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이근안에 고문 당한 '27살' 기자의 해직 40년 세월
80년 이근안에 고문 당한 '27살' 기자의 해직 40년 세월
1980년 수배된 김태홍 기자협회장 숨긴 합동통신 3년차 유숙열 기자
남영동 “얼굴에 수건 덮고 물이 쏟아졌다. 다음엔 무슨 일을 당할지”
‘내게 팬티와 생리대를 사준 남자 이근안’… 나와 보니 해직돼 있더라
80년 해직기자 명예회복은 광주만의 저항에서 벗어나 전국 확대 의미

민병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언론사에서 검열과 제작거부에 가담했다가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강제해직된 언론인을 5·18 관련자로 인정하자는 내용을 담은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기존 5·18 보상법의 범위를 넓혀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가 인정한 언론인 200여명도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고승우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는 “이 법안은 역사 바로잡기 일환으로 ‘광주 정신’을 부정하는 일부세력의 왜곡과 폄훼에 맞서고 5·18 민주화운동의 전국화 실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1980년 합동통신 기자로 일하다 수배 중이던 김태홍 기자협회장을 숨겨줘 물고문을 당한 뒤 해직되고, 이후 한국 1세대 페미니스트 언론인으로 현재까지 활동 중인 유숙열 이프북스 대표를 만났다.

▲ 유숙열 이프북스 대표는 1980년 당시 합동통신 기자로 일하다 수배 중이던 김태흥 기자협회장을 숨겨줘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을 당한 뒤 해직됐다. 사진=이치열 기자
▲ 유숙열 이프북스 대표는 1980년 당시 합동통신 기자로 일하다 수배 중이던 김태홍 기자협회장을 숨겨줘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을 당한 뒤 해직됐다. 사진=이치열 기자
- 합동통신 3년차 기자였는데 80년에 해직당한 이유는?

“1980년 5월에 나는 굉장히 괴로웠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죽었다. 느닷없이 내가 격동의 역사 속에 산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자각이 나를 힘들게 했다. 곧바로 ‘서울의 봄’이 왔고 사회 전체에 민주화 열풍이 불었다. 학생운동 경험도 없었고 그때까지 나는 기자였지만 그냥 직장인이었다. 광주에서는 5·18 민주항쟁이 일어났고 계엄령이 확대됐다. 언론계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엮으려고 김태홍 기자협회장을 지명수배해 TV에 그의 얼굴이 매일 나올 때였다. 바로 그때 김태홍 선배로부터 은신처를 구해달라는 전화가 왔다. 무슨 일로 역사에 참여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이게 내가 할 일이구나 생각하고 친구 화실에 2달 동안 김태홍 선배를 숨겼다. 회사(합동통신)엔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상주하며 매일 김 선배랑 관련된 고등학교·대학교 동창 등 찾아다녔는데 내가 여자라서 바로 옆자리였는데도 불구하고 들키지 않았다.”

-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물고문도 받으셨다는데?

