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31일 미디어오늘에 게재된 김성구 한신대 교수(당인리대안정책발전소장)의 <이정희, 이석기 퇴출 여하가 진보정치 미래의 시금석>이라는 글에 대해 김갑수 작가(정치평론가)의 반론<무슨 근거로 통합진보당을 모해하는가>이 있었습니다. 이후 김 교수가 김 작가의 반론에 대해 재반론을 보내왔고, 또 다시 김 작가가 김 교수의 재반론에 대해 재재반론을 보내와 전문을 게재 합니다. 국민의 외면을 받고 있는 진보정치를 되살리기 위한 생산적인 논쟁으로 발전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관련기사] <통합진보당 비판이 왜곡과 모함이라니…>
[관련기사] <“무슨 근거로 통합진보당을 모해하는가”>
[관련기사] <이정희·이석기 퇴출 여하가 진보정치 미래의 시금석>

주지하듯이 우리 정치·사회 현실의 특수성은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두 가지 체제로 압축된다. 일제의 점령 그리고 점령국의 군인이 피점령국의 국가원수가 되고, 그 국가원수의 자식이 또 다시 국가원수의 자리에 오르게 된 오늘의 현실 등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국가 이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지 35년과 분단 65년, 세기를 넘어서는 질곡의 역사 그만큼 우리의 진보주의자들은 감당하기 버거운 격무를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식민지 시대의 진보가 독립항쟁과 수탈 민중의 삶을 함께 감당하려 한 것이나, 오늘의 진보가 분단체제와 자본주의체제를 동시에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고 있는 것이나 그것이 참으로 버겁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요컨대 우리의 진보는 저항과 창조라는 두 가지 과업을 함께 수행해야 하는 격무에 시달려왔다는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진보가 그러했듯이 분단체제의 진보도 파란과 곡절로 얼룩진 부침을 거듭해 왔다. 여기에는 ‘외압과 내분’이라는 두 가지 요인이 함께 작동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이 외압과 내분이라는 것은 동시적인 것이 아니라 ‘외압에 의한 내분’이라고 해야 한다. 즉 인과적으로 파악해야 옳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재적 외압을 배제한 채 내재적 내분만을 문제 삼는 진보 관련 논의는 십중팔구 선후관계를 오판하는 오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자신들에 대한 비판과 비난은 공안검찰 탓이고 조중동의 선동 탓으로 돌린다. 자신들의 과오는 끌어안고, 똑같은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공격한다. 진영논리 속에 갇혀 오류를 정정할 능력을 상실한 통합진보당의 이런 행태가 대중들의 눈에 어떻게 비치겠는가. 대중들도 이런 정치를 비판할 정도로 정치의식이 높아진 상태다. 더군다나 진보정당에서 기존 정치와 다를 바 없는 행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당에 대한 대중들의 불신과 분노가 거셀 수밖에 없다.” (김성구)

진보를 비판하는 유사진보들이 즐겨 쓰는 말이 ‘진영논리’다. 그러나 진영논리보다 열등한 것으로 ‘종파논리’라는 것이 있다. 식민지 시대의 그들이 무력항쟁보다 무실역행을 중시했듯이 오늘의 그들은 체제도전보다 내부성찰만을 중시한다. 여기서 필자가 감히 ‘유사진보’니 ‘종파논리’니 하는 거친 표현을 구사한 것은 대부분의 진보 비판이 기실은 진보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곧잘 내세우는 말이 ‘패권주의’다. 그러나 패권주의보다 더 열등한 것은 ‘탐욕과 불성실’이다.

   
▲ 김갑수 작가
©김갑수 작가 페이스북
 

우리가 알고 있듯이 대한민국 최초의 진보정당은 조봉암의 진보당이었다. 그런데 진보당에는 조봉암 외에도 서상일·장건상·윤길중·신도성 등 이념과 대북관이 조금씩 다른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는데 이것은 이른바 ‘진보정당의 대중화’를 추구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조봉암은 ‘평화통일’과 ‘피해대중구제’를 표방한 민족적 사회주의자였다. 여기서 피해대중이라 함은 4·3항쟁과 한국전쟁 등으로 인해 무고하게 피해를 입은 민중을 가리킨다.

