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실패는 현재까지 어떻게 이어졌을까? 구체적으로 어떤 행태가 사라지지 않고, 어떤 인물이 악습을 세습했을까?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친일·독재부역자들이 한국 사회를 지배해 왔다. 공소시효 만료, 사망, 권력실세 등 이유로 이들을 법정에 세울 수 없더라도 역사의 심판대에는 올릴 필요가 있다.

고문치사와 은폐, 닮은 꼴 사건

“저놈 잡아라.” 1948년 1월말 친일경찰 출신 한국경찰 노덕술과 그 부하들이 2층 취조실 창문을 열고 외쳤다. 미군정 수도경찰청장 장택상 저격사건 피의자 박성근(당시 25세)이 1월29일 오전 3시에 죽자 경찰은 박성근이 도주한 것처럼 꾸몄다. 사체는 한강으로 가져가 얼음구멍에 넣었다.

실제론 노덕술이 곤봉으로 박성근을 내리쳤고, 부하 김재곤·박사일 등을 시켜 물고문을 했다. 사건은 6개월이 지난 7월말에야 알려졌다. 노덕술은 처벌받지 않았다. 그해 동아일보 8월27일자에 따르면 장택상은 노덕술 등에게 5000~2만원의 특별상여금으로 포상했다.

▲ 반민특위에서 풀려난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

고문치사 및 은폐 사건은 1987년 재발했다. 1987년 1월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으로 사망한 박종철에 대해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명언(?)을 남겼다. 사건 수습을 위해 내무장관으로 임명된 정호용은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때리느냐”고 변명했다. 정호용은 1980년 5월 광주 학살 당시 특전사령관이었다.

1948년 경찰처럼 1987년의 경찰이 사건을 조작·은폐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대공경찰 대부인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로 고문에 단 두 명만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이들에겐 거액의 돈을 줬다. 이 두 명을 검찰로 송치할 땐 똑같은 옷을 입힌 경관 여러 명을 동원해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게 배려하는 모습도 보였다.

고문의 상징, 남영동 대공분실을 만들었던 박처원은 1999년 11월 다시 역사에 이름을 올린다. 그는 민주투사 김근태를 고문했던 이근안의 도피를 지시하고, 카지노 대부 전낙원에게 ‘경찰발전기금’으로 10억원을 받아 이근안 도피금액으로 제공했다. 일제강점기에서 군부독재 고문 기술자의 계보는 노덕술-박처원-이근안 등으로 이어졌다.

노덕술, 김창룡 그리고 박정희

노덕술은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반민특위에서 잡아야 할 1순위로 꼽혔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수도경찰청 청사, 내무장관 윤치영의 집 등에 머물며 화려하게(?) 도피했다. 이승만은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잡히자 “노덕술을 잡아들인 반민특위 조사관 2명과 그 지휘자를 체포해 의법처리하라”고 했다.

노덕술은 1949년 5월말 반민특위와 박성근 고문치사·은폐사건에서 모두 풀려났다. 경찰에서 헌병으로 변신한 노덕술은 한국전쟁 당시 (친공)부역자처벌 서울지역 책임자가 됐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1950년) 6월28일~9월28일 딱 석 달 부역했다고 55만명을 조사했는데 친일파는 550명도 조사받지 않았다”며 “친일파가 살아남아 부역자를 처벌했다”고 말했다.

이승만 정부는 부역자 처벌을 빌미로, 총을 들이대는 인민군에게 목숨이라도 건지려 순응했던 장삼이사 혹은 굶는 젊은이에게 밥이라도 한 그릇 차렸던 촌부까지 학살했다. 당시 노덕술의 상관, 부역자처벌합동수사본부장 김창룡은 나이 서른다섯에 수사권을 독점하고 이승만에게 직통으로 보고했다.

