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은 그렇게 넘실댔다. 11일 저녁 7시,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앞 ‘희망텐트 3차 포위의 날’에 모인 2천여 명의 사람들은 입을 모아 ‘희망’을 말했다. 어쩌면 그것은 곧 ‘절망적인 현실’의 다른 표현이었다. 어떻게든 다시 희망을 말해야 했다.

다시 공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 옛 동료들과 다시 만나 술 한 잔 기울이고 싶다는 희망, 그저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소박한 내일을 꿈꾸게 될 거라는 희망. 살기 위해서는, 희망이 필요했다. 벌써 20번째 생명이 힘없이 무너져 내린 터다. 

2009년 ‘경영상의 어려움’을 맞은 쌍용자동차는 노동자들을 잘라냈다. 2206명의 희망퇴직자와 159명의 정리해고자, 그리고 461명의 무급휴직자들은 억울했다. 회사가 시키는 대로 기계와 한 몸뚱이가 되어 밤낮 없이 자동차를 만들어 낸 ‘죄’ 밖에는 없었다. 회사가 어려워진 게 우리 탓이냐고 되물었다. 경영진의 책임은 없냐고, 또 ‘먹튀 자본’에게 쌍용차 인수를 허락한 정부의 책임은 없냐고 물었다. 대답 대신 돌아온 건 경찰의 진압과 회사의 냉대였다. 누구도 희망하지 않았던 ‘희망퇴직’은 그렇게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희망을 빼앗긴 이들이 쌍용차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경영상의 어려움’에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경영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책임이 사라진 자리, 고통은 어디에서건 늘 일방의 몫이었다. 이유와 조건은 조금 달라도 서로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당신의 아픔이 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은 손을 맞잡게 하는 힘이었다. 생면부지의 ‘외부인’들은 쌍용차 노동자들을 응원하러 온 게 아니었다. 다만 그 곳에서 각자의 절망을 발견하고, 희망을 찾기 위해 몸부림 칠 뿐이었다. 희망은 그렇게 하나였다.

‘희망버스’가 끌어내린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웃으면서 끝까지 투쟁”하자는 말을 전했다. 파란색 작업복을 입고 나온 그의 입에서는 거친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민주통합당 정동영 의원은 “죄송하다”는 말과 “제 1야당이 앞장서도록 노력하겠다”는 말을 꺼냈다. ‘쇼 그만하라’는 일각의 시선을 그는 묵묵히 행동으로 받아내는 중이었다.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은 “올 해 총파업을 꼭 성사시키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더 힘차게, 또 함께 싸워 나가자는 다짐의 뜻이었을 테다. 

경찰은 26개 중대 2천6백여 명의 경찰 병력으로 공장 정문을 가로 막고 서 있었다. 공장 밖의 사람들은 몇 시간 동안 반복해서 ‘희망’을 말했다. 왜 희망을 말할 수밖에 없는지, 함께 희망하는 것들이 무엇인지, 또 어렴풋한 희망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름의 방식으로 말하고, 노래했다. 한바탕의 ‘난장’을 마친 밤 11시께, 사람들은 횃불을 손에 들고 공장을 에워쌌다. 조용하던 경찰은 ‘불법 시위물품’을 내려놓으라는 경고와 함께 물대포 차를 앞에 세웠다. 방패를 움켜쥔 손에 부쩍 힘이 들어간 모습이 보였다. 

 

사람들은 몇 곡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정리해고 박살내고 공장으로 돌아가자” 따위의 구호들을 차분히 외쳤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횃불들을 말없이 한 곳에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하나하나의 횃불이 그렇게 커다란 하나의 불꽃으로 모아졌다. 몇 시간째 영하의 날씨에 떨던 이들의 몸과 마음이 벌건 불꽃에 녹아 내렸다. 경찰은 말없이 사람들의 ‘의식’을 지켜봤다. 곧 수십 개의 텐트로 흩어진 이들은 밤새 서로의 온기에 기대 잠을 청했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경험과 삶을 나눠 가졌다.

그리고 다음날. 대다수 언론은 마치 ‘만일의 사태’가 예견되어 있던 것처럼, “별다른 충돌은 없었다”는 말로 기사를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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