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조선무희 ‘리진’은 실재의 인물인가, 아니면 허구의 인물인가? 소설가 신경숙과 김탁환의 소설을 통해 널리 알려진 개화기 비운의 궁녀 ‘리진(혹은 리심)’의 실재 여부가 논란이 되고 있다. 논란의 발단은 역사학자 주진오 교수(상명대·역사콘텐츠학). 주진오 교수는 최근 발표한 논문과 미디어오늘에 기고한 글 <‘파리의 조선무희’ 리진은 허구>에서 소설과 방송을 통해 소개된 비운의 궁녀 ‘리진’은 허구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리진이라는 인물은 2대 프랑스 공사였던 이폴리트 프랑뎅이 저서 ‘En Coree(코리아에서)’에 언급돼 있는 것이 알려지면서 국내에서도 관심을 모았다. 프랑뎅은 이 저서에서 리진을 궁중 무희 출신으로 전임 주한 프랑스공사와 결혼해 파리에서 살다가 다시 조선에 돌아왔다가 옛 신분으로 전락하자 자살을 택한 비운의 여인으로 묘사했다. 소설가 신경숙과 김탁환은 이를 바탕으로 각각 소설을 썼으며, KBS의 역사 다큐프로그램인 <한국사 전(傳)>은 2007년 6월 23일 ‘조선의 무희, 파리의 여인이 되다’ 편에서 리진의 행적을 추적해 방송하기도 했다.

주 교수는 그러나 ‘코리아에서’는 간접적인 경험담도 포함돼 있으며, 프랑뎅은 조선과 프랑스에서 리진을 만났다고 하지만, 조선에서 리진을 만날 기회가 없었으며, 리진과 결혼했다는 주한 대리공사 콜랭 드 플랑시는 ‘독신’이었다는 점, 외교 관례상 프랑스 공사가 고종에게 리진을 달라고 요청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 리진의 입출국 기록이 없다는 점 등을 들어 리진은 ‘코리아에서’의 공저자가 지어낸 허구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

주 교수는 리진이라는 인물이 허구의 인물인데도 엄밀한 역사적 고증 없이 유명 소설가의 작품을 통해, 특히 KBS의 다큐를 통해 리진이라는 인물이 마치 실존인물인 것처럼 대중에게 각인됐다며 역사적 소재에 대한 면밀한 고증과 역사학계의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KBS <한국사 전> ‘리진’ 편 제작 당시 책임PD(CP)를 맡았던 장영주 역사스페셜 CP가 반론을 보내왔다. 장영주 CP는 이 반론에서 프랑뎅이 자신의 친구이자 생존 인물인 플랑시 공사와 관련된 일을 거짓으로 꾸며 책까지 냈다고 볼 수 없다며 주 교수의 주장을 정면 반박했다. 장영주 CP는 또 주 교수가 곳곳에서 사실을 잘못 알고 있거나 원문을 오독했다고 지적했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고, 역사적 사실 규명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며 장 CP의 반론을 싣는다.<편집자 주>

 3년 전 방송되었던 TV프로그램에 대해 한 역사학자가 방송이 허구의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잘못 인식해 방송한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해당 프로그램은 <한국사 傳> “조선의 무희, 파리의 연인이 되다 - 리진”(2007.6.23방송) 편이다.  만약 방송이 허구의 사실을 역사적 진실로 호도했다면 이는 문제가 될 것이다. 더군다나 그 주장을 펼친 학자는 근현대사 전공자인 현직 대학 역사학과 교수이기에 그의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 형편이다. 

   
  ▲ 2007년 방송된 KBS <한국사 전(傳)-조선의 무희, 파리의 여인이 되다>(연출 김종석)편.  
 
논란이 되고 있는 이야기는 “초대 주한프랑스공사인 플랑시(Plancy)가 ‘리진(Li-Tsin)’이라는 이름의 궁중의 무희를 사랑해 그를 데리고 파리로 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으나 리진은 자살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2대 주한프랑스공사인 프랑뎅(Frandin)이 남긴 기록에 등장한다. 그런데 주진오 교수는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없으며 완전한 허구라고 주장한다. 매우 놀라운 주장이다.

제작진, 프랑뎅의 책  'En Coree'(한국에서) 사실로 간주한 이유

문제의 이야기는 1905년 파리에서 출간된 'En Coree'(한국에서)라는 책 속에 등장한다. ‘리진’에 관한 이야기는 그 책 속에 5페이지 가량 언급되어 있는데, 아쉽게도 이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다른 사료는 아직 발견되고 있지 않다. 부족한 사료를 바탕으로 이를 추적해 가는 과정을 담은 것이 <한국사 傳> 프로그램이었다. 제작팀은 한 외교관의 기록에 나타나는 이 이야기를 당연히 그의 경험에서 나온 사실로 파악했다.

