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절대로 안 속아.”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윤정학(유아인)은 영화 속 대한민국이 IMF 체제를 받아들이기 직전, 뉴스 속에서 “한국 경제는 괜찮습니다”라고 반복해 말하는 경제 관료들을 보면서 속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는 경제 관료들이 IMF 구제금융 체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는데 재벌 기업을 위해 받아들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는 그 관료들의 ‘무능력함’에 수십억원을 배팅해 돈을 버는 인물이다. 그는 영화에서 한국언론과 경제 관료 불신을 그대로 전달한다. 

영화가 실제 한국이 IMF를 받아들였던 과정보다 과장돼있고 디테일한 팩트들이 뭉개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중앙일보는 이 영화가 반기업·반미 정서를 부추긴다면서 당시 경제관료들이 IMF로 가기보다 대안을 모색했고, 미국과 협의는 필수적이었다고 밝혔다. 중앙일보는 이 영화에 ‘팩트 파산의 날’이라고 혹평했다. 

▲ 영화 '국가부도의 날' 포스터.
▲ 영화 '국가부도의 날' 포스터.
그러나 영화 속에서 ‘사실’ 가장 확실한 사실은 영화 내내 나오는 한국 방송뉴스와 신문기사다. 영화 속엔 실제 방송뉴스 화면이 다수 포함돼있고 신문 기사도 많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보도가 조선일보 1997년 3월8일 “한국경제 위기 아니다”라는 캉드쉬 IMF총재 인터뷰다. 이후에도 조선일보는 수많은 기업 부도가 일어나는데도 ‘한국경제는 안전하다’는 기사를 줄줄이 쏟아냈다.

조선일보 1997년 5월26일 ‘금융대란설’이라는 사설에서는 삼미와 한보그룹 부도 이후 금융계와 재계에 파장이 커지자, 부도방지협약을 만든 후 금융대란설이 나돈다며 “당국은 툭하면 악성루머를 퍼뜨려 혼란을 야기시키는 전문적인 루머날조 세력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해 차제에 이를 뿌리 뽑아야 할 것”이라고 썼다.

▲ 1997년 3월8일과 9월18일 조선일보 지면.
▲ 1997년 3월8일과 9월18일 조선일보 지면.
조선일보 뿐일까. 한겨레21의 ‘무식한 언론에 책임을 묻는다’(1998년 2월12일)에서 인용한 IMF 직전 보수언론의 기사 제목을 보자.
‘경제위기감 과장말자’(중앙일보 11월1일치 사설), ‘경제 비관할 것 없다’(조선일보 11월3일치 기고), ‘외신들의 한국경제 흔들기’(동아일보 11월10일치 사설)…. ‘DJ의 양심수론’(조선일보 11월2일치 사설), ‘국민신당 청와대 자금지원’(중앙일보 11월5일치 1면), ‘김대중씨의 양심수 석방론’(동아일보 11월2일치 사설).

한겨레21의 기사를 보면 한겨레 역시 IMF체제에 맞서 제대로 된 기사를 쓰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한겨레21은 이 기사에서 1997년 11월2일자 한겨레신문이 ‘정부가 채권시장을 조기개방 해 미국이나 일본과 우리 금리가 차이가 나 자금유입이 기대돼 효과가 있을 것이며 외국인 주식투매는 무뎌질 것’이라는 희망섞인 관측을 외부필진의 이름으로 실었다고 지적했다. 해당 기사에서 주동황 광운대 신방과교수는 언론이 제대로 된 역할을 못했다고 비판한다.

이 기사는 “당국의 강력한 부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탓에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언론은 세계경제의 흐름을 읽어내는 레이더가 되지 못했고 경보음 발령시기도 놓쳤다. IMF 구제금융 뒤에는 위기의 원인을 진단하는 데도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IMF 구제금융 이전의 보도뿐만 아니다. IMF 체제 이후 수많은 정리해고 속에서도 언론은 IMF를 핑계대면서 정리해고를 부추겼다. 중앙일보 ‘정리해고 다툴 시간 없다’(1998년 1월11일)에서 “정리해고제의 도입은 IMF측과의 약속사항일 뿐 아니라 구조조정과 감량경영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대절명의 필요성에 따른 것”이라고 썼다. 

이런 식으로 보수언론은 정리해고가 IMF의 요구조건이라며 반드시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왔지만 캉드쉬 총재가 정작 한국에서 노동계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정리해고제 도입이 IMF 조건은 아니다”며 “정리해고제는 반드시 노·사·정 3자 합의에 따라 도입돼야 한다”고 밝힌 점은 보도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왔다. (관련기사: 미디어오늘 ‘언론-DJ 정리해고 장단 맞추기’)

그 외에도 IMF 시기에서 언론은 제대로 된 예측도, 분석도 미리하지 못했고 당시의 외신 보도에도 눈을 뜨지않고 기존의 논조만 반복했다. 언론은 IMF 직후 원인분석에도 실패했다.

이런 상황을 보면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재정국 차관(조우진 역)은 어쩌면 당시 ‘진짜’ 경제관료를 보여준 것이 아니라, 언론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 속 재정국 차관은 “그 놈의 알권리가 뭐가 중요합니까”라면서 제대로 된 상황을 국민에게 알리려고 하지도 않고, IMF를 이용해 노동자들 쉽게 자르는 환경과 재벌기업 위주의 경제 환경을 만들려고 한다. 

한국에서 IMF는 신자유주의를 본격 도입하는 신호탄이 됐다. 90년대 중반까지 한국 기업은 일본처럼 평생고용을 중심으로 한 가족주의 경영에 기반했다. 따라서 사람 자르는 기업주는 재계에서도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 받았고, 기업주들도 스스로 자기 직원 자르는 구조조정을 부끄러워했다. 

실제 울산에 있던 섬유업체 선경인더스트리가 1996년 10월 한국 최초로 전사원 구조조정에 들어갈 때 그 회사 임원들은 퇴직금 외에 최고 60개월치 월급과 퇴직 후 2년간 자녀장학금을 지급하는 파격적 조건에도 내보내는 직원들에게 미안해 했다. 1997년 12월 4000여명을 구조조정한 제일은행 홍보실이 만든 ‘눈물의 비디오’도 은행은 떠나는 동료들을 향해 눈물을 쏟았다. IMF 20년이 지난 지금은 당시와 정반대로 구조조정 못하면 오히려 무능한 기업주라는 평판이 정석이 됐다. 이렇게 IMF는 기업주에게 직원 자르는 ‘부끄러움’을 지워줬다. 

일부 언론은 영화 ‘국가부도의 날’이 실제 경제관료들과 다르다며 영화를 비판하지만 영화 속 재정국 차관은 경제관료보다는 언론을 비유한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경제관료와 한국언론을 동시에 소화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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