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보고서로 시작한 ‘공정성 잃은 지상파’ 프레임의 목적은 2월 임시국회가 열릴 경우 자유한국당에 ‘실탄’을 제공함에 있다. 여당은 공영방송 지배구조개선을 골자로 한 통합방송법안을 해놓았다. 국회가 열리면 공영방송 논의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 때 자유한국당이 조선일보 기사와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 보고서를 정쟁수단이나 협상 수단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

예컨대 공영방송이 문재인 정부에 장악됐으니 통합방송법을 받을 수 없다거나 또는 이런 주장으로 공정성 논란을 부추기면서 역으로 종합편성채널 탄압을 주장하며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 앞서 지난 1일 자유한국당 비상원내대책회의에서 조선일보 편집국장과 TV조선 보도본부장 출신 강효상 자유한국당 원내부대표는 “종편 의무전송에 관해 많은 국민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방통위가 폐지하는 시행령 입법예고를 강행했다”며 “독재적 발상”이라고 주장했다. 같은 날 김성태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자유한국당 간사는 “문재인정부 종편 죽이기의 시작”이라고 주장했다.

임시국회가 열리면 자유한국당은 조선일보 기사를 근거로 ‘친정부적인 지상파는 중간광고를 주고, 정부비판적인 종편은 의무전송을 폐지하는 식으로 차별한다’는 프레임을 내걸고 종편 특혜를 없애자는 각종 입법예고를 방어할 가능성이 있다. 앞서 종편4사는 의무전송 대가로 개국 이후 4년간 1286억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 2월13일자 지면.
조선일보 2월13일자 지면.
또한 이번 서울대 보고서와 조선일보 기사는 MBC ‘스트레이트’, KBS ‘오늘밤 김제동’, KBS ‘저널리즘토크쇼J’ 등 관련 프로그램 진행자들 입지를 좁히거나 제작진의 자기검열 효과를 노렸다. 여기에는 조선일보의 이해관계도 얽혀있다. 2월15일자 “이명박·삼성·양승태…TV시사프로, 일제히 적폐몰이 융단폭격” 기사에서 조선일보는 ‘공정성 잃은 지상파’ 시리즈를 기획한 속내를 드러냈다.

조선일보는 해당 기사에서 “미디어비평을 내건 KBS ‘저널리즘토크쇼J’ 역시 조선일보 등 정부에 비판적인 보수 언론만 집중 공격했다. 본지 분석결과, 지난 총 31회 방송 중 24회(77.4%)에서 조선일보 보도를 비판했고, 동아일보·중앙일보 비판은 각각 18회, 15회였다. 반면 한겨레신문은 4회, 경향신문은 2회뿐이었다”고 보도했다.

이 프레임의 목적은 최종적으로 지상파에 ‘당파성’을 씌워 지상파 프로그램의 조선일보 비판을 정부 여당측 공격으로 매도하고 스스로를 정부탄압으로 어려움에 처한 언론사로 자리매김해 보수층의 지지와 결집을 노리는 것이다. 故 장자연 사건부터 최근 ‘박수환 문자’로 드러난 기사거래까지 사주 리스크 등 각종 위기에 놓인 조선일보는 현재 국면을 ‘기회’로 바꿔야 하고, 이를 위해선 공공의 적을 설정해 당파성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지상파와 싸움이다.

조선일보.
조선일보.
낯설지 않은 ‘지상파 편향 보고서’ 15년 전 노무현 탄핵 때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조선일보의 패가 드러난 지금 국면은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당시 한국언론학회가 내민 ‘대통령 탄핵 관련 TV방송 내용 분석’ 보고서를 반추하며 누군가가 설계했을 가능성이 있다. 2004년 6월 조선일보·동아일보가 대대적으로 보도한 당시 언론학회 보고서도 지상파의 대통령 탄핵보도가 편파적이었다고 결론 내렸다. 탄핵반대여론이 70% 수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탄핵반대자 인터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이유였다.

당시 한국방송학회와 한국언론정보학회는 “일부 언론이 언론학회 결과물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해서 보도했다”고 비판했고, 전국언론노조를 비롯한 언론사회단체는 “기계적 형평성과 중립성의 잣대로 공정성을 평가”했으며 “특정 결론 도출을 위한 요식 행위”라고 비판했다. 조선일보는 해당 보고서를 마치 헌법재판소 판결문처럼 보도했는데, 당시 보고서 책임연구원은 이민웅 한양대 신방과 교수로, 2002년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 추천으로 방송위원회 선거방송심의위원을 맡았다.

당시 한국언론학회장은 박명진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장이었다. 조선일보 미디어연구소가 3000만원에 발주한 이번 보고서도 2018년 8월까지 서울대 언론정보연구소장을 맡았던 윤석민 교수가 주도했다. 흥미로운 점은 2004년 탄핵방송 보고서 논란 때 한국언론학회 총무이사가 윤석민 교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누구보다 당시 보고서의 ‘파장’과 ‘효과’를 기억하고 있을 인물이다.

▲ 2004년 6월11일자 조선일보 1면.
▲ 2004년 6월11일자 조선일보 1면.
윤 교수는 2004년 당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보고서를 작성한 연구위원 선정과정에서 정치적 의도에 따른 특정인사 배제나 발탁은 사실무근”이라고 했다. 이후 논란의 중심에 있던 박명진 교수는 이명박정부 초대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을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2004년 3월12일 노무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고 열린우리당이 4월15일 총선에서 대승한 뒤 헌법재판소는 5월14일 탄핵을 기각했다. 그 직후 등장한 보고서는 이번 보고서처럼 양적 분석을 중심으로 5대5 기계적 형평성을 공정성의 전제로 판단했다. 물론 보고서는 “기사와 프로그램의 상당수 대목에선 탄핵 반대와 탄핵 찬성으로 코딩하기 어려운 중립적 의견과 정보로 채워졌다”고 언급하며 “공정성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실천적 규범”이라고 지적했으나 이런 대목은 주목받지 못했다.

▲ 2004년 탄핵 당시 YTN생중계 화면.
▲ 2004년 탄핵 당시 YTN생중계 화면.
당시 조선일보는 “편파로 판정난 KBS MBC 탄핵방송”이란 사설을 내며 입맛대로 ‘지상파=편향’ 프레임을 확대·재생산했다. ‘노무현에게 장악된 방송이 국민을 속여 열린우리당이 국회를 장악하고 탄핵이 기각됐다’는 프레임이었다.

당시 보고서는 전사회적으로 언론개혁 움직임이 본격화되던 때 등장했다. 이는 조선일보 입장에선 위기였다. 그러나 당시 보고서를 계기로 지상파와 전선을 형성하며 보수층을 결집시켰고, 당파적 보도를 강화하며 생존한 뒤 정권창출에 기여하고 염원하던 ‘신방 겸영’까지 손에 넣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다. 결국 이번 ‘지상파 편향’ 보고서는 당시 ‘검증된 효과’를 믿고 진행됐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2004년 당시와 달리 조선일보 지면의 영향력은 현저히 감소한 반면 뉴스수용자들 독해력은 한층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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