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오전 9시 반. EBS <방귀대장 뿡뿡이> 녹화 한 시간 전에 우면산 스튜디오에 도착한 ‘교장선생님’(제작진은 현장에서 모두 선생님으로 불린다)이 가방을 풀자마자 달팽이관(나선형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오늘은 아이들에게 자신이 가지고 노는 물건을 정리하는 방법, 손을 깨끗하게 씻는 법을 가르치는 날이다. ‘교장선생님’은 소품의 위치를 하나하나 다시 정하고 스태프, 학생들과 함께 세트 꾸미기에 정신이 없었다.

조명·세트 담당하는 선생님들은 두어 시간 일찍 출근해 큐시트에 나온 대로 조명을 다시 조정하고 세트를 다시 세운다. 스튜디오 사정이 넉넉지 않아서다. EBS는 스튜디오가 6개뿐이다. 우면산에 넷, 본사에 둘이다. 프로그램 수십 개를 녹화하려면 세트 분해·조립은 필수다. 조명 보조 김용휘씨는 “제 1스튜디오만 일주일에 대여섯 번 모습을 바꾼다”고 설명했다. 분해해서 뒤편에 쌓아놓은 뿡뿡이 세트가 거의 원상 복구됐다. 그러나 아직 한편에선 페인트칠이 한창이었다.

스튜디오 곳곳에 보이는 어린이 문법

 

‘교장’ 취임 8개월 째인 박유림 PD는 “‘어린이의 문법’을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촬영이 길어지면 우는 아이도 더러 있고, 물마시고 싶다는 아이도 있고, 화장실을 가게 해달라며 떼쓰는 아이 때문에 예정에 없는 쉬는 시간이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감정노동이 심할 것 같은데요?”

“마냥 나이스하지는 않아요. 아이들이 그저 놀고 싶어 하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해줘야 하거든요. 한 명을 빼고 가더라도 단호하게 다그치는 경우도 있어요.”
 

아이들이 길고 지루한 녹화를 ‘놀이’로 즐기게 하기 위해 오늘 제작진은 스티커를 준비했다. 정리대장, 씻기대장 스티커다. 일종의 보상장치인 셈이다. 줄을 제대로 서지 않고 삐죽 튀어 나온 아이를 혼내기도 한다.

당근과 채찍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얘기로 들리기 쉽지만 박 PD가 말하는 ‘문법’은 이뿐이 아니다. 아이들과 관계를 맺는 방법을 뜻한다. 큐시트 곳곳에 이런 장치가 있고, 세트 곳곳에 어린이 문법이 적용돼 있다.

제작진은 아이들이 앉아 쉬는 곳을 정해준다. 안전 때문이다. 쉬는 시간에도 항상 말을 건다. 그래야 지치지 않는다. 그리고 아이들의 표정과 상태를 확인한다. 몸이 아프면 녹화에 빠지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녹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 오전과 낮 시간에 집중한다. 아이들 촬영 때는 연기자며 스태프며 NG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박유림 PD는 그만의 제작 가이드라인 세 가지를 말해줬다. 아이들이 직접 할 수 있는 놀이에 숨겨진 효과가 있는지 고민하기, 아이들이 친구들과 함께 안전하게 놀이를 즐길 수 있는지 점검하기, 아이들이 단순히 시청자가 아니라 출연자임을 명심하기. 박유림 PD는 여기서 ‘어린이의 문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녹화 시작! 초짜 건우는 카메라가 무섭다

박유림 PD가 다시 내려왔다. 고정 출연하는 어린이 네 명의 컨디션을 확인하고, 이번 녹화에만 참여하는 신청 출연자 넷을 다시 보기 위해서다. 그런데 출연을 신청해서 온 다섯 살 건우의 표정이 좋질 않다. 부끄러운지 무서운지. 박 PD는 베테랑 혜린이에게 건우를 부탁했다.
 