“두어 달 뒤 7월17일 새벽 정보부 기관원들이 우리 집에 들이닥쳤다. 화실 하던 친구 노현재를 데리고 왔기에 김태홍 선배 일인 줄 알았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자 그들은 내게 안대를 씌워 승용차에 태워 이동했다.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처음엔 점잖게 기자 대접해주다가 ‘년’자 붙이면서 욕하고 머리를 욕조에 넣었다 뺐다하면서 정신없이 취조했다. 순순히 응하지 않자 수사관들이 ‘남민전 이재문이 죽어 나간 방으로 가자’고 겁 주면서 끌고 가더라. 그 방에 가니까 안전벨트 같은 버클이 매달려있는 칠성판(물고문이나 전기고문용으로 사용된 나무판)이 있었고 그 위에 올라가라고 했다. 30~40대 남자들이 몽둥이를 들고 둘러 서 있었다. 올라가서 엎드렸는데 돌아누우래. 얼굴에 수건을 덮고 육중한 남자가 올라타더라. 나중에 알았지만 그가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이었다. 얼굴 위로 물이 쏟아졌다. 물고문을 당하니 사람이 완전히 바뀌더라. 더운 여름이었는데도 너무 추워 담요 몇 장을 뒤집어써도 와들와들 떨렸다. 다른 수사관들이 들어와서 보더니 ‘얘 왜 이래? 전기했어?’라고 물었다. 옆에는 고춧가루를 탄 물이 2/3쯤 담긴 컵이 있었다. 그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물고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나는 물고문을 한 번 당했다. 새벽에 끌려가 취조 받다가 아침식사를 줬는데 넘어가지 않았다. 못 먹으니까 영양제라면서 초콜릿 당의정 같은 갈색 알약을 우유와 함께 강제로 먹이더라. 점심식사로 순댓국이 들어왔는데 먹을 수가 없었다. 변기에 토했는데 먹은 게 없으니 물만 나오고 위액까지 나오더니 나중엔 검붉은 게 나왔다. 피인 줄 알고 수사관들이 깜짝 놀랐다. ‘너 죽으면 우리가 큰일 난다’면서 의사를 불렀다. 의사는 들어오자마자 여기서 보고 들은 일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 의사가 진찰 후 쇼크에 탈진이라고 링거를 처방해줬다. 잠시 의사랑 단둘이 남았는데 그가 나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내 손을 꽉 잡아줬다. 나는 27살이었고 단발머리에 티셔츠 바지 차림이어서 아마 운동권 학생으로 알았나보다. 그때 ‘아 이 사람이 나를 지지해주는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고 고마웠다. 링거를 맞고 수사관이 불러주는 대로 조서를 받아 써야만 했다.”

- 이근안과 악연이 있다던데?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5일이 흘렀다. 링거 맞고 누워있는데 하필 그때 생리가 터졌고 그때만큼 여자인 게 싫었던 적이 없었다. 나를 고문한 사람이 이근안인지도 몰랐지만, 할 수 없이 그에게 ‘아저씨 저 생리가 터졌어’라고 얘기했다. 그가 나가서 팬티하고 생리대를 사왔는데 ‘내가 여자 속옷을 사봤어야지. 얼마나 창피했는지 아냐?’라며 생색을 냈다. 5일이나 같이 있다보니 나중엔 별 시시콜콜한 얘기도 하게 되더라. 내가 나중에 이근안한테 ‘아저씨 왜 사람 고문하는 걸 직업으로 가졌냐? 직업을 바꿔라’고 했다. 이근안이 2012년인가에 목사, 그것도 반공목사가 됐다는 얘길 듣고 온라인 이프(IF)와 오마이뉴스에 ‘내게 팬티를 사준 남자 이근안’이란 글을 실었다. ‘네가 목사가 된다는 건 말도 안된다. 넌 사죄하고 네 죄를 씻고 또 씻어야 한다. 스스로 목사직에서 내려와라’고 썼다. 글 탓인지 교단에서 그 사람의 목사직을 뺐었다. 남영동에서 5일, 용산경찰서 구치장에서 5일, 서대문구치소에서 20일 있다가 기소유예로 한 달 만에 나왔더니 사직서도 안 썼는데 해직돼 있었다. 검사는 ‘여자가 언론자유 이런 거에 신경 쓰지 말고 시집이나 가라’고 했다. 남자 기자라면 그런 이야기 안 했을텐데. 그렇게 27살 청춘에 백수가 되고 나서 할 일이 없으니 사회과학서적을 많이 읽었다. ‘여성해방운동의 이론과 실제(창비)’라는 책을 보고 페미니즘을 알았다. 어머, 이런 게 있구나. 이거 내 얘기다. 그러고 나서는 페미니즘에 뜻을 뒀다. 공부를 하다가, 결혼하고 미국에 갔다. 미주 조선일보에서 일하면서 여성학을 배웠다. 여성학을 개발한 헌터컬리지에서 학부를, 뉴욕시립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 고작 3년차 기자였는데 너무 큰 희생이었다.