조봉암은 1956년 5월 15일 제 3대 정·부통령 선거에 참여했다. 그는 예상을 깨고 놀라울 정도로 약진한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선거를 불과 열흘 앞두고 제1 야당인 민주당 후보 신익희가 급서하는 변수가 작용했다. 하지만 조봉암이 얻은 216만 표는 이승만과 우익 집단을 두렵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참고로 당시 신익희에 대한 추모 표는 185만의 무효표로 나타났고 이승만은 504만 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했다.

누가 보아도 조봉암 세력은 유력 정당으로 자리를 잡아야 마땅했다. 마침 8월 지방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조봉암은 여세를 몰아 통합진보정당을 결당하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상일 장건상 등의 동료 진보정치인들이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욱 광범위하게  민주혁신세력을 규합해야 한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봉암의 이념이 너무 강하다(북과 가깝다)고 비판한다. 그러다 난데없이 조봉암더러 2선으로 물러가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정작 서상일 등이 내세운 ‘혁신과 대중화’라는 것의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지방선거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진보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욕망과 관련된다.

당시 야당과 언론은 거의 조봉암 편을 들지 않았다. 야당 핵심세력이었던 김준연·조병옥 등은 드러내 놓고 조봉암을 견제했다. 이로부터 조봉암에 관한 악성 루머가 난무했고 언론은 이를 받아쓰는 데 급급했다. 조봉암 집단에는 여러 차례 무서운 테러가 자행되었다. 이후 조봉암이 간첩죄로 몰려 사형을 당한 비극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오래지 않은 2008년에도 진보의 수난이 있었다.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가 그것이다. 조봉암 사태는 ‘대선 직후 지방선거 직전’에 발생한 데 비해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는 ‘대선 직후 총선 직전’에 빚어진 점은 과연 우연의 소산일는지?

민주노동당은 2004년 총선에서 채택된 정당투표 비례제에 힘입어 10개 의석 획득의 성과를 올렸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진보세력이 갑자기 커진 것이다. 이로부터 3년 후인 2007년 대선 당내 경선에서 당권파는 권영길을, 비당권파는 심상정을 내세운다. 당시 비당권파가 내건 구호는 1956년의 그것처럼 ‘혁신과 대중화’였다. 하지만 비당권파의 심상정은 경선에서 당권파의 권영길에게 패했다.

문제는 대선 직후에 불거졌다. 권영길이 3.1%밖에 득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명히 그것은 5년 전 2002년 대선에서 얻은 3.89%보다 퇴보한 수치였다. 하지만 2007년 대선에 휘몰아친 보수 열풍과 진보를 표방한 문국현(5.8% 득표)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그것은 그리 심한 패배라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대선이 끝나자마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당권파에 대한 비당권파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여기에 홍세화·진중권·손호철 등의 진보 표방 지식인이 가세했으며, 여론 역시 그들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 주었다. 홍세화는 당권파를 ‘광신도 사교집단’이라고 증오했고, 진중권은 ‘기생충과 숙주’라는 저주적 표현을 퍼부으며 종북몰이에 앞장섰다.

그들의 요구대로 ‘심상정 비대위’가 결성되었다. 그들이 당권파에게 요구한 것은 세 가지였다. 첫째 북핵실험에 반대 표명할 것, 둘째 일심회 관련자를 제명할 것, 셋째 심상정 비대위에 차기 총선 지휘 권한(비례대표 후보 선발 포함)을 줄 것 등이었다. 당연히 앞의 조건 두 가지는 종북몰이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당원투표에서 일심회 관련자 제명안이 부결되었다. 국가보안법에 반대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진보정당의 강령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위반자를 제명하는 것은 당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일이 된다. 또한 일심회 제명안 부결은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 당원 투표 결과였다. 하지만 심상정 비대위는 투표 결과를 수용하지 않고 아이러니 하게도 당권파더러 비민주적인 패권집단이라고 비난하면서 당을 떠난다. 만약 이때 심상정 비대위에 차기 총선 지휘 권한, 다시 말해 비례대표후보 선발 권한을 다 주었다면 과연 그들이 당을 떠났겠는지 의구심을 갖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터이다.

2008년 분당이 ‘대선 직후 총선 직전’에 발생한 반면, 2012년 분당은 ‘총선 직후 대선 직전’에 발생한다. 이는 둘 다 선거와 관련된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2012년 총선이 다가오자 심상정과 노회찬은 그들이 만든 진보신당을 방기하고 통합진보당으로 회군한다. 또한 ‘유빠당’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혈혈단신 국민참여당에서 고투하고 있었던 유시민 역시 펀드 부채 8억과 함께 통합진보당에 합류했다.

