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방북 4번째 길에 올랐을 때 그는 ‘UNITED STATES OF AMERICA’라고 쓰여진 전용기편을 타고 평양 국제순안공항에 도착했다.

반면 지난 3일 조명균 통일부 장관을 포함해 10·4 선언 11주년 민족통일대회 참가차 방북한 150여명이 탔던 비행기는 프로펠러 4개를 단 초록색 군용비행기였다.

▲ 4일 오전 평양에서 예정된 10·4선언 1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회에 참석하는 남측대표단이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 4일 오전 평양에서 예정된 10·4선언 1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회에 참석하는 남측대표단이 평양국제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평양에서 사진공동취재단이 보내온 사진을 보면 조명균 장관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 노건호씨 등은 비행기 안에서 양 옆으로 마주보고 앉았다. 무릎과 무릎 사이 공간은 50센티미터도 되지 않았다. 공군 수송기인 탓에 등받이는 없었다. 쪼그려 앉아 불편한 모습이었다.

민족공동행사를 취재했던 한 기자는 “대화가 안될 정도로 소음이 컸다. 군에서 귀마개를 주기도 했다. 자리도 불편했던 게 사실”이라며 “화물을 싣는 것도 한계가 있다. 군 수송기이기 때문에 화물칸에 사람이 실려가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악화된 남북관계 탓인지 이렇게라도 북으로 올라가는 게 어디냐라는 얘기를 나눴다”라고 전했다.

10·4 선언 민족통일대회는 남북관계 교류의 상징성이 큰 행사다. 지난 4월 판문점 선언에 이어 나온 9월 평양공동선언의 남북교류 이행 첫 조치로 진행됐다. 남과 북, 해외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것도 처음이다.

하지만 한 장의 사진이 주는 느낌은 민족공동행사를 무색케 할 정도로 씁쓸하기 그지 없다. 여전히 풀리지 않은 대북제재 탓에 남북교류를 하러 가기 위한 행사에도 군용기를 탈 수밖에 없는 현실은 역설적이다. 

▲ 10·4 선언 1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회에 참석을 위해 방북한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남측 대표단이 공군 수송기편으로  평양국제공항에 착륙해 기내에서 대기하고 있다.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 10·4 선언 11주년 기념 민족통일대회에 참석을 위해 방북한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비롯한 남측 대표단이 공군 수송기편으로 평양국제공항에 착륙해 기내에서 대기하고 있다. 사진=평양사진공동취재단

통일부는 민족공동행사 방북단이 공군 수송기를 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민간항공기 운항을 고려하였으나 섭외부터 계약,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등 여러 절차가 필요한 바, 촉박한 일정과 여건을 감안해 관계기관과 협의해 군용기를 이용했다”고 밝혔다. 여러 얘기를 하지만 대북제재를 피할 수 없어 군 수송기를 이용했다는 얘기다.

민간항공기로 방북하면 해당 항공기는 미국 입국이 180일 동안 금지돼 민간항공사가 방북 비행기를 내주는 것에 부담이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간항공기가 북한 땅을 밟기 위해선 미국 정부의 ‘허락’이 필요하다. 외교부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미국 대통령의 행정명령에 따라 미국 독자 대북제재 중 외국인이 이해관계가 있는 항공기는 북한에서 이륙한지 180일 내 미국에 착륙할 수 없다. 미국과 협의하지 않고 민간항공기를 북한으로 띄우는 것은 미국이 정한 대북제재 위반이라, 민간항공사는 어쩔 수 없이 180일 동안 해당 비행기가 미국에 취항하지 못하는 경제적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대북제재 탓에 공군 수송기가 운용된 것은 두번째다. 지난 7월3일 공군 C-130H 수송기는 남북통일농구대회에 참여하는 우리 선수단과 정부대표단 등 101명을 태웠다. 당시에도 통일부는 군 수송기를 타고갈 수밖에 없는 이유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말을 했다.

군 수송기가 평양 국제공항에 들어오는 것도 북한 입장에선 불편하다. 남북교류차 온 일행이 초록색 무늬의 군 수송기라면 결코 환영받을 만한 일이 아니다. 취재단에 따르면 지난 7월 남북통일농구대회 대표단을 평양국제공항에서 맞이했던 원길우 북한 체육상은 “왜 수송기를 타고 온 것이냐”며 의아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앞서 5월23일 북한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현장을 취재하러 간 남측 기자단은 뒤늦게 방북 취재가 결정돼 정부 수송기를 탔지만 군 수송기는 아니었다. 지난 9월18일 3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문재인 대통령과 방북 특별단이 탔던 비행기는 에어포스원, 공군1호기다. 보잉 747-400 기종으로 박근혜 정부 때 대한항공과 계약을 맺어 전세기 형식으로 빌려 쓰고 있다. 해외순방 때도 문 대통령이 타는 비행기다.

정상이 타고 가는 비행기를 제외하고 미국과 협의해 남북교류 목적으로 북한으로 날아간 민간항공기가 있긴 하다. 지난 1월 남북 스키선수 공동훈련을 위해 방북단은 아시아나 항공 전세기를 타고 북한 갈마 비행장에 도착했다. 당시 외교부는 북한에 들어간 민간항공기는 180일 동안 미국에 취항할 수 없다는 미국 독자 제재에 대한 예외를 허가받는 절차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평창동계올림픽 남북 공동 출전이라는 특별한 배경에 따라 예외로 민간항공기가 북한으로 들어간 첫 사례였다.

이같이 미국과 사전협의에서 ‘허락’이 없으면 남북교류행사차 북한 방문길에 군 수송기를 타고 가는 현실은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남북교류 목적에 따른 이동 수단에 대해선 민간항공기 이용 예외라는 우리 측 요구안을 관철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남북공동행사는 날로 늘고 있는데 언제까지 군 수송기에 쪼그려 앉아 북한에 가야만 하느냐는 얘기다. 한국의 통일부장관은 공군 수송기를 타고 북한에 가고, 미국의 국무장관은 전용기를 타고 북한에 가는 상황을 언제까지 지켜보고 있어야만 하느냐는 주장과도 맥이 닿아있다.

이하나 겨레하나 정책국장은 “지난 7월 남북통일농구 대회 때는 그나마 좌석을 앞으로 설치해서 갔는데 이번에는 인원이 많아서인지 비행거리가 짧아도 정부와 민간단체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쪼그려서 갔다. 지켜보는 입장에서 안타깝고, 비행기를 탔던 사람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스포츠교류나 문화교류도 대북제재를 받는 것을 잘 모르는 것도 현실이다. 대북 제재로 인해 민간기업이 남북공동 단일팀에 티셔츠마저도 줄 수 없는 상황이다.

이하나 정책국장은 “현재 남북미 관계가 조심스러운 건 맞지만 스포츠교류라든지 남북문화교류까지도 대북제재를 받는 것은 변화된 평화 시대를 못 따라오는 것”이라며 “미국 대북 제재를 탓하며 마냥 기다리기보다 우리 정부도 단칼에 없앨 수 없겠지만 남북교류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비행기 문제라도 여러 방면을 통해 해결해야지 남북교류의 선순환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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