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세월호 보도를 통제하려 한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과 당시 보도 책임자였던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의 통화 녹취가 공개된 후, 정작 KBS에서 녹취록이 한 차례도 보도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보도국 내 반발이 쏟아지고 있다. 

KBS 보도본부 27기 기자 18명은 5일 오후 성명을 내어 “이정현 전 수석의 겁박을 실제로 접했을 때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며 “일개 임명직 공무원이 KBS 보도국장에게 마음대로 전화한 뒤 답변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욕설까지 섞어가며 목에 핏대를 세우고, 그러면서 ‘대통령도 봤다’며 간교한 협박을 서슴지 않는 상황이 KBS 위상을 보여준다”고 비판했다.

▲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왼쪽)과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 (사진=미디어오늘, 연합뉴스)
이들은 “정작 KBS는 아무 말도 없다”며 “우리 얼굴에 튄 더러운 침을 닦아내는 시늉조차도 하지 않고 있다. 법적 대응은 고사하고 작성된 단신 기사도 무시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KBS 수뇌부들에게 묻고 싶다. 지금도 그들의 통상적인 전화를 받느냐”며 “그것이 아니라면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한다. 회사는 법적 대응을 해야 하고 보도국은 뉴스로 ‘국민들에게 죄송하다’고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27기 기자들은 또 “불과 2년 전 청와대의 꼭두각시 길환영 전 사장을 몰아낼 때 당신(보도국 간부들)들의 결기가 거짓이 아니었다면 침묵을 멈춰야 한다”며 “후배 가슴에 깊이 새겨진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해주고 싶다면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간부들의 행동을 촉구했다.

지난달 30일 전국언론노동조합 등 언론시민단체가 ‘이정현 녹취록’을 공개한 뒤, KBS는 닷새째 관련 뉴스를 보도하고 있지 않다. 대신 경찰서장의 개인 정보 등을 요구했던 박주민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갑질 논란’ 리포트를 제작해 내보냈다. 

이 보도에서 박 의원을 비난하는 국회 관계자가 새누리당 소속 보좌관이라는 사실이 언론노조 KBS본부를 통해 알려지면서 안팎의 논란이 컸다.

이와 관련해 KBS 국·부장 간부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KBS기자협회정상화모임’(정상모)은 성명을 통해 KBS기자협회에 ‘기자 뒷조사’ 의혹 사건을 조사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한 KBS 기자는 “27기 기자들의 성명은 이번 사태의 본질이 ‘이정현 녹취록’에 있음을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언론노조 KBS본부는 지난 4일 새누리당 소속 보좌관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에 대해 “방송 관련 사내망에 올려진 공개 자료를 통해 확인한 것”이라며 “여당임을 밝혔을 뿐 취재원 개인 정보를 공개한 적은 없다”고 반박했다.

아래는 KBS 보도본부 27기 기자들 성명 전문. 

▲ 뉴스타파, JTBC, KBS 영상카메라와 취재진(왼쪽부터)이 지난달 30일 오후 전국언론노조 회의실에서 열린 '김시곤-이정현' 통화 녹취 폭로 기자회견을 취재하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청와대 ‘보도 개입’ 언제까지 침묵할 것인가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 딱 그 느낌.

이정현 전 수석의 겁박을 실제로 접했을 때.
그리고 그 화살이 우리의 존재 이유인
KBS 뉴스를 향하고 있음을 새삼 실감했을 때.

KBS 위상이 딱 그 정도인가보다.

일개 임명직 공무원이 KBS 보도국장에게 마음대로 전화를 걸 수 있고,
답변할 틈도 주지 않고 욕설까지 섞어가며 목에 핏대를 세울 수 있는,
그러면서 대통령도 봤다며 간교한 협박을 서슴지 않는...

그런데 정작 KBS는 아무 말이 없다.
우리 얼굴에 튄 그 더러운 침을 닦아내는 시늉조차도 않고 있다.
법적 대응은 고사하고, 그나마 작성한 단신 기사도 무시됐다.

예상은 했다.

예상이 적중하니 또 한 번 피가 거꾸로 솟는다.

침묵의 이유는 뭘까.
온갖 상상력을 다 동원해 봐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아니, 딱 하나 있다.

“홍보수석으로 할 일을 한 것”이라는 치졸한 변명에 동조하고 있다는 것.
KBS 수뇌부에게 묻고 싶다. 정말인가?
혹, 지금도 ‘통상적인’ 전화를 받고 있는가?
아니라면, 정말 아니라면
당장 행동에 나서라.
회사는 법적 대응으로, 보도국은 뉴스로...
우리 정말 화났다고, 잘못 건드렸다고...
그리고 국민들께 죄송하다고...

이젠 어슴푸레한 기억 속 옛일이 돼버렸나 보다.

불과 2년 전 청와대의 꼭두각시 길환영을 몰아낼 때 당신들의 결기가 거짓이 아니었다면,
후배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진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유해주고 싶다면,
당장 침묵을 멈추고 행동에 나서라.

보도본부 27기 기자

김석 김기현 최대수 정수영 김정환 이진성 정영훈 이랑 김학재 이정화
이진석 정홍규 이병도 정지주 홍수진 정윤섭 김귀수 박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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