녹화가 코앞. 짜잔형 배승길(27)씨가 메이크업을 마치고 등장했다. 짜잔형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고정으로 출연하는 아이들은 여기를 놀이터로 생각해요. 그런데 처음 온 친구들은 적응이 잘 안 돼요. 엄마 없이 사방에 기계인 곳이니까요. 그래도 같이 놀다보면 표정이 점점 바뀌는 게 눈에 보여요.”

그는 옆에 있는 민주와 에피소드를 떠올렸다. 민주는 지금이야 가운데서 율동을 주도하는 베테랑이지만 사고도 자주 쳤다. 짜잔형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녹화 중간에 스튜디오에 뛰어 들어와 짜잔형 입에 과자를 먹여준 적도 있다.

“뿌이뿌이 뿡” 뿡뿡이의 변신방귀에 맞춰 녹화가 시작됐다. 동시에 NG가 났다. 짜잔형의 “준비됐나요?” 대사에 카메라 뒤편에 있던 어린이 출연자 7명이 양손을 번갈아 들어올리며 “네, 네, 네, 네, 네”를 외친 탓이다. 제작진 처지에서는 기분 좋은 NG다. 딱 한 명만 표정이 시무룩했다. 초짜 건우다.

옆구리를 찔러도 뿡뿡이는 말이 없다

 

30분마다 쉬는 시간이 이어졌다. 어린이 출연자의 집중력을 배려한 일정이다. 현욱이와 민주에게 물었다. “힘들지 않아요?” “오래 서 있으면 힘들어요.” “더 자주 쉬고 싶어요?” “참아야죠. 그래야 빨리 끝나요.” 지난해 가을학기부터 시작한 베테랑다웠다.

 

쉬는 시간을 더 줘야 할 사람이 또 있었다. 짜잔형과 뿡뿡이다. 짜잔형은 녹화 내내 허리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은 채 연기를 했다. 카메라가 돌지 않을 때는 자꾸 무릎을 만졌다. 그는 “야구로 따지면 포수”라며 “무릎이 아프지만 눈높이를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뿡뿡이는 연신 부채 앞에 서 있다. 녹화가 공개방송으로 진행되는 탓에 인형옷을 벗을 수 없다. 심지어 고정 출연자에게도 얼굴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고, 말도 해서는 안 된다. 쉬는 시간에는 세트 구석에 들어가 탈을 벗고 쉰다. 뿡뿡이는 아이들의 기억 속에 ‘신비한 친구’로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얼굴에는 땀이 한 가득이다. 정수민(27)씨는 캐릭터 연기 10년차다. 수민씨는 탈을 쓰고 연기를 하는 탓에 덥고 시야가 좁아 불편하다. 그리고 캐릭터 연기는 평소보다 2~3배 힘을 들여 연기해야 하고, 성우의 목소리에 맞춰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체력소모가 심하다고 한다. 짜잔형과 달리 그가 포토타임을 빼고 아이들 몰래 탈을 벗고 땀을 닦는 이유다.

뿡뿡이가 가장 답답해하는 건 아이들과 얘기를 못하는 점이다. 뿡뿡이를 좋아해서 말을 걸고 옆구리를 쿡 찌르는 경우도 있지만 그때마다 다른 스태프들이 답을 대신한다. “오늘 뿡뿡이는 목이 아파서 말을 못해요.”

이날은 대전에서 온 세 살배기 현빈이가 뿡뿡이를 보려고 ‘뻗치기’를 했다. 스튜디오 공개시간과 뿡뿡이의 쉬는 시간이 겹쳐 만나지 못한 현빈이가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포토타임에 뿡뿡이가 나왔지만 생각보다 큰 몸집에 놀란 현빈이는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무서워요?” 물으니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경우가 다반사다. 말못하는 뿡뿡이는 서럽다.

