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은 언제나 지루한 팩트들로 채워진다. ‘차라리 투쟁이 행복했다’는 주제로 수렴되는 이 특정 형태의 서사는 그래서 지엽·단편에 집착하는 쇄말주의를 숙명처럼 동반한다. 왕자와 공주는 결혼했지만, 이야기는 결코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간단하게 끝나지 않는다. 어쨌거나 사랑의 결사체인 이들의 이후 소동은 이러자고 사랑했나 싶은 지리멸렬한 일상과 마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의 지체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동화가 생략하고 있는 어른들의 세계이자 후일담의 무섭도록 지루한 팩트들이다.

언론계의 많은 동료들에게 ‘한국일보 사태, 그 이후’를 이야기하는 것은 의무감이자 일종의 예의다. 연대라는 이름으로 받았던 그 따스하고 속 깊은 우정과 동지애가 없었더라면 우리에겐 후일담을 쓸 기회조차 없었을지 모른다. 어떤 기업에서건 사주와의 싸움은, 일단은, 무모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모한 싸움에 나선 한국일보 기자들은 편을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언론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그것은 단지 한국일보가 쌓아온 중도신문으로서의 유구한 역사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모멸감이었다. 너희 기자들 따위 없어도 얼마든지 신문을 만들 수 있다고, 내 말을 듣지 않는 놈은 내쫓아버리겠다고, 한국일보 사주는 용역을 불러들여 편집국을 폐쇄했다. 그것은 당하는 사람뿐 아니라 보는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심리적 충격과 내상을 안긴 한국 언론사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래서 한국일보 사태로 상처 받은 사람들은 비단 한국일보 기자들만이 아니었다. 장재구 전 한국일보 회장이 모욕한 것은 한국 언론 전체였다.

6·15 편집국 폐쇄 이후 두어 달 동안 한국일보 기자들 사이에는 혁명적 낭만주의라 불러도 좋을 뜨거운 물결 같은 것이 넘실거렸다. 때로는 감당하기 벅찰 정도의 엄청난 에너지였다. 기사라는 상품을 제조해내는 일용직 직장인이라는 자조는 농담으로도 허용되지 않을 분위기였다. 나는 기자다, 라는 충일한 자의식이 종교적 계시처럼 이 집단의 구성원들을 사로잡았다. 두 달 간 그 자의식을 벼리고 또 벼리며, 도둑처럼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첫 정상발행 지면을 준비해왔다. 

부담감이 없지 않았다. 달라진 한국일보, 이 사회가 발벗고 나서서 지켜줄 만한 가치가 있었음이 여실히 입증되는 근사한 한국일보를 선보이고 싶었다. 그것은 두려움과 설렘, 희망과 절망의 뿌리였다. 아이디어가 범람했다. 사기도 충천했다. 심지어 취재마저 용이했다. 한국일보 정상화 지면에 실릴 거라고 말하면, 아무리 깐깐한 취재원이라도 흔쾌히 “예스”를 외쳤다. 오피니언 필진 섭외도 수월해 평소 흠모해왔던 필자도 여러 분 지면에 모셔올 수 있었다. ‘오늘만 같아라’ 소리가 절로 나오는 흥겨운 현장. 우리가 가늠했던 정상화의 디데이가 하루씩, 한 주일씩 미뤄지면서, 자연스럽게 유효기간이 만료돼버린 아까운 기사들도 많았지만, 그까짓 것 아무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이제 신문을 다시 만든 지 일주일 남짓 지났다. 고작 일주일밖에 안 지났다는 게 믿겨지지 않는다고 다들 입을 모으는 것 보면, 밀도가 매우 높았던 시간이었음이 분명하다. 그 시간의 밀도를 분석하자면, 오랜만의 업무 복귀가 유발한 노동의 피로가 가장 높은 함량을 나타낼 테지만, 우리의 불안정한 기반이 수시로 우리를 동요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장재구 회장의 ‘복수혈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지, 서울경제 매각을 통한 한국일보 기업회생절차 저지 시도 같은 소식이 우리를 경악케 했다. 기업회생절차 개시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도 진 빠지는 일이다. 사고의 단위가 하루로 끊어지는 발 빠른 일간지 기자들이 법원이라는 지나치게 신중한 새 의사결정권자와 보폭을 맞추는 것도 어지간히 땀을 빼는 고된 작업이다.

   
박선영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
 
혁명 뒤에는 언제나 환멸이 온다. 환멸의 사유는 다양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패배는 언제나 작은 싸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어려운 진짜 싸움은 바로 이제부터다. 승부는 언제나 오늘의 마감에서 결정되며, 신문에 대한 평가는 하루하루의 평판이 쌓여 서서히 구축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싸움엔 극적인 서사구조도 없다. 그것이 때때로 찾아오는 성급한 실망의 원인이다. 

하지만 이 신문, 참 대단하다. 우리를 잠식하려 호시탐탐 노리는 환멸의 기미에 ‘에라 모르겠다’ 나 자신을 저당 잡히고 싶을 때, 고개를 돌려보면 도처에 저 우직한 ‘신문지상주의자’들이 있다. 서로가 가장 무서우면서 가장 다정한 독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하루하루의 작은 승부에서 치열한 싸움을 펼치고 있는 또 다른 영웅들이다. 누군가 흔들리고 있을 때, 살며시 웃으며 다가와 깍지 끼는 뜨거운 손. 사람 때문에 떠날 수 없고, 사람 때문에 버릴 수 없는 참으로 징그러운 조직.

요즘 독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반응은 “한국일보 살아있네”다. 살아있고자 우리는 얼마나 열망하였던가. ‘사태’로 이름지을 수 있는 그 사건은 일단락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일보의 진짜 싸움, 환멸과의 경쾌한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한국일보의 후일담은 그래서 또 다시 해피엔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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