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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와 17살 처녀 허쯔전의 운명의 만남
마오와 17살 처녀 허쯔전의 운명의 만남
[하나의 불씨, 중국을 태우다/ 중 공산당 90주년, 마오를 다시 말한다] 13

앞서 마오는 징강산에서 양카이후이가 ‘혁명부부’라면, 온갖 위험과 고생을 무릅쓰고 전쟁연대에 살면서 인간한계를 시험한 2만5천리 장정을 함께 한 ‘환난(患難)부부’ 허쯔전(賀子珍)을 만났다. 1927년 10월, 마오는 징강산에 갓 들어와 위안원차이, 왕줘의 녹림당과 무장투쟁 협력방안을 협하기 위해 이들의 초청을 받고 산채에 올라갔다가 위안원차이의 소개로 허쯔전을 알게 되었다.

마오는 이날 낡고 헤진 중산복에다 붉은 목수건을 목에 매었다. 그는 비쩍 말라 키가 더욱 커 보였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머리칼은 길게 늘어졌다. 피부는 비교적 검었고 낯빛은 다소 피곤한 기색이 묻어났으나 두 눈은 형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위안원차이가 산채의 대소 두령을 소개하면서 옆에 있는 17살의 허쯔전을 마오에게 인사시켰다. 마오는 힘들고 고달픈 투쟁환경의 징강산에 이런 젊은 처녀가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우두머리 급 반열에 있어 마오는 매우 놀랐다. “융신현의 간부 허쯔전입니다.” 위안원차이가 허쯔전을 소개했다. “나는 당신의 딸이거나, 어느 동지의 가족인줄 알았습니다.”

   
마오쩌둥과 허쯔전. 사진제공='사진으로 보는 중국의 20세기' =북폴리오
 
마오가 쾌활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위안원차이는 “단지 17살 처녀로만 봐서는 안 됩니다. 지난해 공산당에 가입한 혁명 간부”라고 치켜세웠다. 허쯔전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마오는 “대단하오, 이후 우리 함께 잘 싸웁시다”라고 말했다. 마오는 징강산에 왔을 때 다리에 부상을 당해 뿌윈산(步雲山)에서 치료하다 마오핑의 빠자아오러우(八角樓)로 옮겼다. 그곳은 위안원차이의 집과 이웃해 있었다.

마오는 때때로 마오핑 강변을 산책하는 등 집을 들고날 때 위안의 집 앞을 지나게 된다. 공교롭게도 허쯔전은 위안의 부인과 아주 가까워 때때로 그의 집에서 머물기도 했었다. 그때 허쯔전은 학질에 걸려 몸이 허약했다. 어느 날 허쯔전이 위안원차이의 집 문 앞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마오가 지나가다가 보고 그에게 다가가 병세를 묻는 등 몇 마디의 말을 나눴다. 그 후 마오와 허쯔전은 한가할 때 얘기를 나누면서 무람해졌다. 마오는 허쯔전의 신상과 그의 투쟁경력을 알게 됐다. 허쯔전은 징강산 산록의 융신현에서 태어났다. 때는 바야흐로 계수나무 꽃향기가 물씬 풍기는 가을이었다.

그의 부모들은 ‘계원(桂圓)’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허쯔전은 학교에 다닐 때 이름이 너무 연약하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새로운 이름을 지었다. 착하고 진중하다는 뜻을 담은 ‘쯔전(自珍)’으로 했다가 다시 ‘쯔전(子珍)이라고 바꿨다. 허쯔전은 대혁명 당시 학교에 다닐 때 적극적인 좌파로 1925년에 공청단에 가입했다가 이듬해 공산당원이 됐다. 그녀는 당의 명령에 따라 국민당에 가입해 당을 넘나들면서 현의 당무를 봤다. 부녀부장을 맡기도 했다. 허쯔전은 이후 위안원차이가 이끄는 농민자위군에 가입해 그들과 함께 ’융신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성공 얼마 뒤 후난과 장시의 국민당 군이 연합해 공격해 왔을 때 허쯔전은 적위대를 이끌고 융신현 남문성에서 적 1개 특무대대를 격파해 100여 정의 총을 노획했다. 그러나 국민당 군이 맹공을 퍼붓고, 백색테러가 횡행해 위안원차이 등 폭동부대가 징강산으로 들어갈 때 허쯔전도 따라갔다. 마오는 허쯔전의 용감한 혁명정신에 감탄하면서 그녀에게 호감을 갖게 됐다. 1928년 6월, 홍군이 제3차 융신을 공격했을 때 허쯔전은 공작대와 함께 융신현 시샹(西鄕) 탕볜(塘邊)촌에 와 토호들의 토지를 몰수해 분배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후 마오가 전사들을 이끌고 이곳에 왔다가 우연히 허쯔전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혁명근거지를 막 건립해 어떻게 합리적으로 토지분배를 하야할 지 통일된 규정이 없었다. 마오는 통일적인 토지법을 만들기 위해 직접 융신현의 여러 촌락을 돌아다니며 조사연구를 하는 한편, 허쯔전과 공작대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등 허쯔전의 실무적 도움을 많이 받았다.

허쯔전은 이때 마오와 일하면서 마오로부터 조사연구의 방식과 방법 등 체계적인 공부를 배워 자신의 능력을 계발시켰다. 마오와 허쯔전은 ‘탕볜사건’ 뒤 미묘한 관계로 발전했다. 어느 날 한 방의 총소리가 산림의 정적을 깨트렸다. 지주 보안대들이 탕볜을 습격했다. 마오를 잡아 장제스한테 상을 받자는 소리가 들렸다. 이때 마오와 허쯔전은 조사 자료를 분석하고 있었다.

