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구치소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왕재산 사건’ 피의자들에게 같은 법으로 사형 당한 사형수의 옥중수기를 읽으라고 건넸다가 피의자들이 항의하자 회수한 것으로 확인됐다. “구시대적 전향공작이 아니냐”는 비판이 쏟아지자 구치소 측은 “행정 착오로 일어난 실수”라며 재발 방지하겠다고 사과했다.
 
5일 피의자 측 변호인 및 가족, 서울구치소 측에 따르면 서울구치소는 지난해 12월 22일 밤 피의자 5명에게 국가보안법으로 사형당한 고 김질락씨의 옥중수기를 한 권씩 나눠줬다.

피의자 한 명은 곧바로 항의해서 그 자리에서 회수했지만 나머지는 그 책을 펼쳤다. 이 책은 이른바 ‘전향수기’로, 발간사에는 왕재산 사건이 통일혁명당 사건과 함께 언급돼있고, 우리사회의 친북적인 경향에 경종을 울려야 한다는 게 요지다. 책을 본 네 명은 깜짝 놀라 항의했고, 구치소 측은 피의자들이 재판 때문에 사방(수용시설)을 비운 다음날 오전에 책을 모두 회수했다.
 
같은 법으로 사형을 당한 사람의 수기를 읽은 피의자들은 협박을 받은 심정이었다고 가족들이 전했다. 가족대책위 관계자는 5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피의자들이 “협박하는 느낌이 들었다”며 “폐쇄적인 공간에 갇혀 있는 피의자들이 정신적인 충격을 받았다”고 호소했다고 전했다. 그는 구치소의 이런 행동에 대해 “심리적 압박감을 주기 위한 협박이자 폭력”이라고 비판했다.

피의자를 변론하는 이광철 변호사는 해당 책을 5권만 사서 왕재산 사건 피의자 5명에게만 나눠준 점을 들어 “구시대적 전향공작 아니냐”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 변호사는 “윗선의 개입이 있지 않았겠냐는 심증이 간다”며 “책을 준 사람이 누군지, 어떤 의도로 준건지 정확히 따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피의자 측은 특정 사건 피의자에게만 책을 나눠줬다는 점, 일반적인 책 반입 경로를 거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법무부나 국정원 등의 개입을 의심하고 있다. 또한 문제가 된 책에 왕재산 사건이 언급된 점에 대해서도 공식적으로 대응할 계획이다.
 
이런 의혹에 대해 서울구치소 관계자는 “공동책장에 넣으려고 했는데 실무자들이 잘못 알아듣고 개별적으로 책을 줬다”며 “실무자의 행정착오”라고 해명했다. 다섯 권을 산 이유에 대해 김 계장은 “서문에 왕재산 사건이 있어 (피의자들에게) 참고가 될까 싶어서 구입했다”며 ‘윗선이 개입한 것 아니냐’는 의혹에는 “그런 일은 없고, 책은 ‘서울구치소 관본’으로 생활지도계에서 구입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책 내용을 보니 피의자의 충격을 이해할 수 있겠다”며 유감을 표명했다.
 
고 김질락씨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1972년 명을 달리했다. 그의 옥중수기 ‘어느 지식인의 죽음’은 사형을 앞둔 김씨가 과거를 돌아보고 공산주의를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으로 1991년에 이어 지난해 11월 재출간됐다. 보수논객 조갑제는 이 책에 대해 “통일혁명당의 후예들인 오늘의 종북좌익세력에 보내는 충고”라고 평가했다.
 
한편, 왕재산 사건은 지난해 7월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가 ‘왕재산’이라는 반국가단체를 결성하고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국회의원 비서관 출신 이아무개씨 등 5명을 구속·기소한 사건이다. 검찰은 9월 14일 1심 첫 재판에서 자료를 준비하지 못해 일정이 연기되기도 했다. 현재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대해 조사가 진행 중이며 1심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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