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처음으로 나비를 본 날, 이렇게 수첩에 쓰고는 날짜에다 별표를 그렸다. 나비는 바람결처럼 나풀나풀 날아 아파트의 빈약한 화단에 피어 있는 작은 꽃 위에 앉았다. 두 날개를 접었다 폈다 한참을 그러더니 다시 살포시 날았다.

나비가 날개를 팔락일 때 작고 노란 바람이 나비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는 것 같았다. 저 외로운 날갯짓에 내 마음이 친구하려다 말고 그만 두었다. 올해 처음으로 이 세상에 온 저 나비를 내년에는 볼 수 있을까, 고마워하는 가벼운 내 마음을 살짝 올려도 저 여린 날개를 가진 나비에게는 무거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비는 현을 타듯이 자기 육체의 전부를 호흡하며 날아갔다.

온 몸 전체를 호흡하며 살아가는 올해 처음인 저 나비, 올해 처음 황금빛 수염을 흔드는 보리, 올해 처음 향기를 뿜어 낸 넝쿨 장미꽃, 올해 처음 푸릇한 잎을 밀어 올리는 갈대, 올해 처음 홀씨를 바람에 날려 보낸 민들레, 올해 처음 꼬리를 자르고 놀라 달아난 도마뱀, 올해 처음 꿀을 모으기 위해 꽃 속을 들락거리는 벌.... 올해 처음인 것과 처음 아닌 것의 세계가 여러 겹 같이 어울려 올해 처음을 이어가지만, 그래서 우리 삶의 하루가 처음 아닌 것이 없지만, 그러나 올해 처음보고 내년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 낙동강 칠곡보 공사 현장. 지율스님이 4대강 사업으로 무너져가는 낙동강의 모습을 기록한 사진이다.  
 
아버지는 논에 모가 자라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셨다. 바람이 불어서 나뭇잎이 흔들려도 나무가 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셨고, 논두렁 풀을 베면서도 풀이 자라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셨다. 삽날을 씻으면서도 삽날 위로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셨고, 봄나무에 잎이 돋는 소리, 꽃망울 터뜨리는 소리, 여름 밤 냇가에서 등을 씻을 때 새끼 물고기가 물 위를 뛰어오르는 소리도 들린다고 하셨다. 어린 우리들이 크는 소리도 들린다고 하셨다. 에이, 그런 소리가 어떻게 들려요? 우린 모두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신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논에 갈 때마다 혹시 모가 자라는 소리가 들리는지 논두렁에 엎드려 모 가까이에 귀를 갖다 대곤 가만히 있었다. 뭔가 뽀고록,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아닌 듯도 했지만 그게 모가 자라는 소리일거라고 생각하곤 아버지만 듣는 그 신비한 소리를 나도 들은 것 같아 가슴이 뿌듯하기도 했다. 그 소리들이 살리는 일, 살게 하는 소리라고 하셨다.

동네 어른들이 모여 냇가를 치는 날이 있었다. 여름 장마가 오기 전이었는데, 그날은 누군가를 마중 나가는 날 처럼 설레고 재미있는 날이었다. 어른들이 도랑 바닥에 가라앉은 낙엽을 건져내고 나뭇가지를 건져내고 누군가의 잃어버린 신발 한 짝도 건져내고 죽은 개구리 뱀 허물을 건져내고 나면 흙탕물이던 물은 금새 졸졸 소리와 함께 맑아지던 시절의 작은 소리들, 막 새 물로 바뀌던 그 물을 두 손으로 떠서 후룩, 마시고 그 물에 세수를 하던 아버지는 이 작은 물이 흘러서 저기 저 먼 강으로 흘러가서 넓은 바다를 만난다고 하셨다. 냇가를 치는 일도 나무가 크는 소리를 듣는 것도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 살게 하는 일이라고 하셨다. 산골에서 바다를 꿈꾸게 하셨던 그 힘은 물소리였고, 아버지가 두 손으로 떠 주시던 그 물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큰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시절의 그 물소리를 잘 듣기 위해서 나는 자주 눈을 감는다. 지그시 눈을 감고 내 몸 구석구석 쌓였다가 풀려 나오는 오래된 그 물소리를 듣는다.

물은 흐른다. 장애물이 있으면 돌아서 흐른다.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우리가 물처럼 살 수는 없지만, 물이 사람을 살리고 식물을 살리고 동물을 살게 하고, 살리는 일을 하는 것처럼 우리는 물을 살리고 살게 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올해 처음으로 모래무지에 알을 낳는 물고기가 모래 다 파헤쳐진 내년엔 어디에 알을 낳을 것인지, 올해 처음으로 갈대의 뿌리 쪽에 살림을 꾸리는 물고기가 갈대 다 뽑혀져 나간 내년엔 그 어디에 살림을 꾸릴 것인지, 물과 함께 느릿느릿하게 가난하게 쓸쓸하게 평범하게 지루하게 그러나 오붓하게 따뜻하게 느긋하게 잘 살아온 희귀한 생물들이 올해 처음 보고는 내년에 볼 수 없다면, 오늘 당신과 즐겁고 행복하게 웃었는데 내년에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오열할 것인가. 살리는 일을 하겠다고 목숨을 끊는 비극적 상실이 일어나고 있는 지금,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해가 지면 갈대숲이 황금색으로 변하고 강물도 잔잔하게 황금물결로 변하고 갈대숲으로 날아 들어가는 새도 한 점의 아름다운 황금새가 되던 시절의 강이 그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었음을, 갈대숲에서 황금빛으로 재잘거리던 새소리를 재우며 잔잔한 잔물결 위로 한없이 떨면서 퍼져나가는 달빛이 그 밤 어둠 속으로 들고 나면 물소리만 크게 들리던 시절의 이야기를 흐르지 못하고 썩어 있는 낙동강, 아니 낙똥강의 이야기를 내 아이들에게 또 하지는 말아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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