당시 부역자로 몰려 옥에 갇힌 독립운동가 정정화는 ‘옥중소감’이란 시에 심정을 남겼다. “혁명 위해 살아온 반평생 길인데/ 오늘날 이 굴욕이 과연 그 보답인가/ 국토는 두 쪽 나고 사상은 갈렸으니/ 옥과 돌이 서로 섞여 제가 옳다 나서는구나” 노덕술과 김창룡은 좌익색출을 명목으로 정적을 숙청하는 공안세력을 구축했다.

‘이승만의 양자’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부역자 처벌 책임자 김창룡은 어떤 인물일까?

김창룡은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밀정으로 활동하며 독립군조직을 색출했다. 해방 이후 두 번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한 뒤 군에 들어와 좌익을 색출해 1948년 대위까지 진급했다. 같은 해 10월 여순사건에서 남로당 프락치로 검거된 박정희를 수사했다. 박정희의 만주군 선배인 원용덕, 백선엽, 정일권 등의 구명요청을 받아들여 김창룡이 박정희를 살렸다.

▲ 박근혜 대통령이 퍼스트레이디 시절, 검사 김기춘이 문세광에게 자백을 얻어내 4개월만에 사형집행시키는데 기여했다. 박근혜와 김기춘의 첫 인연이다.

김구를 죽인 안두희는 1992년 4월 자신의 배후에 김창룡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안두희·김창룡·이승만은 김구 암살의 주요인물이다. 김창룡을 암살한 김창룡 부하 허태용은 “공산당 1명에 무고한 양민 10명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이 김창룡의 손에 희생됐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직접 병원에 찾아가 김창룡의 죽음을 애도했고, 김창룡은 국립현충원에 누웠다.

독재의 공안세력, 검찰과 중앙정보부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몰락하자 친일파들은 반민특위에 이어 두 번째 큰 위기에 빠졌다. 이들을 구제한 건 이듬해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좌익을 색출하던 김창룡이 좌익혐의로 잡힌 박정희를 무사히 풀어준 덕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 중 장성급 인사들은 모두 일본육사나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다.

간첩조작사건을 본격적으로 만들던 박정희 시절 대부분을 장관급에 머물며 ‘숨겨진 2인자’로 있던 인물이 신직수(1927~2001)다. 해방 이후 박정희가 5사단장일 때 법무참모로 근무한 연으로 1963년 나이 서른여섯에 검찰총장에 올라 8년간 최장수 검찰총장을 기록했다. 유신헌법 만들 당시 법무부장관이었으며, 이후락에 이어 제7대 중앙정보부장 등을 지냈다.

박정희가 부산일보 사장 김지태의 부일장학회를 빼앗아 5·16장학회(정수장학회)를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 신직수다. 신직수는 이미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학원에 다니는 김기춘에게 장학금을 지급할 정도로 그를 총애했다. 박정희는 김기춘을 ‘김똘똘’이라 부르며 아꼈다. 사시 12회인 김기춘은 부장검사로 승진할 때 사시 8회 선배들과 함께했다.

▲ 2014년 7월 세월호 국정조사 당시 청와대 대통령비서실장 김기춘 사진=이치열 기자

“간첩은 두뇌로 잡는 것이지, 몽둥이로 잡는 것이 아니다.”(김기춘)

경찰이 ‘범인’을 만들어낼 때 검찰·중앙정보부 등 여타 사정기관은 ‘사건’을 설계했다. 신직수 법무부장관과 김기춘 법무부 법제과장은 박정희가 관심을 보이던 드골헌법을 기초로 유신헌법의 실무를 맡았다. 유신 1년 후인 1973년 신직수가 중정부장으로 갈 때 김기춘은 신직수의 법률보좌관으로 중정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중정은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실족사’로 발표했다. 동아일보가 잠시 의혹을 제기했지만 해당 기자가 구속되고 잠잠해졌다. 김오자라는 재일유학생이 다시 문제제기하자 중정은 이를 75년 11월 학원침투간첩단 사건으로 둔갑시켰다. 간첩잡는(만드는) 대공수사국 국장 김기춘은 “수년간 대학가에서 벌어진 데모가 북괴 간첩 배후 조종이었다는 걸 증명했다”고 했다.

