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오늘은 인권센터 건립 후원을 위해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가 페이스북에 올린 ‘천리길 일기’를 연재합니다. 인권센터는 최저 생계비도 받지 못하고 활동하는 인권단체들을 위해 최소한의 활동 공간을 지원하자는 취지에서 건립되는 국내 최초의 종합인권상담소로서, 박 이사는 오는 12월 준공을 목표로 10억 원의 후원금을 모금하고 있습니다. ‘천리길 일기’는 그가 9일부터 23일까지 전국을 돌면서 현장의 인권 실태를 기록한 것입니다.

13. 2011년 10월21일 모란공원, 남영동 대공분실, 재능교육 농성 현장

아침 6시 다 돼서 일어나 부랴부랴 사진을 페북에 올리고, 천리길 일기를 급히 썼다. 이것저것 가릴 상황이 아니었다. 오늘 오전 11시에 있을 이소선 어머님의 49재에서 추도사를 맡았기 때문이다. 전태일 재단에서 추도사를 다 제치고 전태일 형님의 친구인 최종인 씨와 나, 이렇게 둘만 배치했다. 1시간 만에 추도사를 쓰고 짐을 꾸려 후배 집을 나선 것은 이미 열 시가 후딱 넘은 시간이었다. 후배 아프트가 모란공원에 붙어 있어서 다행이다.

모란공원 민주열사묘역 앞에 안내판이 새 단장을 했다. 아마도 백 명도 넘는 이들이 이곳에 묻혀 있다. 천리길 ‘덤앤더머’ 팀원들과 추모비 앞에서 묵념, 추모비는 곧은 소나무를 그대로 활용해서 화강암과 철로 만들었다. 철 부조는 땅에 누운 이를 그렸다. 홍성담의 작품이다. 비문은 서해성이 썼고, 글씨는 박용길 장로님이 쓰셨다. 비문 제목 글씨는 신영복 선생 것이고.

모란공원만 제대로 둘러봐도 우리나라의 70년대 이후 현대사를 이해하게 된다. 무덤들과 비문들이 그걸 말해준다. 사진 찍는 이선일이 “너무 나이가 어려. 19살도 있고, 20대가 대부분이야”라고 말한다. 그랬다. 그 시절에 분신 등의 자결로, 또는 공권력에 타살돼 죽은 이들은 대체로 젊은이들이었다. 1990년대 넘어서는 진보운동 진영의 인사들도 많이 묻혔지만 말이다. 진보진영의 운동가들이 사연도 눈물겹다. 고문 후유증, 과로사, 한참 나이에 암 등에 걸려서 투병하다 죽은 이들이 많다. 나와 인연을 맺었던 이들도 상당수다.

붉게 피어나는 용산참사 열사들의 얼굴들

   
▲ 마석 모란공원에 있는 용산 참사 희생자들의 부조 조각상 모습. 박래군은 "2009년 1월 20일 불길에서 죽어갔고, 355일 냉동고에 갇혀 있던 용산참사 다섯 열사들. 그들의 부활도를 철판에 부조한 작품이다. 자연스레 붉은 녹이 슬어 날이 갈수록 생생해진다"고 밝혔다. ⓒ박래군
 
용산참사 다섯 열사들의 묘부터 들렀다. 2년 전 이맘때 나는 순천향병원 영안실에서 탈출해 명동성당 영안실에 수배자의 신분으로 갇혀 있었다. 그해 12월말에 정부 측과 극적인 협상 타결을 하고, 용산참사 355일 만에 장례를 지냈다. 다섯 열사 묘 뒤에 새긴 철부조가 붉게 녹이 슬어 올라왔다. 날이 갈수록 더욱 붉어져 우리의 망각을 규탄할 것이다. 진상규명이 되고, 책임자 처벌을 이룰 때까지, 그 부조는 그렇게 더욱 붉어지리라.

시간이 없어서 묘들을 다 둘러보지 못한 채 이소선 어머님 49재에 참석하러 갔다. 전태일 형님의 뒤에 자리 잡은 어머님의 산소. 좋은 자리다. 많이 홍보가 안 되었던 것 같은데도, 많은 분들이 참석했다. 양대 노총의 간부들만이 아니라 전태일과 인연 있는 사람들, 어머님과 인연 있는 이들이 2백 명도 넘게 모였다. 어머님의 묘비에는 환한 웃음의 평소 모습의 사진을 그래도 박아 넣었다. 묘비 뒷면에는 어머님이 말씀이 새겨져 있었다.