의 겉표지를 넘기면 이런 구절이 있다.

“이 책에 기록된 것은 최근의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보다 앞선 것으로, 외교관이 노트해 두었던 것에 의거했는데, 이 외교관은 20년 이상을 극동을 여행한 사람이다.”

   
  ▲ 2대 공사 프랑댕(Frandin)(왼쪽),“한국에서" 표지(가운데), 초대공사 플랑시(Plancy)(오른쪽)  
 
이 책의 내용이 외교관의 기록에 의해 작성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주한 프랑스 2대공사 프랑뎅(Hippolyta frandin)이 자신의 실명을 밝힌 책에 실은 이야기를 거짓이라 단정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한다. 리진의 이야기를 꾸며서 그의 저서에 실었다면 이는 당시 심각한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파리의 외교가에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군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프랑뎅은 출판을 통해 공공연한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 근무했던 대리공사로 두 번씩 한국의 공사를 역임한 프랑스 외교관은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 밖에 없다. 프랑뎅은 이야기의 주인공에 대해 확실히 밝히고 있다.

Un jeune chargé d’affaires (il vit encore et je ne puis divulguer son nom)
‘한 젊은 대리공사(그가 살아 있기 때문에 나는 그의 이름을 공개할 수 없다.)’
‘mon collègue et ami’
‘나의 동료이자 친구’

나이는 한 살 차이지만 프랑뎅(1852-1924)과 플랑시(1853-1923)는 파리 동양어학교 동문으로 모두 중국어에 능통해 중국에서 외교관 생활을 시작한 친구이자 동료였다. 두 사람 모두 생존해 있는 상황에서 친구이며 자신의 전임자인 플랑시의 일을 허위로 기재할 이유는 전혀 없다는 것이 제작진의 판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은 실제 일어났던 일이며 정확한 사실로 언급된 것이다’라는 게 제작진의 결론이었고 취재 결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봐서 일어날 수가 없는 허구일 뿐이라는 것이 근대사 전공자인 주진오 교수의 주장이다.

주진오 교수, 프랑뎅과 플랑시 만남 없었다 추론 왜?
프랑뎅 정식 부임 전 서울에 왔다는 연구 존재

과연 그럴까? 주진오 교수의 주장을 하나하나 검증해 보자.

그의 가장 강력한 근거는 1대 공사와 2대 공사가 서로 만날 수 없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서울에서 만난 것으로 나오는 “En Coree” 역시 허구의 소설일 뿐이라는 것이다.
 
“프랑뎅이 1892년 4월 조선에 도착했을 때에는, 플랑시가 이미 1891년 6월에 일본으로 떠난 뒤였다. 따라서 두 사람은 함께 조선에 있었던 날이 전혀 없었고 따라서 그가 리진을 만났을 가능성도 전혀 없었다.” - 미디어오늘 주진오교수 기고문

이는 매우 강력한 주장이다. 실제로 1대 공사 플랑시는 1891년 6월 19일 한국을 떠났다. 그리고 2대 공사 프랑뎅은 이듬해인 1892년 4월 8일 서울에 부임했다. 10개월의 틈이 존재한다. 그러나 프랑뎅이 정식 부임 전에 이미 서울에 왔던 적이 있다면 문제는 약간 달라진다. 1890년 8월 25일 프랑뎅이 조선에 공사로 부임했다는 연구(한불관계사연표)가 있다. 또 프랑스 공사관 관련 문서인 ‘법안(法安)’에 의하면 프랑뎅이 1890년 서울에 왔다가 후에 중국과 베트남 국경확정 문제로 특파되었다고 적혀 있다.

“客歲, 本國國家簡派法大人蘭亭, 前來貴國漢京城內, 接任辦事大臣之職, 嗣復特派總理安設北圻中國界牌事務” - 구한국외교문서 1891년 6월 6일
(지난해 본국은 법란정(프랑뎅)을 파견, 귀국 한성으로 왔다. 판사대신(영사)직을 넘겨받으려 했다. 그러나 이후 다시 중국, 베트남북부 경계를 정하는 사무의 위원장으로 특파되었다.)

그래서 그는 1890년 12월 15일에 프랑스 대표로서 중국측 대표 향만영과 광서동로 국경을 확정한다. 이처럼 프랑뎅과 플랑시가 서울에서 만났을 가능성은 분명 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초대공사인 플랑시가 본국으로 떠나는 것은 한국에서가 아니라 일본에서였다. 'En Coree'의 번역본은 한국에서 두 사람이 만났다고 번역되어 있지만 원문을 잘 읽어보면 리진과 프랑뎅이 만난 장소는 '떠나는 자리'라고 되어있다. 원문에는

“Avant son départ, j’avais eu l’occasion de rencontrer, dans la maison du diplomate..”
“출발에 앞서 나는 외교관의 집에서 만날 기회를 가졌다”라고만 되어 있다.