역시 총선 결과가 좋았던 것이 문제였다. 한국 사회에서 진보세력이 다시 커진 것이다. 통합진보당은 13석의 의석을 얻어 사상 최다의석을 기록했다. 하지만 유시민·심상정·노회찬은 당권을 장악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당권이란 당원 수와 의석수와 당직자 수가 좌우한다. 유·심·노는 당원 숫자야 애초부터 기대하지도 않았겠지만 공동대표직을 가진 상태에서 의석수와 당직자 수가 많아진다면 당원 수까지 견인할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총선 결과 의석수에서 밀려 버렸다. 특히 유시민의 국민참여계는 지역구 하나만을 건졌을 뿐 비례대표에서 전멸했다. 더욱이 유시민과 밀착 관계였던 오옥만(구속)의 대규모 온라인 선거부정 범죄 사실이 세간에 막 알려지기 시작했다. 총선에서 소득이 없었던 것은 조준호의 민주노총계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후보를 차지하고 야권연대의 주역이 되어 대선에 가담하려 했던 유시민·심상정·조준호 등의 야심은 낭패할 위기에 직면했다. 그들에게는 총선 결과를 부정하지 않고는 이 모든 것들을 만회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조준호를 통해 ‘진상보고서’라는 부실하게 급조된 사제폭탄을 던진 것이었다.

   
▲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선후보는 지난해 12월 16일 국회 정론관에서 후보직을 사퇴했다.
©연합뉴스
 

5월 초 ‘비례대표 선거 총체적 부정 부실’이라는 폭탄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위력에 힘입어 그들은 경쟁부문 비례후보 전원사퇴와 당 대표단 총사퇴를 요구했다. 동시에 한편에서는 그 지긋지긋한 종북몰이가 또다시 전개되었다. 이번에도 역시 진보를 표방하는 지식인들과 언론은 일방적으로 그들의 편을 들어 주었다. 이에 고무된 그들은 전국운영위원회를 열어 당원들이 투표로 선출한 비례 국회의원 당선자들을 당 임원들이 사퇴시키려는 조급함을 보였다.

그들이 선배들처럼 당의 ‘혁신과 대중화’를 내세운 점도 특기할 만하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목표로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역시 목전에 닥친 대통령 선거가 문제 아니었을까? 만약 자기편에서 대선후보를 거머쥔다면 가장 일사불란하게 당권과 자금을 장악하게 된다. 특히 유시민의 국민참여계는 안고 들어온 부채 8억도 자연스레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권파에는 이정희가 있었다. 그들이 당권파에게 백의종군을 요구한 것은 이정희의 대선 출마를 사전 봉쇄하려는 포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루아침에 부정·종북 집단으로 내몰린 당권파, 회의장에서 내지른 그들의 고함, 완력과 밀어붙이기, 그들 중 하나가 저지른 ‘머리끄덩이’ 사건 등은 걷잡을 수 없이 세상 여론으로 비화했다. 어쩔 수 없이 이정희는 대표직을 던지고 ‘침묵의 형벌’이라는 비극적 레토릭에 계속 은신해야 했다. 대한민국 사회가 일괄적 합의라고 한 듯이 통합진보당의 당권파만을 몰아붙였다. 급기야 당권파를 두둔하던 박영재 당원이 억울함을 호소하며 스스로 자기 몸에 불을 댕겨 분신하는 비극까지 발생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비당권파는 이석기·김재연 제명을 위한 의원총회를 강행한다. 결과는 부결, 하지만 그들은 민주적 절차를 따른 의원총회 투표 결과까지 무시하면서 당권파를 비민주적 패권집단이라고 공격하는 모순을 보인다. 더욱이 유시민의 7번째 당적 이적, 심상정·노회찬의 시계추 왕복 탈당, 김제남·박원석·정진후·서기호의 셀프제명 등은 세계 어느 정당사에서도 이제껏 듣도 보도 못한 일이다.

이상이 2012년 통합진보당 사태의 전말이다. 역사는 무수히 반복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저간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제3자 즉 다수 국민의 눈에는 어떻게 비쳤을까? 김성구 교수의 관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거듭 말하거니와 통합진보당은 당할 만큼 당했고 책임질 만큼 책임진 것으로 인정해줘야 한다. 따라서 사려 깊은 진보라면 이제 편견과 곡해로 인한 비난을 잠시 거두고 통합진보당이 건강한 진보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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