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장자연 리스트’라고 불리는 것은 한국사회 상류층의 모럴해저드(도덕적해이)의 극치라고 본다. 이번에는 경찰이 좀 더 적극적으로 수사를 해서 다시는 한국사회 상류층의 이런 모럴해저드가 없어지기를 바란다.”

지난 2009년 3월 자신이 당한 성폭력을 고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故) 장자연씨가 남긴 자필 문건과 관련해 당시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3월23일 최고위원회의에서 했던 말이다. 홍 대표는 이어 기자들과 만나 “대한민국을 세탁기에 넣고 돌려야 한다. 상류층 윤리가 (일반 시민들과) 상당히 다르다”고 강조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장자연씨가 남긴 문건에서 “잠자리를 요구받았다”는 인물은 ‘조선일보 방 사장’이었으며, 당시 이런 사실을 국회에서 공론화한 이종걸 민주당 의원에게 법적 대응을 하겠다며 압박한 조선일보 간부는 현재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의 비서실장인 강효상 의원이다. 강 의원은 당시 조선일보 경영기획실장이었다.

홍 대표와 강 의원을 비롯한 한국당은 지난 2일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장자연 리스트’ 사건을 2차 사전조사 대상으로 선정한 것과 관련해 아직까지 아무런 공식적인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故 장자연씨 영정이 그의 발인인 지난 2009년 3월9일 오전 성남시 분당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을 떠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故 장자연씨 영정이 그의 발인인 지난 2009년 3월9일 오전 성남시 분당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을 떠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앞서 이종걸 민주당 의원은 2009년 4월6일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당시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에게 “장자연 문건에 따르면 ‘당시 조선일보 방 사장을 술자리에 만들어 모셨다’는 글귀가 있다”면서 “경찰이 언론사 대표, 언론사 사주를 이렇게 눈치를 보면서 조사 자체를 왜곡하고 조사를 못 하는 것에 대해 국민이 허탈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강효상 조선일보 경영기획실장은 이 의원에게 공문을 보내 “이 의원이 본사의 이름과 사장의 성(姓)을 실명으로 거론한 행위에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며 “면책특권을 가진 국회의원이라고 하더라도 국회 내에서 전혀 근거 없는 내용을 ‘아니면 말고’ 식으로 발언하는 것은 면책특권의 남용이며 명백히 민·형사상 위법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장자연 사건 때 ‘방 사장’ 지켰던 ‘조선맨’ 강효상 의원

방상훈 사장과 조선일보는 장자연 리스트 관련 조선일보 사주 연루 의혹을 제기한 이종걸 의원과 이정희 전 통합진보당 대표, KBS·MBC를 비롯한 언론사와 언론단체 관계자 등을 상대로 무더기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모두 패소했다. 방상훈 사장에 대한 이종걸 의원의 명예훼손 형사사건 재판이 진행 중이던 지난 2013년 2월엔 법원의 방 사장 증인 출석 요구를 계속 거부하다가 모든 소송을 취하했다.

조선일보는 2월28일 보도자료를 내고 “당초 방송사와 정치인 등을 상대로 소송을 낸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연예인과의 의혹 제기와 일방적인 비방 행위에 대해 진상을 규명하고 명예를 회복하는 데 본뜻이 있었다”며 “허위 사실로 명예훼손을 당했다는 사실을 법적으로 인정받은 이상, 진실 규명이라는 소기의 목적이 달성됐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해당 판결은 2013년 2월 8일 조선일보와 방상훈 사장이 KBS·MBC 등을 상대로 낸 명예훼손 손해배상 소송의 항소심으로, 재판부는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은 고 장자연씨나 소속사 전 대표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나아가 술 접대 내지 성 상납을 받았다는 의혹은 허위임이 입증됐다”고 판시했다. 다만 재판부는 “피고들은 공익성·상당성 등 위법성 조각 요건을 갖춰 일부 허위 사실을 적시했더라도 손해배상 책임이 없다”고 밝혔다.

사건 초기 “무명 여배우 인권” 강조했던 조선일보와    

“상류층의 모럴해저드, 세탁기에 돌리라”던 홍준표

“수억 원의 개런티(출연료)를 받는 연예인, 수십억 원의 재력가 스타가 존재하는 우리 연예계의 한쪽에서는 꿈을 담보로 잡힌 채 고통을 겪고 있는 무명 여배우란 존재가 자리를 잡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유린하는 건 그들보다 힘이 센 사람들이다.”

장자연씨 자살 후 그가 남긴 자필 문건에 ‘조선일보 방 사장’이 포함돼 있다는 게 드러나기 전 2009년 3월10일 조선일보 지면에 실린 기사 중 일부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13일 KBS가 장씨의 자필 문건을 입수해 보도한 후 ‘장자연 리스트’에 자사와 계열사 사장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관련 내용을 보도하지 않다가 16일부터 ‘장씨의 전 매니저가 장씨의 기획사 대표와 소송을 위해 꾸민 자작극’이라는 식의 기사를 쏟아냈다. 권력층 성폭력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전형적인 물타기 보도였다.