   
  ▲ 구한국 외교문서(1881)(왼쪽), 프랑스공사관(1903)  
 
프랑뎅과 리진이 만날 수 없었다는 주장은 원문을 보지 않아서 생긴 오해일 뿐이다. 프랑뎅이 한국에 오기 전에 일본에 머물렀었고 플랑시 역시 일본에 머물고 있었다. 프랑뎅은 한국에 있으면서 일본에 온천을 가겠다고 하는 기록도 있다(1892년 프랑스외무부문서).

주진오 교수가 제시한 가장 중요한 증거가 상당부분 사실에 근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외국 공사가 고종에게 기생 달라고 할 수 없었다?
광산 채굴권과 철도 부설권도 요구하는 마당에…

주진오 교수의 또 다른 주장은 외국 공사가 고종에게 여자 기생을 달라고 할 수가 없으며 그래서 그 이야기 역시 허구라는 것이다.

“프랑스 공사가 직접 리진을 달라고 고종에게 ‘요청’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외교관의 신분으로 자국과 수교한 상대국가에게 외교상으로 큰 결례를 범하는 무례한 일이기 때문이다.” - 미디어오늘 주진오교수 기고문

과연 그럴까? 리진의 남편으로 지목되는 플랑시의 기록을 보면 1888년에는 고종에게 ‘프랑스역사’ 7권을 빌려준다. 그러다가 고종이 갖고 싶다고 하니까 그 책을 고종에게 기증하기도 하고, 1889년에는 그림책을 고종에게 바치는데 한권이 음란물이라 그 책을 빼고 바치기도 한다. 플랑시는 프랑스인 한 사람이 영남으로 가는데 그와 통역을 위해 역참의 말 2마리를 사용하게 해달라고 정부에 무리한 요청을 하기도 한다(法安 1891년 3월11일 기록).

   
  ▲ 궁중 무희(기생)(사진 왼쪽),'한국에서’에 실린 무희사진  
 
뮈텔주교의 일기(1897.4.2)를 보면 플랑시가 저녁에 고종과 비밀접견을 하고 있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는 직업학교 설립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고 고종의 자문에 대답하기도 한다. 고종은 플랑시에게 서로 협의하기 위해 자신의 시종을 보내겠다고도 한다. 그 시종에게 여자기생을 달라고 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지 않는다. 플랑시가 광산채굴권과 철도부설권도 달라고 하는 판에 장악원 소속 여자 종 하나 달라고 하는 것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더군다나 주진오 교수는 이 궁중무희들은 내명부를 위한 내연에만 출연해 외교관과 만날 기회가 없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여악이 실행되는 것은 내명부를 위한 연회뿐이었다.” - 미디어오늘 기고문

이 주장은 부분적인 사실이다. 여령(女伶)으로 불리는 장악원 기생들은 내진연에만 출연하고 외빈이 참여하는 외진연에는 무동이 춤을 추게 된다. 그러나 이는 며칠씩 소요되고, 정식 의궤까지 발행되는 대규모 정식 연회를 말하는 것이지 소규모 연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연회가 있었다. 프랑뎅은 1892년 9월 15일 궁궐외교단의 연회에서 연설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회청간(宴會請簡)이라는 기록을 보면 1891년 무렵 외교관을 초대하는 연회는 거의 매월 열렸다. 이런 연회에 장악원 기생이 동원 될 수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뮈텔주교의 일기를 보면 동학군이 전주를 점령한 시점에도 궁중에서는 기생연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왕이 전라도의 사건들로 인하여 노심초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궐에서는 기생(Ki-saing)들의 춤과 노래로 매일 밤을 보내고 있다는 소문이다.” -뮈텔일기 1884.6.4

외국 공사들을 위한 연회는 경회루에서 열리기도 하고 외부(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에서 자체로 열기도 했다. 장악원 무희들과 외교관이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주장이다. 

플랑시 평생 독신? 1882년 한차례 결혼
제작진, 독신 기록에 오히려  “En Coree” 사실로 여겨

또 대리공사가 결혼을 했다고 했으나 플랑시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기에 리진의 이야기는 허구다라고 주장한다.

