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하얼빈(哈爾賓) 하면 한국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도대체 어디지? 러시아 땅인가?”라고 되묻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저격한 곳이라고 하면 “아~! 거기”하며 바로 알아차린다. 하얼빈 시정부가 한국에서 투자유치 등 홍보활동을 펼 때도 안 의사를 앞장 세운다.

하얼빈에 2년 동안 있으면서 필자의 머리속 한 곳에서는 항상 안중근 의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의 올곧은 정신에 무한한 경외감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실제 역사의 현장인 하얼빈역에 가면 거사 당시의 느낌이 살아난다.

안중근 의사가 당시에 꿈꿨던 것은 대한독립과 동북아의 평화적인 공동발전이었다. 최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망으로 동북아의 정세가 불안한 시점에 안중근 의사의 뜻을 새롭게 되새기는 것은 한반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하얼빈역 귀빈 대합실앞 플랫홈에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점과 이토가 총을 맞은 지점이 대리석 바닥에 표시가 돼 있다. 또 중국동포들이 세운 조선민족예술관(朝鮮民族藝術館) 건물 2층에 안중근의사기념관(安重根義士記念館)이 있어서 한국인 관광객들이 반드시 찾는 교육현장이 되고 있다.
 

200평 규모의 이곳에는 실물 크기로 만든 안 의사의 동상과 함께 하얼빈에서의 의거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돼 있으며 저격 장면이 모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또 뤼순(旅順) 감옥에서 남긴 유묵(遺墨)과 유언 내용, 각종 기록들이 전시돼 있다. 안 의사가 거사를 치르기전 33살의 동지였던 우덕순(禹德淳)과 함께 묵었던 지점과 거사를 위해 사전회의를 한 하얼빈 공원(현 자오린궁위안,兆麟公園)도 그 자리에 여전히 남아있다. 거사를 위해 사전 답사를 다녀온 차이자거우(蔡家溝) 기차역도 하얼빈에서 창춘(長春)방향으로 84㎞ 떨어진 지린성 푸위셴(吉林省扶餘縣)에 남아 있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 들어간 경로 … 우연히 맺은 하얼빈과의 첫 인연

안중근 의사는 우리나라의 항일 독립사에서 가장 굵고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윤봉길 의사와 함께 젊은 목숨을 바친 애국 영웅이다. 안 의사가 이역만리 떨어진 머나먼 만주땅 하얼빈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지극히 우연이다. 의병투쟁을 하기 위해 한반도를 떠나 2년여 동안 망명지인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했던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중순 민족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당시 하얼빈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쑤이펀허(綏芬河)를 거쳐 지나가는 철로밖에 길이 없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까지는 778㎞로 기차로 36시간 정도 걸렸으며, 안 의사는 우덕순, 유동하(劉東夏)와 함께 생전 처음으로 하얼빈에 발을 밟게 된다. 안 의사는 이전에 중국 땅 산둥성 칭다오(山東省 靑島), 웨이하이(威海)와 상하이(上海), 옌볜(延邊)에 간 적은 있지만 하얼빈은 처음이었다.

요즘에는 블라디보스토크와 하얼빈 사이에 비행기, 버스와 철도편이 모두 있을 정도로 교통이 편리하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동청철도(東淸鐵道)의 개통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난 철도가 유일한 길이었다.

안 의사는 동지 우덕순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할 방책을 비밀리에 약속한 다음 각각 권총을 휴대하고 10월 21일 오전 8시50분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저녁 9시25분에 쑤이펀허에 도착하여 세관의 검사를 무사히 통과했다. 당시 18살이던 유동하가 거사에 가담한 것도 우연이다. 쑤이펀허에서 세관통과를 위해 한 시간 9분이나 정차를 해서 안중근은 역 앞에서 병원을 차리고 있는 조선인 한의사 유경집(劉敬緝)을 찾아가 러시아 통역 한 사람을 부탁한다. 유경집은 마침 약재를 구하는 심부름을 위해 아들 유동하를 하얼빈에 보내려던 참이었고 이전부터 안 의사를 따르고 항일의지가 높던 유동하가 가세하게 된다. 안 의사 일행은 쑤이펀허에서 표 3장을 사서 이튿날인 22일 저녁 9시15분에 하얼빈역에 도착한다.
 