다행히도 뿡뿡이는 아직까지 한 번도 ‘정체’를 노출하지 않았다. 초기에는 녹화가 끝난 뒤 대기실에서 아이들이 예뻐서 먼저 말을 거는 경우도 있었다. ‘실수했구나’ 생각했지만 아이들이 못 알아봐서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유아프로그램 PD는 ‘교장선생님’

점심밥을 먹기 전 박유림 PD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는 2층에서 “원 컷, 투 컷, 쓰리 스탠바이… 컷. 뿡뿡이부터 다시 갈게요”를 반복했다. 평소에 점심을 잘 먹지 않는다는데 이날은 특별히 미디어오늘 취재진과 함께 밥을 먹었다. 아이들을 배려해 한 시간을 식사시간으로 잡았지만 그는 다음 촬영을 준비해야 한다며 부리나케 올라갔다.
 

잠깐 짬을 내 인터뷰를 시도했다. 전에 연출했던 <스페이스 공감>과 차이를 물었다. 박유림 PD는 역시 ‘아이들의 존재’를 들었다. 단순히 아이들 때문에 감정적으로 힘들다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는 “‘공감’이 시청자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뿡뿡이’는 시청자가 눈앞에 있다는 게 다르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아이들이 직접 출연하고 시청하는 프로그램인데 마냥 재밌게 만들 수 없다”고 덧붙였다. “촬영현장에서도 교육이 방송보다 앞선다”고 그는 말했다.
 

박유림 PD에게 “교장선생님 같다”고 하니 “그렇죠?”라며 대답했다. 영락없는 ‘교육자’다. 그는 “유아프로그램 제작은 다른 것보다 1.5배는 더 노력해야 한다”며 연구에서 안전점검이 꼭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박유림 PD가 연출을 맡은 지난해 가을부터 학부모가 등장하지 않는다. 박유림 PD는 “엄마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놀이문화가 달라진다”며 “수준과 난도를 낮춰 아이들이 스스로, 협동해서 할 수 있는 놀이를 고민한다”고 설명했다.

이날 진행한 놀이 중 하나는 아이들이 바닥에 있는 책을 한 권씩 전달해 정리하는 것. 박유림 PD는 “‘전달’은 고난도”라며 “아이들이 하지 못할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런데 가장 재밌게 해냈다. 건호가 드디어 웃고 뛰어 다니기 시작했다.

“놀이는 아이를 자라게 합니다”

오후에도 놀이가 이어졌다. 동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배경으로 아이들이 짜잔형과 함께 공주를 구하러 가는 걸 촬영했다. 파란 천을 뒤에 두르고 크로마키 촬영을 마친 뒤 스튜디오 촬영에 다시 들어갔다.

 

슛 들어가기 직전, 아이가 짜잔형에게 물었다. “왕자님은 왜 없어요?”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짜잔형은 “왕자님은 말 사러 갔어”라고 얼버무렸다. ‘놀라지 않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짜잔형은 “당황스럽지만 아이들이 촬영이 아니라 놀이라고 생각하는 거라 기분이 좋다”고 얘기했다.

 

본격적인 촬영. 종이로 만든 칼을 든 아이들이 신문지로 만든 가시덤불을 헤치고, 동화책으로 만든 징검다리를 건너 공주를 구하러 가는 설정이다. 이 장면에서 박유림 PD가 고민에 빠졌다. 징검다리가 낮아 아이들이 너무 쉽게 건넌다는 것. 박 PD는 “공주 구하는 건 좀 어려워야 하는데…”라며 고민하다 조연출 하늘씨에게 무선으로 “동화책 좀 더 쌓아줘”라고 말했다. 놀이는 즐거워야 하지만 프로그램도 즐거워야 하는 데서 생긴 곤란이다. 아이들이 징검다리를 힘들어하자 그제야 박 PD는 만족했다.

난관은 씻기대장 율동이었다. 10번 가까이 다시 찍었다. 아이들에게는 가장 강행군이었다. 앞에 율동 선생님이 있지만 아이들은 뿡뿡이와 짜잔형을 바라봤고, 반복되는 촬영에 율동을 하지 않았다. NG가 이어질 때마다 아이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조연출 하늘씨는 율동이 끝날 때마다 “잘했어요”라고 달랬지만 무선으로 들리는 얘기는 “한 번 더”였다. 율동을 잘 찍어두면 두고두고 쓸 수 있다는 게 제작진의 욕심이다.