신직수·김기춘은 검찰과 중정을 거치며 민청학련 사건, 인민혁명당 사건, 장준하 의문사 사건, 최종길 의문사 사건 등을 생산했다. 김재규 중정부장이 박정희를 쏘기 몇 개월 전 신직수와 김기춘은 청와대에 들어갔다. 운 좋게 역적기관(중정)에서 벗어나 화를 면했다. 5공시절 한직에 머물던 김기춘은 민주화 이후 5공청산이 필요했던 노태우에 의해 부활했다.

최후의 보루? ‘확인사살’ 했던 사법부

“나라의 통일과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의 구조가 가장 집중적, 효율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유신헌법의 본질인 이상 사법권의 존재양식 또한 이에 발맞춰야 함은 당연한 귀결이다.” 박정희 시절 10년간 최장수 대법원장을 역임한 민복기(1913~2007)의 1973년 신년사 한 부분이다.

▲ 민복기 전 대법원장

민복기는 1939년부터 6년간 경성지법에서 판사로 부역했다. 반민특위를 향한 공격이 한창이던 1949년 민복기는 대통령 이승만의 비서관이었다. 부당한 행정권력 작용을 바로 잡을 최종단계에 위치한 대법원장도 독재정권을 도왔다. 민복기는 해방 전후를 통틀어 법조계에서 가장 관운이 좋은 사람으로 불린다.

민복기의 아버지 민병석(1858~1940)은 대한제국 황실의 척족으로 을사조약과 한일강제병합에 앞장섰다. 민병석은 조정의 반대에도 이토 히로부미를 초빙했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공로로 육군부장, 표훈원 총재, 시종원경 내대신 등을 역임했다. 1909년 안중근이 이토를 제거하자 민병석은 이토 장례식에 참석해 죽음을 애도했다. 민병석은 종2위 훈1등까지 올랐고, 자작 작위는 장남 민홍기(민복기의 형)가 넘겨받았다.

민복기의 후예는 황우여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2차 인혁당 사건(선고 18시간만에 사형집행),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유신 비판문 낭독으로 김대중 징역 8년) 등을 민복기가 담당했다면 이어 황우여는 3·1민주구국선언 사건, 1981년 학림사건 등을 맡았다.

▲ 대선 후보자로 박근혜가 지명됐던 2012년 8월 새누리당 2차 전당대회에서 황우여 원내대표가 새누리당기를 흔들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황우여는 2008년 한나라당 의원 시절 ‘건국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안’을 제출했다. 핵심내용은 1945년 해방부터 1948년 정부수립까지 3년간 ‘친일파+이승만’ 정부를 세우는데 공이 있는 자와 그 가족을 예우하자는 내용이었다. 건국절 제정주장의 알맹이를 채우는 법안으로 통과되면 반민특위를 무산시킨 친일 반공주의자들도 건국유공자로 인정받는다.

독재청산 미흡했던 민주화

87년 민주화에도 ‘보통사람’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독재를 청산할 필요 없이 5공과 거리두기로 족했다. 5공과 무관했던 김기춘은 1988년 검찰총장으로 복귀한 뒤 1991년 5월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정국에서 법무부장관에 임명됐다. 24년 뒤인 2015년 대법원은 강기훈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강기훈이 무죄라면 유죄라고 주장했던 이들은 책임졌을까? 당시 수사검사 4명 모두 출세길을 달렸다. 남기춘은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캠프에서 클린검증제도 소위원장, 윤석만은 박근혜 캠프 외곽조직인 대전희망포럼 공동대표, 신상규는 2014년 박근혜 정부가 임명하는 대검 사건평정위원회 위원장, 곽상도는 박근혜 정부의 첫 민정수석을 맡았다.

