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소설의 ´클라이맥스´에서 유래

야마가 ´산, 톱의 날끝이나 나사´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아셨을 겁니다. 이번에는 야마의 유래에 대해 본격적으로 얘기할까 합니다.

한국 언론의 태동은 1883년 한성순보로부터 시작했지만 본격적인 언론활동은 19세기 일제시대에 이뤄졌습니다. 이 때문에 글은 우리말이지만 언론인들이 사용한 일상어 중 상당수는 일본어일 수밖에 없었겠지요. 야마도 이미 일제시대부터 사용한 취재 언어입니다.

일제시대에는 신문 연재소설이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고 합니다. 벽초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도 이 시대에 신문에 연재된 것입니다. 신문 소설은 그 특성상 한번에 모든 것을 승부해야 합니다. 독자들은 신문의 짧은 한 회분 소설에서도 흥분과 스릴을 맛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권투시합에서 KO당하는 순간의 짜릿함을 연재소설에서도 느끼고 싶은 거죠.

일제시대의 일본인들과 소설가들은 "신문 연재소설은 시시하지 않게 한 회분마다 야마가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신문 소설 한 꼭지에는 위기와 갈등의 요소 즉, 클라이맥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죠. 말하자면 일본인들은 ´산´을 ´산의 꼭대기=절정´이라는 의미로 확대 해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기자의 ´관점´이라는 의미로 발전

이 말은 소설에만 국한되지 않고 언론사회 전반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한 꼭지의 기사에도 절정=클라이맥스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야마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현재의 의미, 기사의 핵심 주제라는 의미와 클라이맥스라는 의미와는 사촌뻘 정도라고 느껴지지 않으세요? 선정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기사 한 꼭지가 한편의 소설처럼 완벽한 구조를 가져야 한다는 말도 되는 거죠.

야마는 또 비결과 노하우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신문 연재소설이 독자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클라이맥스가 있어야 하고, 소설가는 이런 소설을 쓰기 위해서 나름의 비결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에서 기원하는 것 같습니다. 야마의 뜻이 글의 요소에서 작가로 점차 전이되어 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반드시 있는 사건기사의 경우 기자는 어느 한쪽 편을 들기보다는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갈등요소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자의 눈=비결, 노하우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야마´를 "기사를 작성하기 이전에 기자의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라는 의미로 썼다고 합니다. 조금 더 의미를 진전시키면 "기자는 글을 쓰기 이전에 기자의 관점을 바로 세워야 한다"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죠.

비속어 남발, 사회적인 공해

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기자들은 "먼저 야마를 세워야지"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뿌리없는 나무는 없다´는 감탄을 하게 됩니다. 물론 기사의 핵심을 의미하는 야마의 뜻과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본래의 용례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보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야마 도네"라고 할 때의 그 야마는 어디에서 기원하는 것일까요. 솔직히 이 부분은 민기 한국교열기자협회 고문께서도 시원한 답변을 해 주시지 못했습니다. 다만 한 선배의 추측처럼 핵심=정수라는 야마의 의미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표현으로 보입니다.

우리 몸의 정수가 머리이기 때문에 화가 나서 미칠 것 같다는 의미를 ´머리가 돈다´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야마 도네´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해석은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더 하려고 합니다. 민 위원은 ´야마 도네´ 할 때 그 야마라는 말의 기원을 묻는 저에게 오히려 이렇게 질책을 하시더군요.

"옛날 사람들은 우리말의 뜻을 그대로 썼는데…. (장탄식을 하시면서) 비속어는 언어의 어문에 대한 정신을 훼손하는 다이옥신 역할을 한다. 사회적인 공해에 불과하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비속어를 바꾸기는커녕 비속어를 너무 많이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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