특단의 조치가 내려졌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에게 ‘마이쭈’를 하나씩 나눠줬다. 박유림 PD를 비롯해 스태프들은 아이들을 달래고 율동을 다시 가르쳤다. 그제야 아이들은 힘을 내기 시작했다. 한 조각의 힘은 실로 대단했다. 아이들 촬영이 끝났다. 성인만 남은 스튜디오. 짜잔형과 뿡뿡이는 두어 차례 NG를 내고 촬영을 마무리했다.

박유림 PD는 촬영 중간에 놓친 음성을 다시 땄다. 성우와 배우 한 명 한 명과 대화하며 음성을 다시 녹음했다. 녹음을 마치고 스튜디오를 다시 둘러본 뒤 퇴근을 준비했다. 촬영은 오후 6시까지였지만 30분 일찍 끝냈다. “이 정도면 괜찮은 성적이죠.” 박 PD는 웃었다.

‘탈락’을 아는 아이들… 그래서 <뿡뿡이>가 필요해

촬영에 이은 뒤풀이. 인간 박유림을 취재하는 게 목적이었지만 주제는 자연스레 프로그램으로 흘렀다. 박유림 PD가 말문을 열었다. 그는 “부모의 등쌀에 밀려 촬영을 오는 아이들을 여럿 봤다”며 “뿡뿡이와 짜잔형 옆에만 서있는 아이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했다.

실제 유아·어린이프로그램을 통해 스타로 대성한 사람도 꽤 있다. <뽀뽀뽀> 등 유아어린이프로그램을 두루두루 거친 이성심 작가는 어릴 적 방송에 들어왔다 스타로 성장한 빅뱅의 지드래곤을 예로 들었다. 그러나 대형 기획사가 선택해 잘 만든 극히 소수의 어린이만이 부모가 바라는 ‘성공’을 이루게 된다. 이 작가는 이런 점을 염려했다. 조숙한 아이는 어른보다 무섭다!

순수하게만 보이는 아이들에게 때가 묻는 과정을 보는 PD의 마음은 어떨까. 박유림 PD는 “둘이 대결하는 놀이는 거의 하지 않지만 아이들이 벌써 ‘탈락’이란 말을 안다”고 말했다. 제작에 잘 따라주지 않는 아이를 불가피하게 제외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애들이 “너, 탈락이야”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고 한다. 박유림 PD를 비롯한 제작진이 작품보다 현장과 교육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다.

2000년에 시작했으니 13년째다. 풀리지 않을 듯 보였지만 제대로 된 어린이프로그램을 만들고자 하는 제작진의 고민이 어느새 한 올 한 올 풀리고 있다. 방송사가 방송에 쫓겨 급하게 녹화하지 않고 사전에 충분히 자문을 얻어 기획하는 것이 첫 단추다. 이런 점에서 뿡뿡이의 이날 녹화분이 5월 30일 이후 방송되는 건 고무적이다. 스튜디오가 놀이터가 될 수 있을까. 제작진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자신을 PD라기 보다 교육자로 자처하는 박유림 PD와 제작진의 매주 목요일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기지개를 켜자. 뿌이뿌이 뿡~!
  

■ 박유림 PD는…
 

   
 
 

2006년 라디오 <세계음악기행>으로 연출을 시작했다. 뉴스와 오락프로그램을 거쳐 2009년 <스페이스 공감>, 2010년 <생방송 톡!톡! 보니하니>를 연출하다 <방귀대장 뿡뿡이>로 자리를 옮겼다.
원래 꿈은 달랐다. 스포츠채널에서 일하고 싶었다. 박진감 넘치는 장면을 순간순간 잡아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스포츠PD를 만날 때면 항상 ‘컷’의 비결을 묻곤 했다. 그러나 지금 가장 존경하는 PD는 문동현 EBS PD. 그의 답은 “마음에 들 때까지…” 박 PD는 절망한다.
PD저널에 7주에 한 번씩 글을 쓰고 있다. 그의 글대로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악셀), ‘교육’을 한다는 방송사에서(더블 악셀), 그것도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트리플 악셀) PD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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