요즘에도 육로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갈 경우 우수리스크를 거쳐 쑤이펀허 세관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쑤이펀허는 현재 헤이룽장성 내의 변경도시로 러시아와의 최대 국경무역 도시로 유명하다. 이곳은 시내에 러시아어로 된 간판이 즐비할 정도로 러시아와 교류가 많은 곳이다.

하얼빈에서 보낸 11일 동안의 행적 …곳곳에 안중근 의사의 숨결 그대로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 의사는 유동하의 안내로 김성백(金成白) 하얼빈 한민회(韓民會) 회장의 집을 찾아가서 묵게 된다. 김 회장은 유동하와는 사돈뻘로 유동하의 두 살 아래 유안나가 김 회장의 넷째 동생 김성기와 정혼한 사이였다. 안 의사는 거사를 치를 때까지 김 회장의 집에서 기숙을 하게 된다. 김 회장의 집은 현 주소로 다오리취(道里区) 싼린제(森林街) 28호에 있었는데 하얼빈의 명동거리격인 중앙대가(당시 中國大가)와 가깝다.

또 안 의사가 거사 뒤 뤼순(旅順) 감옥으로 이감되기 전까지 6박 7일동안 수사를 받은 지하 감옥이 있었던 일본 총영사관은 난강취 이저우제 27호(南崗區 義州街, 현 난강취 화위안제南崗區 花園街 97호, 현 화위안 초등학교花園小學 자리)에 있었으며 건물벽에 옛자리를 설명하는 표지판이 붙어있다. 당시 하얼빈의 총 인구는 5만7천여명으로 조선사람은 268명이었는데 싼린제의 서쪽 옆거리인 고려가(高麗街, 현 西8道街) 부근에 대부분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 서쪽편에 한민회가 1909년 4월에 세운 <동흥학교>(東興學校)가 있었다.

안 의사는 중앙대가에 연결된 다오리취(道里區) 훙샤제(紅霞街) 47호에 있던 동흥학교를 방문해 교원이었던 30살 김형재(金衡在)로부터 함께 거사에 직접 참가할 러시아 통역으로 36살인 조도선(曹道先)을 소개받게 된다.

안 의사가 거사를 숙의하기 위해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거닐었으며 유언으로 시신을 묻어달라고 한 하얼빈 공원(현 자오린궁위안,兆麟公園)은 싼린제에 북쪽으로 면해 있다. 안 의사는 유언에서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달라”는 말을 남겼다. 이는 무엇보다 안 의사의 김성백 한민회 회장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됐다. 당시 김 회장은 안 의사보다 한 살위인 32살로 두 살때 러시아로 이주한뒤 귀화해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 건설하청업자로서 동청철도 건설에 참여할 정도로 힘과 재력이 있었다.

김 회장은 하얼빈으로 오는 조선인들에게 거처와 직업을 알선해주고 <동흥학교> 건립 등 교육투자에도 힘쓸 정도로 동포들의 권익에 힘썼던 열정적인 인물이었다. 또 당시 러시아 관리로부터 토지를 빌려 하얼빈공원 옆에 조선인묘지를 세웠으며 안 의사를 매장함과 동시에 기부금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기념비를 세울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하얼빈주재 일본총영사관은 상부에 안 의사의 가족에게 시신을 넘겨주지 말 것을 건의했으며 안 의사의 유골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안 의사는 거사전 4일 정도를 하얼빈에서 긴박하게 보냈다. 당시의 유적지를 거닐면 안 의사의 숨결이 그대로 전해진다.

차비없어 하얼빈이 최종 거사의 장소로 …전화위복의 계기

안중근 의사는 거사를 치르는데 부족한 자금으로 곤란을 겪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오는데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어렵사리 100원(루블)을 장만한 것으로 돼 있다. 요즘 한국물가로 환산하면 250만원 정도로 추산된다. 안 의사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으로 갈 때 직통으로 가는 급행열차는 표값이 너무 비싸서 타지 못하고 돈을 절약하기 위해 우편열차를 탔다.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까지는 특별급행열차, 우편열차와 화물차 세가지가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리령까지는 안 의사와 유동하가 3등표를 같이 샀고 소리령(小里嶺, 현 우수리스크 부근)부터 쑤이펀허까지는 2명 모두 2등표를 샀다. 돈을 아껴야했음에도 쑤이펀허 세관에서 3등차는 검사가 엄하고 2등차는 검사가 관대했기 때문이다.