허쯔전은 부근에 주둔해 있던 홍군 중대와 마오의 경호원들이 군중작업을 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갔기 때문에 바짝 긴장했다. 허쯔전은 어찌 해야 할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마오를 쳐다보았다. 마오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천천히 담배를 꺼내더니 불을 붙였다. 냉철하게 사태를 파악한 마오는 적의 자세한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싸우는 것은 모험이라고 판단했다. 마오는 주민들에게 연락해 빨리 철수 할 것을 지시했다. 지주 보안대들은 마을에 쳐들어왔지만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어 마을 사람들이 미리 준비한 것으로 알고 이것저것 약탈한 물건을 갖고 사라졌다.

전화(戰火)가 어지러이 날리는 시절에 비록 평범한 사건이었지만 허쯔전은 마오가 추호도 놀라지 않은 채 태연자약 하며 과단성 있게 일처리를 하는 혁명가적 기질을 보고 더욱 앙모하게 되었다. 이때의 허쯔전은 몸매가 날씬한데다 청초하고 아름다운 얼굴에 큰 눈망울이 반짝거려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융신의 한 떨기 꽃이라는 ’일지화(一枝花)’의 이름을 얻었다.

어느 날 허쯔전이 마오의 방에 들어가려다 마오가 책상에 않아 무언가를 쓰고 있어 조용히 문지방에 앉아 다정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 채 마오는 붓을 멈추고 깊은 생각에 젖어 있었다. 인기척을 느껴 머리를 돌리는 순간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허쯔전의 눈빛과 마주쳤다. 찰나의 ‘사랑의 바다’를 거닐던 마오는 허쯔전은 젊고, 질박하고, 순정하면서도 열정적인 마음을 갖고 있다고 여겼다.

허쯔전도 곧바로 눈빛을 거두고 어쩔 줄 몰라 애꿎은 단추만 만지작거렸다. 노련한 마오가 침묵을 깼다. 마오는 급히 허쯔전을 앉게 한 뒤 짙은 후난 발음으로 “당신은 좋은 동지고, 좋은 처녀다. 나는 당신을 좋아 한다”고 다정하게 말했다. 마오는 자신이 살아 온 이력과 신상에 대해 이야기 했다. 34살이고 이미 결혼했으며, 후난의 집에 부인과 세 아이가 있다고 했다. 마오는 집안 얘기를 할 때 침통해 했다. 멀리 떨어져 연락이 끊긴지 오래 돼 그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른다고 했다.

마오는 또 부인 양카이후이가 후난의 반동분자들에게 잡혀갔다고 들었는데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도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고 했다. 그날 그들은 오랜 동안 이야기를 했고, 의기가 투합했다. 허쯔전은 마오의 솔직담백한 얘기에 감동했다. 서로 다른 이력과 서로 다른 신상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공명을 일으켰다. 서로 애모(愛慕)하는 마음은 부지불식간에 한 덩어리가 되었다. 허쯔전은 마오가 일이 과중해 생활을 스스로 살피지 못한다고 여겼다. 그는 마오를 존경하고 동정하면서도 더욱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마오와 허쯔전은 날이 갈수록 서로 마음이 통하고, 정이 깊이 들면서 환란 중에 사랑이 싹터 마침내 결혼하기에 이르렀다. (주석 54)

결혼식은 간단하게 치렀다. 마오나이 34살, 허쯔전 18살 이었다. 가장 기념할만한 선물은 허쯔전이 등잔불 밑에서 정성스럽게 한땀 한땀 수 놓은 마오가 어깨에 멜 수 있는 서류가방이었다. 이 수제품은 허쯔전의 혁명에 대한 열정과 마오에 대한 사랑, 그리고 좋은 인연을 축원하는 결정체였다. 훗날 마오는 이 서류가방을 행군을 하거나 작전을 할 때 항상 어깨에 메고 다녔다. 허쯔전은 결혼 후 마오의 손발이 되어 징강산에서 구하기 힘든 신문들을 스크랩하고 마오가 글을 쓰거나 서류를 작성할 때 필요로 하는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는 일을 도맡아 했다.

마오는 1931년 깐난(竷南)회의에서 잘못된 노선을 이끌었다는 비판을 받고 소비에트중앙국 대리 서기직을 박탈당하고, 이듬해 닝뚜(寧都)회의에서 홍1방면군 총 정치위원 직을 해직 당해 묵묵부답의 우울한 세월을 보냈다. 허쯔전은 이때 막 아이를 낳아 허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마오가 심기일전하도록 온갖 정성을 다하였다. 줜이(遵義)회의 이후 마오가 전당전군의 주요 영도자가 되면서 일이 크게 늘어났다.
 
당시 허쯔전은 비서가 아니었지만 마오를 돕기 위해 전보를 필사하거나 서류를 정리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어떤 때는 자신의 무릎을 책상 삼아 일을 하는 경우도 흔했다. 허쯔전은 장정을 하면서 어린 아들인 마오마오(毛毛/실종됨)를 떼어 놓고 갈 수밖에 없었고, 장정 중 낳은 아이(실종됨)는 현지인에 맡길 수밖에 없는 등 어머니로서 험난한 삶을 살았다. 그는 5명의 자녀를 낳았으나 죽고 실종돼 장정이 끝난 뒤 산베이(陝北)에서 낳은 쟈오쟈오(嬌嬌/훗날 마오가 리민<李敏>으로 개명함)만 슬하에 뒀다. 허쯔전은 비교적 평온한 생활이 보장된 옌안에서 마오와 ‘환난 10년의 부부생활’을 청산했다. 허쯔전이 마오와 통역비서간의 불륜을 들어 당에 조사를 요구한 사건 때문이었다.

54)마오쩌둥생평전기록(상) 가연 편저 베이징; 중앙문헌출판사(2009년 10월 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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