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인도 총리가 방한하자 우리 언론은 ‘달리는 코끼리 인도의 등에 올라타라’(중앙일보 22일자 사설)며 온갖 미담기사를 쏟아냈다. 문재인 대통령은 21일 연세대에서 모디 총리와 간디 흉상 제막식에 참석했고 그날 밤엔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118층 서울스카이전망대에 함께 올라 서울 야경을 배경으로 악수했다. 대통령은 모디 총리와 특급 친교를 자랑했다. 매일경제신문은 22일 ‘전자·IT산업의 새로운 미래가 인도에 있다’는 제목의 칼럼을 실었다. 모디 총리가 방한한 날 경향신문이 18면에 보도한 ‘카슈미르 갈등 다시 점화 인도·파키스탄 치고받고’란 제목의 기사는 눈치 없는 천덕꾸러기 취급 당했지만 오늘의 인도를 보는 진중한 기사였다.

▲ 지난 2월22일 문재인 대통령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청와대에서 열린 한·인도 정상 공동기자회견을 마친 뒤 박수치고 있다. 사진=청와대
▲ 지난 2월22일 문재인 대통령과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가 청와대에서 열린 한·인도 정상 공동기자회견을 마친 뒤 박수치고 있다. 사진=청와대
인도와 통하면 만사형통이란 이런 류의 기사를 보면서 우리는 인도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생각했다.

‘비폭력 저항’의 아이콘이 된 간디는 그렇게 간단한 인물이 아니다. 간디는 폭력과 비폭력을 넘나들었지만 결단코 저항하진 않았다. 간디 없는 간디주의로 채워진 오늘날 인도에선 여성이 26분마다 성희롱을, 32분마다 강간을, 43분마다 납치당한다. 1984년 펀잡주에선 시크교도를 진압하면서 5000여명을 죽였다.

간디는 비폭력 성자와 체제 옹호자의 두 얼굴을 가졌다.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려고 농민 폭동을 적절하게 이용했지만, 카스트제도를 영원히 유지하려고 죽음을 불사한 단식으로 불가촉천민들에게 피눈물을 안긴 힌두 우익의 삶을 살았다. 이 때 간디는 “나는 카스트제도가 인생의 법칙이라고 믿는다. 카스트의 법칙은 에너지보존의 법칙”이라고 설파했다. 역설적으로 간디는 1948년 화합을 호소하다가 극우 힌두교도에게 암살 당했다.

무슬림연맹의 무하마드 진나가 무슬림 포용을 호소했을 때 간디는 매몰차게 거절했고, 결국 무슬림연맹은 파키스탄 건국으로 돌아섰다.

간디는 1차 대전 당시 모병관으로 “인도의 용감한 젊은이들이여, 영국 왕의 부름을 받아 나가서 싸워라”고 역설했다. 간디는 제국주의 전쟁에 인도 청년들을 총알받이로 모병하고, 그 보상으로 자치를 얻어내겠다는 정치 전술을 신봉했다. 친일파가 조선 젊은이들에게 천황의 부름에 따라 전쟁에 나가 싸우라고 한 것처럼.

간디는 국민회의가 자신이 허용한 선 이상으로 농민 저항을 조직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간디는 유산계급이 안전한 범위 안에서만 민중운동을 지지했다. 간디가 1930년대 불복종운동을 하면서 내건 ‘11개 요구’에 노동자나 농민의 것은 딱 하나 토지세 50% 삭감 뿐이었다. 대신 지주와 기업가, 고리대금업자의 요구는 곳곳에 포함됐다.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Mohandas Karamchand Gandhi)
▲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Mohandas Karamchand Gandhi)
간디가 젊은 변호사로 채식 관련 글을 쓸 때 같은 젊은 변호사 레닌은 영국 복지정책의 근간을 이룬 시드니 웹의 책을 번역하고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썼다. 간디는 무엇보다도 한치의 빈틈도 없는 지주와 기업가의 정치 지도자였다. 간디는 죽을 때까지 농촌 빈민이 독자세력으로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간디의 진정한 계승자로 인정 받는 비노바 바베는 토지개혁을 거부하는 대신 지주에게 스스로 자기 땅의 1/6을 소작인들에게 선물하라고 주문했다. 이것이 오늘날 인도를 만든 부단운동의 본질이다. 인도의 독립은 ‘비폭력의 성자’ 간디 때문이 아니라 바가트 싱 같은 혁명가와 절대 다수의 민중들이 싸운 결과다. 간디는 23살의 혁명가 바가트 싱을 서둘러 처형해 달라고 영국 정부에 간청하기까지 했다.

간디는 독립 뒤 인도정부의 부패와 타락을 보면서 자신이 설파했던 간디주의가 실패했음을 인정한 유일한 간디주의자였다. 그 점에서 간디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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