 

하얼빈에 도착해서도 창춘(長春,당시 관성자宽城子)으로 갈 차비가 부족해 안중근 의사는 유동하를 통해 한민회 김 회장에게서 50원을 빌리려했으나 만나지 못해 창춘행을 포기한다. 이에 따라 안 의사는 하얼빈역에서, 우덕순과 조도선은 차이자거우(蔡家溝)역에서 공동작전을 펴기로 최종 결정했다.

이토 히로부미와의 사격거리는 5m …탄두에 새겨진 십자(十字)는 원래 패인 홈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안중근 의사는 거사 전 총알에 십자가를 새겼는가?

 1972년 2월 16일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돼 김진규, 박노식, 문정숙, 최불암, 이대엽, 하명중이 열연해 제11회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은 영화 <의사 안중근>(義士 安重根)에서 안 의사역을 맡은 배우 김진규씨가 거사 전날 총탄에 칼로 십자(十字)를 새기는 장면이 아직도 필자의 기억에 남아 있다. 또 2004년 9월 상영된 유오성 주연의 <도마 안중근>에서도 주인공이 칼로 탄두에 십자 무늬를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동아일보 62년 4월 5일자 기사에도 ‘치명상 주기위해 총탄끝에 ‘십자문”(十字紋)’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그러나 중국동포 학자 서명훈씨가 2005년에 쓴 책 <안중근, 하얼빈에서 11일>(安重根在哈爾賓11天)에서는 “안중근이 사용한 탄환은 일반 탄환과는 달리 니켈 탄환끝에 열십자형으로 홈이 패여 있다”면서 “이런 탄환은 인체에 닿는 즉시 탄환의 파열을 촉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 창상을 확대시켜 치명상을 입게 한다”고 기록돼 있다.

사격 거리에 대해 이문열 작 <불멸>과 한국일보사 발행 <불멸의 민족혼 안중근>에서는 안중근 의사의 진술인 ‘열발자국쯤’(한발자국 80㎝)이란 점을 토대로 8m라고 보는데 서명훈씨는 사격 거리를 5m로 본다. 그 근거는 안 의사가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두칸반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서…”라는 표현을 썼는데 한국의 도량형 척량법상 1칸은 6자로 두칸반이면 15자(5m)라는 것이다.

또 당시 하얼빈역 플랫홈이 역사(驛舍) 벽에서 철길까지는 14.8m였으며 사진에서 나타난 러시아 병대는 역사의 벽과 일정한 사이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또 병사들은 2-3보 간격을 두고 두 줄로 서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벽에서부터는 4-5m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사열하고 있는 이토 일행과 러시아 대신들은 적어도 철길로부터 2m 안으로 들어와서 걸었고 특히 이토는 맨 안쪽(러시아 병대와 가까운 쪽)에 서 있었기 때문에 8m 거리가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현재 거사 현장인 하얼빈역 구내에는 당시 상황을 고증해 안 의사가 방아쇠를 당긴 지점과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진 지점이 대리석 바닥에 표시되어 있다.
 

거사에 성공한 뒤 안 의사는 현장의 각국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라고 세번 외쳤다. ‘코레아 우라!’는 . “대한국 만세!” “대한 만세!”로 해석해야 된다. “대한민국 만세” 혹은 “한국 만세”라는 번역은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건립됐기 때문에 부적절하다. 즉 “독립”이라는 단어는 없었고 우리말로 만세를 외치지 않았다. 그리고 거사 뒤 태극기를 꺼내 흔들었다는 장면도 기록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한발 남은 권총을 공중으로 던지고 “코레아 우라!”를 3창했다고 돼 있다.

안의사가 사용한 권총은 브라우닝식 8연발 단총이었고 7발을 쏘고 1발은 격발하지 않고 남겨두었다. 박은식 저 <불멸의 민족혼 안중근>과 영화 등에서는 6발을 쏜 것으로 돼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이토 히로부미가 가슴, 옆구리, 복부에 3발을 정확하게 맞았으며 나머지 3발은 하얼빈주재 일본총영사의 오른팔, 이토 히로부미 수행비서관의 복부, 남만(南滿)철도주식회사 이사의 왼쪽 다리관절을 맞춰 부상을 입혔다. 또 한 발은 남만철도주식회사 총재는 탄알이 외투를 뚫고 오른쪽 바지가랑이를 관통했으나 부상은 입지 않았다. 안 의사는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기 때문에 히로부미로 확신되는 인물에게 세발을 명중시킨뒤 대상을 오인했을 경우를 감안해 총구를 부근의 일본인만을 겨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토 히로부미가 타고온 특별열차도 당시 만주지역 철도를 관장하는 중동(中東)철도총국이 이토를 영접하기 위해 하얼빈에서 창춘까지 특별히 보낸 것으로 이 특별열차는 기관차와 3개의 객차로 이루어진 길이가 짧은 열차로 일반인들이 탑승할 수 없었다.

