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잉진압 논란, 10년 전 노무현은 머리숙여 사과했다

농민 사망 사건에 대통령 사과와 경찰청장 사퇴… 새누리당, "미국에선 경찰이 쏴죽어도 80~90%는 정당"

2015-11-18     이재진 기자

백아무개씨가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쓰러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가운데서도 경찰이 시위대의 불법 폭력만을 강조하면서 비난이 커지고 있다. 

살수차 운용 지침 등 진압 관련 수칙을 지키지 않는 것이 드러났고, 특히 백씨가 쓰러졌는데도 20초 동안 살수를 한 것은 과잉 진압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경찰은 시위대의 폭력을 부각하며 진압이 정당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구은수 서울청장은 지난 15일 "농민이 다친 것은 안타깝지만 경찰의 물리력 행사는 정당했다"면서 불법 집회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밝혔다. 구 서울청장은 또한 "백씨를 겨냥해 쏜 게 아니라 불법행동을 하는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쏘다가 불상사가 생겼다"면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강신명 경찰청장의 문제 인식도 비슷하다. 강 청장은 16일 경찰지휘관 회의에서 "농민 부상 사건이 발생한 것은 안타깝지만 그것이 불법 폭력시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이 돼서는 안된다"고 말햇다.

쌀값 폭락에 항의해 시위에 나선 한 농민이 공권력의 '폭력'에 생명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는데 공권력 행사에 문제가 없고 책임질 일이 아니라고 하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2005년 농민 사망 사건으로 돌아가보자. 당시 쌀 협상 비준저지 시위에 참가했다가 농민 전용철씨가 사망하자 정치권은 진상을 철저히 규명하라고 한 목소리를 냈다. 

전병헌 당시 열린우리당 대변인은 "고 전용철씨 사망사건에 대해 정부 당국의 철저하고 엄정한 진상규명을 촉구한다"며 "경찰은 이번 사건의 당사자로서 한 점 의혹 없는 조사를 통해 고 전용철씨의 죽음에 대한 소모적 갈등이 부풀려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할 책임이 있다"고 밝혔다.

김성완 당시 한나라당 대변인은 "현 정부의 농정은 농민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심을 달래주기는커녕 당장 살아가기도 힘들게 만들고 있어 사실상 농정부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해 전용철씨 죽음이 정부에 책임에 있음을 강조했다. 이정현 당시 한나라당 부대변인도 "사망 원인에 대한 논란과 의혹이 일고 있는 만큼 철저한 진상조사가 이뤄져야 하고 아울러 책임 규명과 수습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사망 원인에 대한 논란이 일자 정치권은 국회 청문회까지 열었다. 청문회에는 집권여당뿐 아니라 한나라당 의원이 청문 위원으로 참석했다. 당시 국가인권위원회는 진압부대 지휘관과 진압 경찰 조사, 목격 조사 등을 진행하겠다며 경찰을 압박했다. 

시민사회도 들끓었다. 범국민대책위를 구성해 경찰청장 사퇴를 요구한 대규모 단식 농성을 벌였다. 살인정권·부시·WTO·허준영 경찰청장·한나라당·열린우리당·경찰기동대 등을 '농업말살 농민살해 7적으로 정해 화형식을 하는 퍼포먼스가 언론보도를 장식했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에게 머리를 숙여야 했다.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강력한 요구를 수용하는 모양새였다. 2005년 12월 27일 노 대통령은 "국민 여러분께 머리 숙여 사죄드리고 돌아가신 두 분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공권력은 특수한 권력이다. 정도를 넘어서 행사되거나 남용될 경우에는 국민들에게 미치는 피해가 매우 치명적이고 심각하기 때문에 공권력의 행사는 어떤 경우에도 냉정하고 침착하게 행사되도록 통제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공권력의 책임은 일반 국민들의 책임과는 달리 특별히 무겁게 다루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공권력 행사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사실상 경찰 지휘부에 대한 경고로 해석됐다.

다만 노 대통령은 "쇠파이프를 마구 휘두르는 폭력시위가 없었다면 이같은 시태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국민 모두가 머리를 모으고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면서 허준영 경찰청장의 거취 문제에 대해서는 "허 청장에게 책임을 묻는 게 옳으냐 그르냐는 판단을 하기 전에 지금 대통령이 제도적으로 경찰청장에 대해 문책인사를 할 수 있는 근거나 권한을 갖고 있는지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을 그르면서 논란이 일었다.

정치권은 노 대통령의 사과 발표가 미흡하다며 경찰청장의 문책성 경질을 재차 요구했다. 

당시 구상찬 한나라당 대변인은 "대통령과 경찰청장이 이렇듯 대책도 없이 무성의한 사과를 한 것은 고인이나 유족 또 농민들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면서 "인사권자인 대통령이 경찰청장 사퇴 문제를 나에게 권한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이며 공을 경찰청장 당사자에게 넘겨 버린 것은 한마디로 무책임하고 비겁한 행동이며 한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고 비난했다.

유종필 민주당 대변인도 "노 대통령은 무책임하게 경찰청장에게 진퇴를 결정하라고 할 게 아니라 즉각 행자부 장관을 해임하고 경찰청장을 경질해 재발방지책을 마련한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결국 허준영 청장은 노무현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발표 이후 이틀이 지난 12월 29일 자진 사퇴를 하기에 이르다. 허 청장은 "공권력의 상징인 경찰청장이 물러날 사안은 아니라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지만 정치권의 압박에 사퇴하게 됐음을 밝혔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공권력 과잉 행사 문제를 제기하며 대통령 사과와 청장 사퇴까지 이끌어낸 지난 2005년 사건과 이번 민중총궐기 사건을 대하는 정치권의 반응은 비교될 수밖에 없다. 

사경을 헤매는 백씨는 아랑곳 하지 않고 오히려 "미국에선 경찰이 총을 쏴 시민이 죽어도 80~90%는 정당하다고 본다"(이완영 새누리당 의원)며 강경 진압을 웅호하고 있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도 철저히 백씨의 사건을 외면하면서 "쇠파이프와 밧줄이 좌파민주주의의 상징이냐. 굳이 하지 말라는 곳에 들어와서 한 폭력집회는 누구의 잘못인가. 야당은 살수차 예산을 한푼도 못 준다는데 의경은 무엇으로 자기 생명을 지키나"라고 말했다.

2005년과 2015년, 여야의 위치가 바뀐 것을 감안해도 생사를 가르는 사건이 발생했는데도 새누리당이 최소한의 유감 표명 조차 하지 않은 것은 이번 기회를 통해 ‘시위는 곧 불법’이라는 공식을 못받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결국 경찰이 시위대 불법 시위에 대한 강경론을 펴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집권여당의 든든한 뒷배를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시위를 불법을 넘어 테러로 규정하는 모습까지 보이면서 공권력이 견제받지 못하고 권력남용으로 인한 과잉 진압 현상도 퍼질 수 있다.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은 18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집회 시위 전략도 바뀌어야 하지만 경찰이 과잉 진압하는 것도 웃기다. 시위대를 오히려 부추길 수 있다고 본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