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렷한 원인도 모른 채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 알려진 사망자도 매해 증가 추세다. 지난 2008년 3월 시작된 추모제에는 영정 사진이 하나였지만, 올해에는 46명까지 이르렀다. 시민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하 반올림)에 현재까지 접수된 제보자만 120명이다. 대다수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한 이후 백혈병·림프종 등 조혈계 암을 얻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삼성, 정부 어디도 속 시원한 진상규명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열악한 작업 환경 실태를 증언하고 있지만, 삼성은 ‘클린룸’, ‘개인적 질병’이라는 정반대 해명을 내놓고 있다. 피해자들은 유독 물질에 노출됐다며 제대로 된 역학조사를 촉구하고 있지만, 근로복지 공단은 기존 역학조사를 근거로 산업재해보상보험 유족급여 신청에 모두 불승인 결정을 해왔다. 양측의 입장이 엇갈리고 의혹은 증폭되고 있지만, 의문을 해소하려는 언론은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도 이들 사망자를 기리는 추모제 등이 3월 들어 잇달아 열렸다.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을 둘러싼 풀리지 않는 의혹과 현실을 점검해 봤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회원과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한 이후 백혈병 등으로 숨진 노동자들의 유가족들이 지난 6일 서울역 광장에서 추모문화제를 열었다. 이 문화제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지난 2007년 3월6일 숨진 황유미(23)씨의 추모로 시작돼 현재 46명 추모까지 이르고 있다. 최훈길 기자
 
백혈병·암·유산…잇따른 죽음들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했던 노동자들은 열악한 작업 환경으로 인해 희귀질환을 얻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지난 2007년 3월 숨진 고 황유미(23)씨의 아버지 황상기씨는 △백혈병을 앓은 가족력이 없었고, △황씨가 화학물질을 다루는 세척작업을 맡았으며, △같은 공장 반도체 라인에서 근무한 직원도 백혈병으로 사망했거나 유산을 한 상황 등을 근거로 산재 신청을 했다. 지난 해 3월 백혈병으로 숨진 박지연(24)씨도 생전에 산재 신청 당시 “제품을 납에 담글 때 하얀 연기가 흡입됐고, 화약약품이 손에 묻는 일이 다반사였다”며 “유산을 경험한 동료도 있었고, 병이 나기 몇 달 전 생리불순은 물론 하혈을 하기도 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동안 삼성반도체 기흥·온양 공장, 삼성전자, 삼성전기 등에서 근무한 직원들은 반올림과 삼성백혈병충남대책위에 급성 백혈병, 악성림프종, 직장암, 유산, 불임, 생리불순, 빈혈, 탈모, 뇌종양 등을 제보해 왔다. 그러나 삼성전자 관계자는 통화에서 “열악한 작업 환경에 있지 않고, 질환과 업무의 연관성도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역학조사 결과에도 제기되는 의혹들

양측의 주장이 엇갈리는 가운데, 그동안 세 차례 역학조사에서 해당 질병의 업무 연관성은 인정받지 못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총 17건의 산재 신청 중 16건이 불승인됐고, 현재까지 산재 승인을 받은 것은 한 건도 없는 상황이다.

지난 2007년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사망자 개개인에 대한 조사를 처음으로 진행했지만, 판단을 보류했다. 이듬해 산업안전보건공단은 자체적으로 삼성과 하이닉스를 포함한 국내 반도체 산업 종사자 20만 명의 림프 조혈계 암 발병 위험에 대한 ‘건강 실태 역학조사’를 벌인 결과, “업무 연관성이 무관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 2009년 삼성전자 반도체 등 국내 반도체 3사가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에 의뢰한 ‘작업환경 역학조사’에선 발암물질인 벤젠이 검출됐다. 이에 대해 당시 시민단체와 유가족들은 △피해자측 전문가 참여 △2007년 이전 작업 환경에 대한 실태 조사 등을 촉구하며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했지만, 삼성측은 유해 물질이 관리 기준을 넘지 않았고 공기 중에 노출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여전히 의혹은 남아 있는 상황이다. 지난 1월 26일 KBS <추적 60분>에 처음으로 공개된 삼성의 ‘노동평가 부문 자문 보고서’에는 2009년 10월 외부업체가 납품하는 화학 물질 중 삼성도 모르는 10종의 물질이 존재하고 있었다. 또 지난 2007년에 발행된 삼성의 내부 발간물에는 유해한 독성 화합물에 대한 별도의 감시 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은 사실이 적시돼 있었다.

그러나 삼성측은 현재는 그같은 상황이 개선됐으며, 충분한 안전보건 장치를 마련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삼성 백혈병, 빙산의 일각?

더욱이 반도체 공장의 유해 물질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는 상황에서, 제도적 ‘한계’는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이 겪는 현실의 ‘벽’이 되고 있다. 삼성반도체에 근무했던 근로자들이 산재를 인정받자면 △근로자의 유해 요인 노출 경력 △업무 시간, 환경을 고려한 질병 유발 △의학적 인정 등에서 ‘상당한 인과 관계’를 인정받아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산재 조건을 퇴사한 노동자들이 뒤늦게 입증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반올림’을 적극 돕고 있는 이종란 노무사는 “삼성이 백혈병을 유발하는 유해 물질이 없다고 하는 상황에서, 노동자들 스스로 까다로운 법 요건을 입증해야 하는데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라고 되물었다. 시민단체들은 지난해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해 관련 법 개정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메아리가 없는 상태다.

사실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고 여러 질병을 앓아도 이것이 반도체 공장에서 일한 것 때문인지 당사자가 인지하기도 쉽지 않은 형편이다. 이 때문에 반도체 공장에서 얻은 질병인데도 이를 모르고 있을 잠재적 피해자 수도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왜 삼성 만인가?

또 하나의 쟁점은 삼성반도체에서 수차례‘직업병’이 발생했다면, 하이닉스 등 다른 반도체업체에서는 왜 그런 사례가 발생하지 않았느냐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른 반도체업체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삼성처럼 문제가 되고 있지 않을 뿐이라는 지적도 있다. 

이종란 노무사는 “삼성쪽 제보자들이 많은 것은 삼성의 근무 환경에도 영향이 있겠지만, 그동안 ‘삼성 백혈병’으로만 많이 알려져 타사 피해자들의 제보가 적었을 수도 있다”며 “지금까지 제보는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도체산업은 해외에서도 ‘위험 환경군’으로 꼽힌다. 지난 2003년 미국 노동통계국(BLS) 조사에서 1만 명 기준으로 화학물질 중독 사고가 전체 노동자는 0.3명이었던 반면, 반도체 산업 노동자는 6명으로 조사됐다.

7월 삼성 재조사 결과는…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산재 문제가 논란이 되자 삼성 측도 작업환경에 대한 재조사에 들어갔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미국의 컨설팅 회사)인바이런에서 재조사를 하게 돼 7월쯤 정리돼 발표될 예정”이라며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조사를 하니까 숨기는 것도 있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공신력. 삼성측은 ‘공신력 있는 외국 조사기관’에서 조사를 하는 만큼 신뢰할만 한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조사기관의 선정과 조사 방식 등에 대해 피해자 측과 사전 논의가 없었던 데다가 조사 과정 등에 대한 정보도 공개되지 않아 이 역시 삼성측의 ‘일방적인 조사’라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 조사 결과가 논란에 종지부를 찍기 어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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