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시대편- 7. 동아·조선 폐간과 신문자산 보존
식민지시대편- 7. 동아·조선 폐간과 신문자산 보존
친일논조 유지하다 자진폐간 보상금·매각으로 이득 챙겨
동아,`4백여`주주에겐`환불안해`…`조선,`일제찬양`잡지등`발행




당시 민간지 폐간을 주도한 경무국장의 담화내용(매일신보 40.8.11)에 따르면 “신문통제를 결정해 1939년 이후 양사(동아·조선)와 협의하자 조선일보사는 쾌히 시국의 대세를 양해하고 나아가 국책에 순응한다는 태도로 나오고 동아일보와 동시 폐간을 희망하는 허락의 뜻을 나타냈는데…”라고 돼 있어 두 신문사가 순순히 총독부의 뜻에 응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1940년 8월 10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총독부의 폐간강요에 못이겨 폐간했다. 이로인해 조선어 신문은 해방되기까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만 존재하게 됐다.

일제는 왜 이 두 신문을 폐간시켰을까? 두 신문이 일제의 식민통치를 위협할 만큼 저항적인 민족언론이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버금갈 정도로 친일 매국배족적이었다. 두 신문은 중일전쟁 이후 노골적으로 총독부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폐간당한 것이다.

그런점에서 총독부가 두신문을 폐간시킨 이유는 명확해진다. 조선어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어 신문을 없애려고 했다는 점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의 폐간은 1937년 7월 중일전쟁이후 취해진 일련의 언론기관통제 조치에 따른 것이었다. 1938년 5월에 공포된 국가총동원법(일본본국에서는 4월 1일)에 따라 언론 지도, 물자 절약의 차원에서 신문에 대한 통제가 시작돼 8월부터는 신문용지, 잉크, 기타 자재의 공급이 제한됐다.

일본본국에서는 이미 1938년 가을부터 각 현별로 신문통폐합을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은 인구 10만명 도시에 하나의 신문만 남긴다는 목표를 세우고 1현 1지의 원칙아래 통폐합을 추진한 결과 1935년경 전국 1천2백개 일간지를 43년에는 55개사로 줄였다.

이같은 신문통폐합은 조선의 경우 1도 1사의 원칙아래 추진됐다. 일인발행의 일어신문에도 적용돼 40년 1월부터 전국 각지의 일어신문을 통폐합했으며 조선어 신문에 대해선 매일신보 하나만을 남긴다는 방침을 세웠다.

당시 이를 주도한 경무국장의 담화내용(매일신보 40.8.11)에 따르면 “신문통제를 결정해 1939년 이후 양사와 협의하자 조선일보사는 쾌히 시국의 대세를 양해하고 나아가 국책에 순응한다는 태도로 나오고 동아일보와 동시 폐간을 희망하는 허락의 뜻을 나타냈는데…”라고 돼 있어 두신문사가 순순히 총독부의 뜻에 응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매일신문은 두 신문에 보상금을 지급했다. 이는 양 신문의 영업권을 매일신보가 계승한다는 의미로 폐간후 그 독자와 광고시장이 자연히 매일신보에게 넘어와 수입이 많아질 것이므로 그 ‘수익세’ 또는 ‘취득세’의 성격으로 지불한 것이다.

한편에서는 총독부가 폐간된 두신문사에 지급한 것을 매일신보가 지급한 양 위장했던 것이지 재정이 좋지 못한 매일신보가 자발적으로 지불할 리가 없다는 해석도 하고 있다. 어쨌든 그후 매일신보의 40년과 41년 영업보고서를 비교해 보면 구독료 수입은 약 1.7배, 광고료 수입은 약 1.8배로 늘어났다.

매일신보가 지급한 보상금의 규모는 조선일보에 20만원, 동아일보에 15만원규모였다. 보상금 규모는 사원들의 1년간 봉급액수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폐간당시 조선일보 사원들의 1년치 봉급을 모두 합하면 20만원이었다(당시 가미가제 전투기 한대값이 10만원이었다).

당시 조선일보는 매일신보의 보상금으로 2백70명의 사원들에게 1년간의 생활비를 지급했고, 여기에 회사측에서 5만원을 보태어 3년이상 근무한 사원에게는 따로 법정퇴직금을 지불했다.

2백15명의 사원이 근무했던 동아일보는 매일신보로부터 받은 15만원에다 회사가 다시 15만원을 더 보태어 30만원을 만들어 모든 사원에게 약 2년간의 봉급에 해당하는 퇴직금을 지불했다.

시설물의 경우 동아일보는 1936년에 구입한 고속 윤전기를 오사카의 일간공업신문에 16만원을 받고 팔았다. 마리노니식 윤전기 등 기타 기재는 총독부가 인수하는 대신 시설인수비조로 51만원을 지급받았다.

반면 조선일보는 총독부로부터 시설인수대금으로 80만원을 받았다. 당시 조선은 마리노니식 윤전기 2대, 초고속 윤전기 1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1대는 이미 대만으로 뜯겨 갔고 1대는 만선일보에 매각됐다. 초고속 윤전기 1대는 총독부가 인수해 경성일보사에 옮겨 설치해 놓았다.

이같은 회사청산과정에서 동아일보는 보상금 15만원, 고속윤전기 매각대금 16만원, 그리고 총독부 시설인수대금 51만원을 받아 총 82만원을 벌었다. 이중 직원 퇴직금 30만원을 빼고도 52만원이 남은 셈이다. 이 금액은 동아일보 자기자본금을 훨씬 초과하는 것이다.

1938년 동아일보의 총자산이 47만1천6백91원(자기자본금 36만1천5백91원, 부채 11만27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보상금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보상금 52만원외에도 사옥이나 토지, 건물 등은 그대로 소유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동아일보는 보상금 52만원을 직원 퇴직금으로 21만원, 이사 및 임원 퇴직금으로 14만원, 나머지는 사용내역이 불분명한 청산비용으로 처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회사청산 당시 4백여명의 주주에게는 한푼도 환불하지 않았으며 결국 이들의 주식은 46년 11월 실효주식 무효공고로 종이조각이 돼 버렸다.

조선일보는 폐간후 1백만원의 자본금으로 육영재단법인 동방문화학원을 발족시켰다. 그러면서 40년초 따로 설립한 출판부를 유지하면서 조광 등 월간잡지와 단행본 출판사업을 계속했다. 조광은 44년말 발행을 중단하기까지 그 논조가 놀랄 정도로 친일찬양 일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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