영화 ‘변호인’의 모티브가 된 부림사건 담당검사 최병국은 한나라당에서 3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또 다른 담당검사는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 국가정상화추진위원장, 세월호 특별조사위원 등으로 익숙한 고영주다. 피해자(당시 피의자)에게 사형을 구형했던 주임검사 안강민은 이후 대검 중수부장을 거쳐 2008년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장을 지냈다. 법원은 부림사건에 대해 2009년 계엄법, 2014년 국가보안법에 대해 각각 무죄를 선고했다.

신군부 대표적인 공안사건인 학림사건 관련 판사는 황우여 뿐이 아니다.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한 최종영은 이후 대법원장, 이강국 배석판사는 헌법재판소장을 지냈다. 2012년 6월14일 대법원은 학림사건을 무죄라고 판결했다.

민주주의의 꽃, 선거개입

권력이 민심을 얻어 정당성을 확보한다면 민심의 통로인 선거는 공정해야 한다. 1992년 3월 법무부장관직을 막 내려놓은 김기춘은 같은 해 12월 있을 대선을 주제로 부산시장, 검사장, 안기부지부장 등과 부산 초원복국이란 식당에 모였다. “부산·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니 하면 영도다리에 칵 빠져죽자” 지역감정을 조장하자는 주장이다.

이를 당시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 측에서 전직 안기부 직원과 도청해 세상에 공개했다. 여당인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에게 불리한 듯 했지만 불법도청을 이슈화하며 김영삼 후보가 당선됐다. 검찰은 기관장들을 불기소 처분했고 김기춘만 ‘불구속’ 기소했다. 당시 담당검사는 김진태, 부장검사는 정홍원이었다. 이후 김기춘은 1996년 15대 총선부터 연달아 3선 의원(경남 거제)을 지냈다.

2012년 18대 대선을 앞두고 국정원·국군사이버사령부 등 국가기관이 여론을 조작했다. 채동욱 총장이 이끄는 검찰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기소했다. 김기춘이 비서실장으로 있던 청와대는 채동욱을 찍어내고 후임 검찰총장으로 초원복집 사건 담당검사였던 김진태를 임명했다. 초원복집 사건 부장검사였던 정홍원은 이미 국무총리를 하고 있었다.

한홍구 교수는 “그놈이 그놈”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2004년 3월12일 김기춘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을 헌법재판소에 접수한 김용균 한나라당 법사위 간사는 5공 출신으로 친일진상규명법안을 누더기로 만든 1등공신이다. 민복기의 후예 황우여는 박근혜 정부에서 교육부장관으로 임명돼 역사왜곡의 완결판인 국정교과서 도입을 마무리했다.

한국사회는 변했는가

대한민국의 부당한 역사는 반민족행위자 처벌이 무산되고, 오히려 친공 부역자 처벌을 명목으로 민간인이 학살당하던 해방공간에 뿌리박고 있다. 반역사로 물든 20세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역사청산’은 어느덧 낡은 주장으로 전락했다. 친일청산에 찬성하는 이들조차 친일의 잔여물을 걸러내지 못할 만큼 긴 시간이 흘렀다.

국민들은 역사를 잊은 걸까, 알지만 애써 외면하는 걸까? 현 대통령의 첫 국무회의 안건은 경찰력이 국민생활 곳곳을 간섭하도록 하는 ‘경범죄처벌법 시행령 개정안’이었다. 그래왔던 것처럼 제국과 독재 권력은 국민을 괴롭혀 ‘착한 사람’, ‘수동적인 백성’으로 만든다. 역사는 저절로 청산‘되지’ 않는다.

▲ 백범이 암살당하기 직전 화계사를 방문한 임시정부 일행. 앞줄 오른쪽 끝이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 그 왼쪽이 김구 선생이다. 이들은 백범의 서거와 이승만의 탄압, 납북 때문에 다들 흩어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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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정운현, 친일파의 한국현대사
한홍구, 대한민국사
한겨레TV, 반역사 1, 2부
한겨레TV, 법비사: 고장 난 저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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