최근 안 의사의 거사를 소재로 한 뮤지컬 <영웅>이 높은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안 의사의 삶 자체가 그만큼 극적이었던 것을 반영한다. 영화 등 공연이 더욱 극적인 효과를 살리기 위해 일부 사실을 각색은 할 수 있겠지만 출판물과 자료 등 기록물은 보다 철저한 고증이 필요할 것으로 지적된다.

곳곳에 남긴 ‘기록의 힘’  …단지(斷指)한 손바닥 도장은 가장 강렬한 인상

안 의사가 남긴 기록들은 한글자 한구절이 모두 뜨거운 애국심에서 우러난 결정체로 가슴을 울린다. 5개월간 뤼순 감옥에서 작성한 <동양평화론>, <안응칠 전기>와 유묵(遺墨)들은 안 의사의 애국 정신과 정치외교 철학과 세계관을 아낌없이 반영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해조신문>(海朝新聞,이후 <대동공보>大東公報)에 ‘인심 결합론’이란 문장을 발표했다.

집은 부모와 처자에 의해서 유지되고 나라는 국민 상하의 단결에 의해서 보존되는 것이어늘 슬프다. 우리나라는 오늘날 이같이 참담한 경지에 빠졌으니 그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화합하지 못한 것이 제일 큰 원인인 것이다……. 조국이 침략자들에게 굴욕을 당하고, 동포들이 피 흘리고, 조상들의 백골마저 깨뜨리고 있으니 “불화” 두자를 버리고 “결합” 두자를 굳게 지켜 나가야한다……. 젊은이들은 죽기를 결심하고 국권회복을 위하여 싸워야 한다. <출처:’인심 결합론’에서 발췌>

 안 의사는 거사 직전 솟아오르는 울분을 참을 길 없어 비장한 심정을 담은 “장부가”(丈夫歌)를 한글과 한자로 남긴다.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丈夫處世兮 其志大矣
때가 영웅을 지음이여 영웅이 때를 지으리로다.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천하를 응시함이여 어느 날에 업을 이룰고.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동풍이 점점 참이여 장사의 의기가 뜨겁도다. 東風漸寒兮 壯士義烈
분개히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로다. 憤慨一去兮 必成目的
쥐 같은 도적 이등이여 어찌 즐겨 목숨을 비길고. 鼠竊伊藤兮 豈肯比命
어찌 이에 이를 줄을 알았으리요 일은 이미 돌이킬 수 없도다. 豈度至此兮 事勢固然
동포 동포여 속히 대업을 이룰지어다.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만세 만세여 대한독립이도다.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만세 만세여 대한동포이도다. 萬歲萬萬歲 大韓同胞

이에 우덕순은 <의거가>(義擧歌)로 화답했다.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글과 말로 적극적인 법정투쟁을 벌였다. 뤼순 수감 3일만인 1909년 11월 6일 <한국인 안응칠의 소회> <이토 히로부미 죄악 15조>를 제출했다. 또 3월 10일 두 동생과 홍석구 신부(프랑스 신부 빌헬름)를 만난 자리에서 <동포에게 고함> <최후의 유언>을 남겼다. 이 글은 순국직전인 3월 25일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다. 안 의사는 어머님과 아내에게도 각각 서신을 보내 당부의 말을 남겼다.
 

또한 뤼순 감옥에서 남긴 유묵중 ‘일일부독서구중생형극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힌다), 국가안위노심초사(國家安危勞心焦思,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견리사의견위수명(見利思義見危授命), 백일막허도청춘부재래(白日莫虛渡靑春不在來,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는다) 등 애국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으로 구성돼 명문집으로도 손색이 없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단지동맹을 체결한 뒤에는 <단지동맹의 취지문>을 작성했다. 단지동맹 12인의 선혈을 모아 안 의사가 태극무늬를 중심으로 혈서한 ‘大韓獨立’(대한독립) 네 글자가 적힌 사진도 남아있다. 안 의사는 어릴 때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필체가 힘과 기상이 넘친 달필이었다. 붓 글씨뿐 아니라 펜글씨도 잘 썼다.

