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런 줄 몰랐느냐.” 진보정당 출입기자들이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부정선거’ 사태를 보면서 서로를 향해 내뱉는 자조 섞인 반응이다. 이번 사태는 보수언론에 조롱당하는 진보정치의 맨얼굴을 드러냈다. 언론이 쏟아내는 확인·미확인 보도들은 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지만, 진보정당 출입기자들은 놀라움보다는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다. 책임의식을 느끼는 이들도 있다. 진보정치의 ‘곪은 살’이 썩어 악취를 풍길 때까지 진보언론은 ‘외과의사’ 역할은커녕 쉬쉬해온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 주

진보정당 내부의 패권주의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과정부터 각종 공직선거와 내부선거, 당 운영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논란을 일으켰던 사안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이슈화되지 못했다.

진보정당 당내 문제는 여론의 관심을 모을 ‘핫 이슈’가 아닌 측면도 있었고, 출입기자들이 적극적으로 파헤치고 드러내지 않은 측면도 있다. 그러는 동안 문제는 눈덩이처럼 커지고 말았다. 통합진보당 내부에서 드러난 ‘부정선거’ 의혹은 일반인에게 충격을 넘어 경악 그 자체의 모습이다.
 

‘진보 아이콘’으로 평가받던 이정희 대표가 특정 정파의 대변자 모습으로 비치는 모습부터, 조준호 당 공동대표까지 포함된 진상조사단이 ‘총체적 부정·부실 선거’라고 발표했는데 당내 주류세력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까지 일반인의 정치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장면의 연속이다.

진보정당 전문 기자였던 한 신문사 기자는 “노동계나 범진보계 쪽에서도 패권주의 등 진보정당 문제를 건드리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바라보면서 극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다. 진보언론 역시 방치한 측면이 있다”면서 “진보정당의 문제점을 개선하는 계기로 삼는다면 이번 사건은 좋은 약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결국 이번 사태를 대충 덮느냐, 재도약의 계기로 삼느냐에 따라 진보정치의 운명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보수언론은 진보정치 전체를 비이성적인 세력, 북한 추종세력으로 몰아세우려는 ‘프레임 전파’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진보정치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철저히, 처절히 반성하며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보수언론 프레임은 여론을 파고들 가능성이 있다.

민주노동당 초대 대표이자 ‘진보정치’의 상징적인 인물인 권영길 전 대표는 “통합진보당이 지금 걸어야 할 길은 딱 하나이다. ‘죽는 길이 사는 길이고 살려고 하는 길이 죽는 길’이다. 죽어야 산다”고 조언했지만, 당권파는 당 공식기구의 ‘사퇴 권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보진영의 주요 인사가 입을 모아 걱정과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심지어 당권파의 지원으로 민주노동당 대표까지 지냈던 강기갑 의원은 “세상을 바꾸려 진보를 지키기 위해 몸부림쳐 왔던 당원들, 진보를 옹호하며 지지해 주신 국민들 앞에 무너져 내리는 진보를 바라보면 억장이 무너지고 통곡하고 싶다”면서 당권파의 안이한 대처를 개탄했다.

진보언론은 연일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한겨레는 5월 3일자 <당권파 패권적인 당운영 진보정당 민주주의 질식>, 5월 4일자 <통합진보당 ‘유령당원 투표’ 드러났다>, 5월 7일자 <“선거부정 아니라니 소름”…낡은 정파질서 깨야> 등 통합진보당 사태와 관련한 이슈를 연일 1면 머리기사로 전했다.

경향신문 역시 5월 4일자 <당권파 “당권 줄게 지분 보장하라” 거래>, 5월 5일자 <“경선조사 못 믿겠다” 이정희·당권파 반발>이라는 기사를 1면에 내보냈다.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미디어오늘 등 진보성향의 인터넷언론 역시 최근 통합진보당 사태와 관련해 비판적인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보수언론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색깔론 보도’보다 진보언론의 비판이 진보정당에는 더 아프게 다가올 수 있다. 문제는 진보언론의 그러한 모습은 ‘뒷북 비판’의 측면도 없지 않다는 점이다. 진보정당 내부의 문제가 불거질 때 매서운 비판보다는 사실상 방치해온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비판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최근의 사례처럼 연일 1면 머리기사와 사설 등을 통해 진보정당 내부 문제를 이슈화시키고 근본적 개선책을 마련하도록 조언자와 감시자의 역할을 다했는지는 되돌아봐야 한다는 얘기다.

진보언론 기자들이 진보정당을 봐준 게 근본 원인이라는 분석은 단선적인 접근이다. 뉴스라는 ‘상품’을 기준으로 볼 때 진보정당 내부 소식은 국민의 관심 사안이 아니라는 점도 주요 진보성향 언론이 이슈화에 주저한 원인일 수 있다. 실제로 진보정당 내부 상황을 애써서 취재해 기사로 내놓아도 언론에 비중 있게 실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게 사실이다.

진보언론의 취재와 보도, 진보정당의 언론 대응 등 구조적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진보언론 기자가 진보정당의 오래된 문제를 드러내는 데 주저한 측면도 없지는 않지만 진보정당 쪽에서 진보언론 비판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얘기다.

진보정당을 출입하는 한 기자는 “우리 독자층은 진보정당 지지층과 상당 부분 겹치는데 진보정당에 아픈 기사를 쓰면 ‘우리 당의 앞길을 가로막는 배신자’라는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그럴 때 위축되는 게 사실”이라며 “진보정당은 비판을 받으면 ‘마녀사냥’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보수언론은 물론 진보언론 지적까지 악의적 비판으로 바라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런 모습이 관행처럼 굳어지면 진보정당 출입기자들은 제대로 된 비판을 하기에 앞서 자기검열을 하게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진보신당까지 여러 차례 대변인을 역임했던 김종철 진보신당 부대표는 “통합진보당 사태를 보면서 확인되지 않은 사실도 진실인 것처럼 보도되는 등 부풀려진 측면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 원인은 통합진보당 잘못에 있다. (진보정당 문제와 관련해) 언론에 좀 더 투명해져야 한다. 과감하게 드러내놓고 바로잡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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