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해고한 전 직장에서의 일을 잊고 싶어요’, ‘헤어진 애인의 기억을 지우고 싶습니다’ 
 
미국의 뉴욕 타임스퀘어 신년행사 중 하나인 '굿 리든스 데이(Good Riddance Day)'는 한 해 동안 겪었던 나쁜 기억을 깨끗이 잊어버리자는 취지로 시작됐다. 매년 이 행사에는 어린 아이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가 참가해 종이에 잊고 싶은 기억을 적어 분쇄기에 넣는다. 
 
누구나 잊고싶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디지털 세상이 되면서 잊고 싶은 과거를 삭제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정보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쉽게 확산·복제되고, 포털 서비스를 통해 검색·유출이 빨라지기 때문이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발표한 'Weekly 포커스' 자료에서 전 세계에서 온라인 정보의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잊혀질 권리'에 대한 법제화가 진행 중이라고 소개했다. 유럽연합(EU)의 '개인정보보호에 대한 이해' 결의안에 따르면 '잊혀질 권리'는 자신의 정보가 더 이상 적법한 목적 등을 위해 필요치 않을 때, 그것을 지우고 더 이상 처리되지 않도록 할 '개인의 권리'다. 
 
   
▲ 지난 3월 KBS 9시 뉴스 화면 갈무리
 
실제 무심코 올린 사진이나 댓글이 인터넷에 공개돼 지우지도 못하고 ‘온라인 주홍글씨’로 작성자를 평생 따라다니는 사례가 많다. 2011년 스페인 법원은 구글에게 9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검색 정보를 지우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들 중엔 가정폭력 피해자임에도 자신의 집주소가 검색이 된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었다. 
 
각국 정부도 잊혀지지 않는 디지털 정보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잊혀질 권리'의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프라이버시를 중요시 여기는 EU는 2012년 1월 ‘잊혀질 권리’의 명문화를 골자로 하는 정보보호규칙(Regulation)을 제안했고, 2014년까지 제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기초적인 수준이지만 잊혀질 권리에 대한 인식과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노근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 2월 인터넷서비스업체(네이버 등)에 자신이 게재한 게시물에 대한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러나 잊혀질 권리가 무조건 인정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잊혀질 권리가 표현·언론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에선 명예훼손이 형사법 상의 처벌 대상이 되며, 사실을 적시해도 명예훼손으로 처벌이 가능하기 때문에 잊혀질 권리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많다. 
 
예를 들어 정치인이나 유명인이 잊혀질 권리를 내세우며 비판적인 여론과 보도를 제재할 수도 있다. 지난해 '성추문' 등의 연관 검색어가 붙었던 정우택 새누리당 의원은 네이버에 관련 사건은 무혐의로 수사종결됐다며 관련 검색어의 삭제를 요청한 바 있다. 이 사건은 무혐의지만, 실제 범죄자가 잊혀질 권리를 악용할 수도 있다. 
 
   
▲ 지난해 7월 네이버 '정우택' 연관 검색어 중 '성추문', '성상납'이 삭제됐다.
 
만약 잊혀질 권리의 범위를 무제한적으로 확장한다면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 성낙환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글을 퍼나르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논평과 댓글을 달는 등 새로운 글을 작성할 자유가 있다"면서 "잊혀질 권리는 이러한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본인에 대해 제 삼자가 작성한 정보를 삭제하는 것은 언론의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성 연구원은 "공직자의 비리 보도나 일반 시민의 범죄 보도에 대해, 보도의 대상자가 잊혀질 권리와 보도 삭제를 주장한다면 언론의 자유는 크게 침해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EU도 이런 문제를 인식해 잊혀질 권리 법안에 표현의 자유에 위반되는 공공 목적의 정보나 역사적 사료의 경우 삭제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다. 또한 동일한 게시물의 재 게시에 대해서는 게시물 전체의 삭제가 아니라 링크 삭제만을 규정하고 있다. 
 
한편 수많은 디지털 정보를 축적하고, 검색을 제공하는 포털업체 입장에선 잊혀질 권리가 골치 아픈 문제가 될 수 있다. 삭제 요청되는 모든 게시물에 대해 일일이 판단하고 삭제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며, 법적 소송 대상이 되기도 쉽다. 또한 디지털 세상에서 물리적으로 완벽한 삭제는 가능하지도 않다. 
 
   
▲ 미국 10~20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SNS '스냅챕'
 
이런 가운데 디지털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은 이들을 위한 새로운 서비스도 각광을 받고 있다. 최근 미국에선 사진 공유용 SNS인 스냅챗(Snap Chat)이 인기를 끌고 있다. 스냅챗은 사진을 전송하는 사람이 보는 시간을 제한할 수 있다. 마치 영화 '미션 임파서블'처럼 일정시간 후 메시지가 자동 삭제되는 것이다. 
 
스냅챗이 돌풍을 일으키자 페이스북도 이와 비슷하게 전송 메시지의 시간을 설정할 수 있는 ‘포크(Poke)’ 메시징 서비스를 출시했다. 이밖에 스마트폰 메모에 삭제 타이머를 제공하는 번노트(Burn Note) 앱이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트위터 메시지를 삭제해주는 스피릿포트위터(Spirit for Twitter) 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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