒤 눈물을 머금고 현지에서 철수하는 방향으로 결정이 이뤄졌다. 기사는 제법 반향이 있었지만 일주일이 넘는 잠복 취재의 최종 목표를 이루진 못했기에 아쉬움은 어쩔 수 없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덴마크 도피 행적을 보도한 이후 불과 며칠 뒤 최순실은 귀국해 검찰에 출두했다. 분투를 거듭했으나 결국 2번의 대형 낙종을 겪었을 뿐 최씨 일행을 현지에서 포착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 사이 국내에서 SBS 특별취재팀이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고, SBS 정혜경 기자까지 합류하며 독일 현지 취재는 더욱 강화됐다.

그 결과 삼성이 일방적 피해자가 아니라 자사에 유리한 정책적 특혜를 위해 최씨 측과 뒷거래를 했다는 구체적인 정황을 포착해 단독 보도하는 등 매우 중요한 성과를 거뒀다. 이후 SBS 특별취재팀과 보도국 기자들은 크고 작은 단독기사들을 속속 발굴해내며 최순실 게이트의 실체에 접근해가고 있다. 한발 앞섰던 일부 언론사들과의 격차도 빠르게 좁혀가고 있다.

▲ 11월6일자 SBS 8뉴스
물론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늦은 출발에 대한 비판과 지적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세월호 7시간, 삼성 등 대기업과 최순실, 박근혜 대통령 사이의 뒷거래, 외교/안보/국방 분야에서의 국정개입 여부 등 아직도 밝혀내야 할 의혹들이 산적해있다. 늦은 만큼 SBS 모든 기자들은 더욱 분투중이다. SBS 기자들의 귓가에는 여전히 레니 크라비츠의 “It ain't over till it's over"가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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