이소선 어머님 추도사를 읽다 울어버리고

   
▲ 마석 모란공원에서 열린 이소선 여사 49재 모습. 박래군은 "이소선 어머님 49재를 마치고 참석자들이 기념 촬영을 했다. 어머님과의 깊은 인연을 가졌던 분들이다. 전태일의 친구와 청계피복노동조합원, 유가협의 어머님, 아버님들, 그리고 양대 노총의 간부들, 그리고도 많은 분들이 함께 했다"고 밝혔다. ⓒ박래군
 
최종인 선배의 뒤를 이어 가수 박준이 추모가를 부르러 나왔는데, 그는 직접 노래하지 않고 어머님이 즐겨 불렀다는 노래를 틀어준다. 누구의 어떤 노래인지 몰라도 그 노래가 가슴을 저민다. 노래 분위기에 너무 취했던 탓일까. 추도사를 낭독하는데 자꾸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어 왔다. 끝내 다 읽지도 못하고 중단했다가 좀 진정한 뒤에 추도사를 읽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셨던 9월 3일은 제주 강정마을로 평화비행기가 출발하는 날이었다. 아침에 짐을 꾸려놓고 집을 나서기 전에 짬이 나서 페북을 들여다보니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얘기가 소식이 있는데 확인해 달라고 했다. 부랴부랴 알아보니 정말 어머님이 돌아가셨다. 김포공항에서 평화비행기를 타고 가는 이들을 배웅하고 그 길로 서울대병원으로 달려갔다. 그로부터 5일장을 치루는 동안 나는 어머님을 제대로 추모할 수 없었다. 당장의 장례 준비에 바빴고, 어머님의 소박한 한평생을 장례에 담아낼 궁리에 골몰했기 때문이다. 이제야 어머님의 죽음에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던가 보다.

점심까지 얻어먹고 마석을 출발한 시각은 오후 1시 반. 남영동 대공분실 앞에 올 때까지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은 육중한 문이 굳게 닫혔다. 경찰의 날이라고 모두 비운 탓이다. 초인종을 눌러도 대답이 없었는데, 마침 떡을 배달하는 택배 아저씨가 안에 전화를 하자 사람이 나왔다. 그 덕분에 우리 일행도 같이 들어갔다. 담당자가 나온 뒤에 우리는 안으로 대공분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곳에서 박종철이 죽었다.

   
▲ 이소선 여사 비문. 박래군은 "우리가 새겨 들어야 할 이소선 어머님의 말씀을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로 새겨 비문에 넣었다. 평생 어머님은 단결을 강조하셨다. 어머님은 저 세상에서도 '하나가 되라'고 외치실 것 같다"고 밝혔다. ⓒ박래군
 
박종철기념사업회 김학규 사무국장의 안내로 뒷문으로 들어가 나선형 계단을 올랐다.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왔던 이들은 뒷문을 통해 나선형 계단을 올랐을 것이다. 몇 층인지 모르게 만들어진 철계단은 한 걸음 한 걸음 소름 끼치게 쇳소리를 낸다. 혼자 끌려와 수갑을 차고 이 계단을 올랐을 이들이 심정을 생각한다. 어디로 끌려가는지, 그들은 분명 눈이 가려졌을 것이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5층 조사실은 박종철이 죽은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다른 방은 1990년대 개조됐다고 했다. 방에 들어서니 방 안 쪽에 보통 욕조의 반밖에 안 되는 욕조가 있다. 거기에 물을 채우고 물고문을 가했다. 고문을 당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욕조에 물 받는 소리만 들어도 고통스러워 한다. 겨우 두 평이 될까 하는 이곳,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온 이곳, 밖으로는 나갈 수 없고, 시간조차 알 수 없었던 이곳에서 3개조로 나뉘어 24시간 고문을 가했던 이들을 혼자 상대했을 박종철. 그 좁은 방 안에서 야만스러운 고문이 가해졌던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는데.

이 남영동 대공분실은 1976년에 세워져 이근안이 김근태 전 의원을 고문했고, 조작간첩 사건의 함주명 씨가 이곳에서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했고, 박종철이 고문치사를 당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남산 안기부와 보안사 서빙고호텔과 더불어 독재정권 시기 공포이 대명사였던 곳이다. 그나마 안기부 터는 내부 시설이 철거되었고, 보안사 서빙고호텔은 건물 전체가 철거된 것에 비하면 이만큼이라도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은 다행이다. 역사의 현장은 원형 그대로 보존될 때 의미가 있다.

고문을 위해 특수하게 지어진 건축물

   
▲ 남영동 대공분실 모습. ⓒ박래군
 
이 건물을 설계한 이는 현대 건축의 대가라는 김수근 건축가다. 그는 남산 자유센터, 미 대사관, 대학로 아르코 미술관, 경동교회 등 유명한 건축물을 남겼는데, 전문가들은 남영동 대공분실을 대가의 졸작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이런 평가보다 이 건물이 어떻게 쓰일지를 알고 설계했다면, 그는 인권유린의 큰 범죄에 동조한 것이다. 고문에 쓰일 특수한 건축물을 짓는데 협조한 것은 고문과정에 협조하는 의사와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이 건물은 2005년 10월 4일, 당시 허준영 경찰청장이 경찰 인권보호센터로 개칭하여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인권보호에 앞장서는 경찰이 되겠다는 다짐을 한 것이지만, 곧바로 경찰은 여의도 농민시위에 참가한 두 명의 농민을 진압과정에서 죽게 만들었다. 그 일로 허준영 청장은 옷을 벗었다. 당시 이 건물의 역사적 상징성을 살리기 위해 시민들이 운영하는 인권보호센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끝내 거부하고 자신들이 운영했다.