▲ 지난 2009년 4월13일자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 칼럼.
▲ 지난 2009년 4월13일자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 칼럼.
이어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은 4월13일 ‘조선일보의 명예와 도덕성의 문제’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장자연 문건’에 대해 “그 문건이라는 것에는 아무런 정황이나 구체성 없이 조선일보의 한 고위 인사가 온당치 않은 일에 연루된 것처럼 기술돼 있어 심각한 일”이라며 선 긋기를 시도했다.

그러면서 김 고문은 “조선일보 입장에서 보면 경찰도, 어느 의미에서는 정권도 이 ‘장자연 사건’의 진행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며 “그래서 당국의 무능과 무력, 또는 관음증(?)이 사태의 ‘주연’ 같고, 일부 ‘안티 조선’의 조바심이 ‘조연’처럼 보였다”고 경찰 조직과 함께 당시 이명박 정권에도 일종의 경고 신호를 보냈다. 이런 식으로 조선일보가 궁지에 몰리는 것을 방치한다면 ‘우리도 가만있지 않겠다’는 에두른 압박이었다.

조선일보는 ‘장자연 리스트’를 부정하며 정권과 경찰을 압박했다

아울러 조선일보는 방상훈 사장의 술 접대 의혹을 제기한 이종걸·이정희 의원 등이 조선일보의 특정 임원을 ‘장자연 사건’에 관련된 것처럼 공표해 명예를 훼손했다며 민·형사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종걸 의원은 명예훼손으로 검찰에 기소됐다가 공소기각 확정판결 받았다. 두 의원 모두 조선일보로부터 10억 원씩의 손해배상소송을 당했지만 모두 승소했다.

지난달 28일 KBS ‘뉴스 9’ 리포트 갈무리.
지난달 28일 KBS ‘뉴스 9’ 리포트 갈무리.
결국 조선일보는 장자연 문건에 나온 ‘조선일보 사장’이 방상훈 사장이라고 인정하기 어렵다는 검·경 수사결과가 나오자 마치 조선일보 측이 장자연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도했다. 그리고 장자연 리스트에 언급된 당사자를 이미 조선일보 계열사를 떠난 전 스포츠조선 사장에게 덮어씌웠다.

조선일보는 2011년 3월9일자 지면 기사를 통해 “경찰과 검찰 수사 결과 연예기획사 대표 김종승씨가 장자연씨에게 소개한 사람은 스포츠조선 전 사장이었다”며 “김씨 스스로 서울 한 중국음식점에서 장씨를 스포츠조선 전 사장에게 소개했다고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2007년 10월경 중식당에서 장씨를 만난 9명의 사람 중에는 스포츠조선 전 사장뿐만 아니라 이날 만남을 주재하고 직접 식사비까지 낸 방용훈 코리아나호텔 사장도 있었다. 방용훈 사장은 방상훈 사장의 친동생이다.

물론 경찰은 방용훈 사장이 이 모임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그를 불러 조사하지 않았다. 외려 경찰 수사를 넘겨받은 검찰은 장자연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며 장씨의 문건에 적힌 ‘조선일보 사장’이 김씨가 진술했던 스포츠 조선 사장일 가능성이 높다고 결론 냈다. 조선일보 역시 이런 잘못된 수사 결과를 바탕으로 방상훈 사장은 이 사건과 무관함만을 주장할 뿐 방용훈 사장의 존재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검·경은 조선일보가 바라던 수사 결과만 발표한 채 끝냈다

결국 검·경 수사 결과 장자연 문건에 나온 ‘조선일보 방 사장’이 방상훈 사장은 아닌 것으로 매듭이 지어졌다. 방용훈 사장 등 다른 ‘방 사장’이 있었다거나, 방상훈 사장 차남인 방정오 현 TV조선 대표이사 전무 역시 장씨의 어머니 기일인 2008년 10월28일 장씨와 술자리를 가졌다는 수사 기록은 ‘없던 일’이 됐다.

▲ 2009년 8월 수원지검 성남지청은 장자연 사건 관련 조선일보 방상훈 대표를 피의자로 조사한 후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2009년 8월 수원지검 성남지청은 장자연 사건 관련 조선일보 방상훈 대표를 피의자로 조사한 후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장자연 문건은 신빙성이 없다’는 식의 프레임으로 일관했던 조선일보는 사주 일가가 더는 세간에 오르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사건을 덮었다. ‘장자연 리스트’가 나온 후 경찰에 적극적 수사를 당부했던 홍준표 대표는 사주 관련 의혹 제기에 재갈을 물렸던 ‘조선맨’ 강효상 의원과 같은 길을 걷는 운명 공동체가 됐다.

검찰이 장자연 리스트 사건 본 조사에 착수하면 이들은 또 어떤 ‘보복’ 프레임을 펼치고 반전 카드를 꺼낼까.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는 걸 경험하고 있는 국민은 이제 장자연 사건 재조사 과정에서 누가 진실을 가리려 하는지 두 눈 부릅뜨고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9년 전 김대중 조선일보 고문은 “조선일보의 누구든 장자연 사건에 연루된 것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조선일보 차원에서도 일벌백계해야 할 것이고, 그 상황에서는 조선일보 측의 결백을 믿어온 임직원부터도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국민은 이런 조선일보의 결기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관련기사 : 장자연 사건의 실마리, 검찰이 밝혀야 할 ‘조선일보 방 사장’]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