안 의사는 또 수많은 사진도 남겼다. 안 의사는 동지 우덕순,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한 다음날인 1909년 10월 22일에는 시내상황도 알아보고 거리도 익힐 겸 외출한 김에 이발소에서 단정하게 머리를 깎고 중국인 상점에서 외투를 사 입었다. 3명은 다음날인 23일에는 하얼빈 공원에서 의거방안을 논의한 뒤 공원 남문밖 사진관에서 기념촬영을 했으며, 이때 찍은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한 멋스러운 안 의사의 모습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이외에 검거된 뒤 일본 총영사관에서 조사받을 때 쇠사슬에 묶인 사진, 뤼순으로 압송될 때 발목과 몸이 쇠사슬에 묶인 장면, 공판 사진, 사형판결뒤 집행전 사진과 최후의 유언 장면, 어머님이 지어보낸 한복을 입고 순국을 기다리는 사진 등이 남아 있다.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것은 대한독립을 맹세하며 단지(斷指)한 손바닥 도장이다. 안 의사는 뤼순 감옥에서 일본인 간수들이 유묵을 부탁할 때 낙관대신 단지한 왼쪽 손바닥 도장을 찍어 주었다. 검은 색 먹으로 한지에 선명하게 찍힌 손바닥 도장은 보는 순간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다. 100여년전 안 의사가 남긴 손바닥 도장은 가슴속 붉은 애국심이 먹물로 형상화 된 것으로 요즘의 연예인들이 찍어내는 핸드 프린팅과는 차원이 다르다.

안 의사의 이러한 기록들은 거사에 대한 소신과 의지가 확고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안 의사가 남긴 위대한 기록들은 우리들에게 두고두고 되새길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북한도 안중근 의사 높게 평가 …중국, 북한과 안 의사 유골 찾기 등 공동노력 필요

북한도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영화를 제작했을 정도로 안 의사를 높게 평가한다.

김정일 위원장도 1979년 2부작 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영화를 만든 바 있다. 이 영화는 1980년대 중국에서 안중근 열풍을 일으킨 것으로 전해진다. 또 이 영화는 지난해 8월 김 위원장의 하얼빈 방문때를 맞춰 북한 조선중앙TV에서 재방영되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2010년 8월 김정은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함께 동북3성의 항일혁명유적지 답사를 위해 하얼빈을 방문했다.
 

또한 북한에서는 고 김일성 주석이 1928년 1월에 안 의사의 거사를 다룬 혁명연극을 직접 창작해 만주 지린(吉林)시와 두만강 지역에서 공연한 것으로 선전되고 있다. 김 주석은 전기인 <세기와 더불어>에서 “외할아버지는 안중근과 같은 인물이 한명만 나와도 영광이라고 하면서 나더러 공부를 열심히 하여 훌륭한 애국자가 되라고 하였다”면서 “나는 안중근과 같은 유명한 열사는 못 돼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애국자가 되겠다고 대답했다”라고 적은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에는 남포시 남포공원에 ‘안중근선생기념비’가 있으며 해주역사박물관에도 안 의사의 사적이 보관돼 있다.

안 의사의 거사는 중국내 항일투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는 1963년 6월 담화에서 “갑오중일전쟁후 금세기초에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면서 “(중조) 두 나라 인민의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공동투쟁은 이때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회고했다. 중국의 국부로 일컬어지는 쑨원(孫文)도 제사를 통해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쳤다”고 거사를 칭송했다. 또 중국동포들의 오페라 ‘안중근’ 등 공연과 토론회, 추모회 및 기념활동이 해마다 열리고 있다.안 의사는 중국,북한과 한국이 모두 항일열사로 존중하는 인물이다.
 

안 의사의 <동양평화론> 속에는 한국과 중국, 일본이 서로의 주권을 인정하고 대등한 관계에서 상호협력 속에 공동발전해야 한다고 뜻이 담겨져 있다. 이는 남북이 분단된 현재의 한반도 상황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남북분단을 극복하고 동북아의 공동발전을 추구하는 열쇠를 찾는 원칙적인 이론으로 삼을 수 있다는 판단이다.

이와 함께 그간 여러 시도에도 성과가 없었지만 한국 정부는 중국 정부와의 협력아래 뤼순에 있는 안중근 의사의 유골을 찾으려는 노력을 더욱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안 의사의 유언을 지키는 떳떳한 후손이 될 자격이 있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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