그러니 경찰의 날이라고 문을 닫아놓는 상황이 나오는 것이리라. 시민들의 발길은 끊기고, 기억되어야 할 인권의 현장은 잊혀 가고 있다. 안상수라는 자만이 왜곡된 기억을 유포하고 있다. 그는 분명 관계기관대책회의에 참가해 박종철의 죽음을 은폐하는데 일조했음에도, 자신이 그 시절에 진상을 규명하는데 기여한 것처럼 말한다. 너무도 뻔뻔한 작태다.

재능교육 농성장에서 하룻밤

저녁에는 재능교육 농성장으로 향했다. 하룻밤을 농성장에서 자기로 했다. 1401일째 농성 중인 재능교육 학습지 노동자들이다. 특수고용 노동자, 하지만 노동자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채 재능교육으로 악랄한 노조 탄압을 받고 있다. 유명자 위원장을 비롯한 해고자들은 기어이 노동자의 지위를 인정받고 복직하겠다며 한뎃잠을 마다하지 않는다. 혜화동 본사 앞에서 다시 이곳, 시청 광장 옆 환구단 앞으로, 1401일을 노숙농성을 했다면, 그것은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그들이 고초가 어떠했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최근에는 환구단이 문화재이므로 문화재 관리를 위해 천막 설치는 못 한다면서 천막을 뜯어내고, 다시 천막을 칠까 봐 경찰을 24시간 배치해 놓았다.

저녁 문화제에는 쌍용자동차 김정우 지부장, 한진중공업 열사회 윤국성 회장 등 투쟁 현장의 노동자와 사노위 등의 단체 회원들이 함께 했다. 아픔이 있는 곳에 늘 함께 하는 일들이 있고, 힘든 중에도 웃음으로 그들을 맞는 노동자들이 있다. 아픔이 있는 곳에 연대하는 이들이 있어서 그들은 버틸 수 있다. 1500일 안에는 끝내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는 재능교육 해고자들. 그동안 구사대의 폭력과 경찰의 폭력에 너무도 시달렸던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농성장에는 매일 사람들이 와서 같이 자고는 한다. 그동안 하루도 같이 하지 못한 죄책감에 오늘 자기로 했다.

천리길을 응원 온 이상희 변호사와 박옥순 활동가와 삼겹살에 막걸리 한 잔하고 열 한 시부터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날이 춥지 않고, 바람도 없어서 잠자기는 딱 좋다. 길거리 노숙농성은 나도 일가견이 있는지라 이만한 잠자리라면 걱정이 없다. 맞은 편 대한문 앞에는 FTA 반대 농성 중이다. 거기 박석운 위원장은 며칠 째인지 모르지만, 단식 중이다. 내일은 거기 가 봐야겠다. 마침 비정규직노동자대회가 시청에서 있으니 시간은 충분하다.

내일(22일)은 오전 10시에 용산참사 현장에 간다. 터만 밀어놓고 지금껏 공사는 들어가지 않고 있다. 그런 다음에 시청광장으로 가서 비정규직대회에 참가하고, 부스에서 인권센터를 홍보한다. 그런 다음에는 이태원 성소수자들의 행사에 초대받았으니 거기 가서도 인사 한 마디 할 것이다. 저녁 9시 반에는 시청역사 안에 있는 장애인농성장에서 1박을 한다. 천리길의 마지막이 농성장 순례로 일정이 짜였다.

23일(일)에는 천리길을 마감한다. 오후 2시 남산 교통방송 앞에 모여 남산 걷기를 하고, 오후3시에는 한홍구 교수를 모시고 안기부 터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리고는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천릿길을 경과를 공유하고자 한다. 일요일이지만 시간 되시는 분들은 오후 2시에 남산 교통방송 앞으로 오실 것을 요청 드린다. 이제 정말 천릿길 막바지, 다시 힘을 내서 출발하자, 아자!

인권센터후원 홈페이지 http://hrfund.or.kr/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①] 10월 9일 제주도 강정마을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11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②] 10월 10일 제주 4.3평화공원, 강정마을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13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③] 10월 11일 광주 망월동, 인화학교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24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④] 10월 12일, 소록도 전북고속 천막농성장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25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경남 산청 합동 묘역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29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⑥] 원폭피해자협회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032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⑦] 강정보, 달성보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172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⑧] 부산 한진중공업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182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⑨] 상지대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228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⑩] 한국DMZ생명평화동산, 을지전망대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282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⑪] 쌍용차, 유성기업, 삼성백혈병 투쟁 현장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284

[박래군의 천리길 일기 ⑫] 민가협 목요집회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98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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