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훈 서울시장은 결연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일부에서 기대했던 것만큼의 ‘결단’은 없었다. “어젯밤에 거의 잠을 못 잤다”는 오 시장은 천천히 준비된 기자회견문을 읽어 내려갔다. 시청 브리핑룸은 차분한 분위기였다.

24일로 예정된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앞두고 12일 오전 서울시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오 시장은 2012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관심을 모았던 시장직 거취와 관련해 오 시장은 “투표 전에 다시 한 번 입장을 밝힐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해 ‘여운’을 남겼다.

이날 10시로 예정됐던 기자회견장에는 백 명을 훌쩍 넘는 취재진이 몰렸다. 주요 방송사와 케이블티비, 인터넷 언론 등에서 온 카메라와 수십 명의 사진기자들은 기자회견 시작 30분 전부터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50여석 규모의 좌석은 이미 찼고, 통로에는 간이 의자까지 동원됐다. 단상 주변에도 사진기자를 비롯한 취재진들이 모여들었다.

몇몇 기자들은 관련 기사를 꼼꼼히 체크하면서, 또 몇몇 기자들은 미리 골격을 짜놓은 기사를 손질하며 초조하게 기자회견을 기다렸다. 기자회견 시작 10분 전, 기자회견문이 배포됐다. “2012년 대선에 불출마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혀있었다. 기자들의 손놀림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 오세훈 서울시장이 12일 오전 서울시청 서소문 청사에서 열린 무상급식 주민투표 관련 기자회견에서 준비된 기자회견문을 읽어 내려가고 있다.  
 @CBS노컷뉴스
 

관심이 모아졌던 시장직과 거취 문제가 빠져있자, 일부 기자들은 ‘김샌 표정’을 짓기도 했다. 관련 내용을 전화로 보고하던 한 기자는 ‘시장직과 관련된 내용은 없느냐’는 질문을 여러 차례 받고 있는 듯 했다. 일부 신문은 이날 아침 ‘오 시장이 주민투표 패배시 시장직을 걸겠다고 공식 발표할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10시 1분, 오세훈 시장이 브리핑룸에 모습을 드러내자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오 시장은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준비된 기자회견문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기자회견문을 읽어 내려가던 오 시장이 틈틈이 고개를 들 때마다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아직도 퍼주기식 복지를 주장하는 정치세력이 있습니다”라는 대목이나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입니다”라는 등의 대목에선 오 시장의 목소리에 한결 더 힘이 실렸다.

   
▲ 동아일보 8월 12일자 1면.
 

이어진 질의응답에서는 예상대로 시장직과 관련된 질문이 쏟아졌다. 오 시장은 “참 깊은 고민을 했다”면서 답변을 이어갔다. 오 시장은 “작년 지방선거에서 저를 선택해주신 서울 시민 유권자 여러분들의 엄중한 뜻”이 거취와 관련된 결정을 내리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역시 방점은 “중앙당과의 사전 협의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라는 데에 찍혀 있었다. 경향신문은 12일 “주민투표 지원을 놓고 내부 이견을 보이는 당에 대한 압박 성격도 있다”고 오늘 기자회견을 분석한 바 있다.

오 시장은 “시장직을 주민투표와 연계하는 문제는 한나라당과 깊은 논의를 선행시켜야 한다”며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이 있으면 설득이 필요한 상황이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한 기자가 투표에서 ‘패배’하더라도 시장직을 유지할 것이냐고 재차 질문을 던졌지만, 오 시장은 “주민투표 전까지 아직 열흘 넘는 기간이 남았다”며 즉답을 피했다. 더 이상의 질문은 이어지지 않았고, 25분 만에 기자회견은 ‘싱겁게’ 끝났다.

   
▲ 경향신문 8월 12일자 6면.
 

나쁜투표거부시민운동본부(운동본부)는 즉각 성명을 내어 “오 시장의 기자회견을 보면서 허탈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운동본부 측은 “이번 무상급식 주민투표와 오 시장의 대선 출마여부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되물으며 “오 시장이 대선 불출마라는 정치적 조건을 내걸음으로써, 또다시 투표에 개입하려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주노동당 서울시당도 “(오 시장이) 대선 불출마 선언 기자회견까지 진행하면서 주민투표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며 “오세훈 시장은 서울시장직 사퇴 카드를 주민투표 운동 막바지에 주민투표율을 올리기 위한 두 번째 정치쑈로 활용할 생각”이라며 오 시장을 비판했다.

오 시장은 어제 “시장직을 건다면 투표율이 5% 정도 높아질 수 있다는 예측이 있어 유혹을 느낀다”고 말했다. 결국 오늘 오 시장이 운을 띄운 것처럼, 오 시장의 거취는 주민투표 직전에 한차례 더 열릴 기자회견에서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주민투표 성사 요건인 투표율 33.3% 달성이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오 시장은 어떤 경우라도 주민투표비용으로 소요되는 182억 원의 세금과 아이들의 ‘밥그릇’을 정치게임의 도구로 활용하려 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대선 불출마를 선언한 마당에 오 시장이 이번 주민투표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는 없게 됐기 때문이다.

‘박근혜’라는 한나라당의 유력 대권주자가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오 시장의 ‘대선 불출마’ 카드는 큰 반향을 일으키기 어려워 보였다. 옳고 그름을 떠나 '시장직을 걸겠다'는 '결단'도 없었다. 재미도, 반전도, 감동도 찾기 어려웠던 기자회견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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