“프랑뎅이 분명히 그 대리공사가 리진과 결혼을 했다고 기록했는데 분명히 콜랭 드 플랑시에 대한 공식기록에는 그가 미혼이었다고 적혀 있었다.” - 미디어오늘 주진오교수 기고문

이는 사실관계가 잘못된 주장이다. 플랑시는 1882년 한차례 결혼을 했었다. 그 후 독신으로 상황이 바뀐 것이다. 그러나 외교관으로 파견국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터부시하는 상황에서 굳이 혼인신고를 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은가? 더군다나 그는 초혼에 실패했던 상황이었기에 더욱 혼인신고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플랑시가 독신으로 있었던 기록 때문에 취재진은 오히려 “En Coree”의 기록이 사실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법적인 혼인상태가 아니기에 오히려 후에 리진을 더 쉽게 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혼인신고의 문제는 사실의 확인에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사실혼이면서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는 요즘도 많다. 취재팀이 찾아낸 독신이었다는 기록을 허구의 결정적 증거로 제시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출국 기록 없으므로 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사관 직원의 가족 누구도 기록에 없어

“그러나 그 어디에도 리진이라는 이름도, 다른 조선 여인이 프랑스로 출국했다는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 주진오교수 미디어오늘 기고문

기록이 없으므로 리진은 허구다라는 주장은 정당할까? 정말 기록을 뒤져보면 어디에도 리진의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플랑시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 49상자의 물품을 배에 실어 보냈다. 상자 개수까지 문서에 나오는데 왜 함께 데려간 리진이라는 이름이 기록에 등장하지 않을까?

   
  ▲ <공사관 가족들의 휴일 나들이> - Hippolyte Frandin 컬렉션 중  
 
그러나 이 의문은 프랑뎅이 찍은 한 장의 사진을 보면 풀리게 된다. ‘공사관 가족의 휴일 나들이’란 제목의 사진이다. 여기에는 모두 네 명의 외국인 여자와 5명의 아이들이 등장한다. 모두 공사관 직원의 가족이다. 이들 중에 어떤 이가 한국측 기록에 남아 있는가? 프랑스공사관 기록에 남아 있는가? 단 한명의 기록도 없다. 이들 외국 여인들의 출입국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 여자들은 모두 허구가 되는가? 리진의 기록이 없다고 해서 ‘허구’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한 논리의 비약이다. 

홍종우 관직기록 1898년에 나온다는 주장, 명백한 오류
  
주진오 교수의 주장 중에는 당장 입증 가능한 명백한 오류도 발견되는데 홍종우와 리진의 관계다.

“그가 리진을 프랑스에서 만났을 가능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의 관직에 대한 기록을 보아도 아관파천 이후인 1898년 1월에 가서야 다시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그 관리는 홍종우일 수 없다.” - 미디어오늘 주진오 교수 기고문

   
  ▲ 建陽元年(1896) 十月三十日 金曜 관보  
 
1893년 파리에 머물던 홍종우가 그해에 파리로 온 리진을 만날 수가 없다고 주장한다. 홍종우는 그해 7월 22일까지 파리에 있었는데 플랑시가 파리에 도착한 것은 5월 4일이었다. 3개월 동안 같은 파리에 있었다. 시간적으로 두 사람이 만날 가능성조차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곤란한 것이다.

더군다나 홍종우의 관직기록이 1898년이 되어야 다시 나타난다는 주장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1894년 홍종우는 부수찬에 임명되고 이어 헌납이 된다. 1896년에는 궁내부 외사과장을 거쳐 장례원 장례가 된다. 장례원이 바로 음악과 춤 등의 예식을 관할하는 곳이 아닌가? 명백한 기록이 있는데 왜 이를 부정하는지 의아스럽다.

남아있는 뚜렷한 사실은 구한말 한 여인이 외교관을 따라 파리에 갔다는 기록
 
주진오 교수가 주장한 내용은 모두 사실과 다르거나 확인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즉 확인할 수 없는 내용으로 존재하는 문헌이 엉터리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현재 가장 분명한 것은 구한말 한 여인이 외교관을 따라 파리까지 갔다는 사실이 당시 외교관의 저서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 뿐이다. 주진오 교수가 그 사실이 거짓이라고 주장했지만 왜 그런지 설명은 전혀 되지 않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주진오 교수는 이런 주장을 하고 있다.

“큰 문제는 2007년 6월 23일 KBS의 <한국사 전(傳)-조선의 무희, 파리의 여인이 되다>(연출 김종석)편에서 리진을 실존 인물로 간주하여 방송을 한 것이었다. 오늘날 위키피디아를 비롯한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는 리진이 하나의 항목으로 버젓이 자리잡고 있는 것은 그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무관심하지만, 관심을 갖더라도 완성되어 방영되거나 잘 팔리고 난 다음에서나 비로소 개입하여 이미 별다른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 가운데 처음부터 드라마임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지만 최근의 추세는 교묘하게 사실고증을 철저히 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 더욱 문제를 심각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 미디어오늘 주진오교수 기고문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이런 충고는 참으로 난처하다. 무시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자니 역사를 왜곡할 우려까지 있으니 말이다. 좀 더 신중한 비판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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