“그런 생각 전혀 안 했다. 서대문 구치소에 들어가니 간수나 죄수들이 ‘너 얼굴 반반하니까 통으로 들어왔구나’ 했는데 ‘통’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간통이랬다.(웃음) 다들 김태홍 기자협회장 선배를 좋아하지 않았으면 네가 왜 그랬겠냐. 미쳤냐. 이런 식으로 몰았다. 맹세코 선배의 제안이 나를 역사 참여의 길로 인도해줬기에 그게 너무 고마웠다. 이런 인생을 살게끔 길을 열어줬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지금도 똑같다. 나는 학생운동 경험이 없어서 겁이 없었다. 사람 하나 숨긴 게 무슨 큰 죄냐. 얘네가 나를 죽이기야 하겠냐 생각했다. 그런데 1987년 박종철 열사가 고문에 죽고, 김근태 씨가 고문당한 게 알려지면서 나를 고문한 게 이근안이었다는 걸 알고 기가 막혔다. 80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내가 박종철이 될 수도 있었구나.(울먹) 머리가 쭈뼛 섰다. 하지만 나는 고문의 피해자인 양 하고 싶지 않고 굴하지 않는다. 내 자존심이라고 할까 그런 거다. 난 개인적으로 그게 역사와 사회의 운동에 참여하는 인생을 선택하게 된 거다. 그 선택에 후회가 없고, (잠시 말을 고른 뒤)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 유숙열 이프북스 대표는 1980년 당시 합동통신 기자로 일하다 수배 중이던 김태흥 기자협회장을 숨겨줘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을 당한 뒤 해직됐다. 사진=이치열 기자
▲ 유숙열 이프북스 대표는 1980년 당시 합동통신 기자로 일하다 수배 중이던 김태홍 기자협회장을 숨겨줘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을 당한 뒤 해직됐다. 사진=이치열 기자
- 80년 해직기자 명예회복은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

“나는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 받았고, 해직되고 이혼하고 딸은 학생이라 돈 버는 사람이 없어서 많진 않지만 생활지원기금도 받았다. 그런데 해직된 많은 분들이 다 그 법을 적용 받은 건 아니다. 현재 민병두 의원이 낸 법안은 5·18법에 80년 해직을 집어넣자는 내용이다. 그게 통과되면 광주항쟁에 80년 언론인들의 저항운동과 강제해직이 포함돼 광주를 벗어나 전국적 투쟁으로 확대되는 거다. 그 법이 통과되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 해직되고 나서 다시 기자로 일한 계기는?

“미국 가서 10년 살다가 1991년에 왔다. 몇몇 선배는 1987년 이후에 연합통신(현 연합뉴스)으로 복직됐다. 한겨레로 가시거나 전직한 분들도 있고. 귀국했을 때 연합통신 선배가 내 복직을 추진했는데 당시 연합통신 사장이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해 복직 못 했다. 한겨레에도 가고 싶었는데 한겨레 선배들은 월급 적다고 오지 말라고 말리더라(웃음). 그때 문화일보가 창간돼서 입사했다. 그때 문화일보엔 소위 ‘빵잡이’들이 한겨레보다 많았고 회사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미국에서 여성학을 공부하고 온 나는 여성정책에 젠더 개념을 넣은 기사를 대한민국 신문에서 처음으로 썼다. 페미니스트 기자로 신문 1면에 여성 이슈를 올리는 일을 많이 했다.”

- 문화일보에서의 기자생활은 어땠나?

“신생사다 보니까 노동조합이 없었다. 그런데 언론사 선배들이 고위 임원진이 되니까 적폐가 되더라.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다. 나중에 문화일보에서 나를 괴롭힌 사람들이 다 언론인 출신이다. 저항한 사람은 승진 안 되고, 외면한 사람은 승승장구하면서 편집국장 지내고 사장도 되고 하더라. 문화일보에 사장으로 온 사람은 나중에 대학 총장도 지내고 장관도 지내고 이러면서 언론계 적폐가 됐다. 내가 1994년도에 노조 만들자고 제안했다. 부당인사가 자꾸 나오니까. 노조 결성한 주축 멤버들은 다 지방발령 났고 파업까지 했다. 파업을 잘해서 조합원이 더 늘고 우리사주조합까지 만들었다. 내가 문화일보 있는 동안 사장이 6~7명 바뀌었는데, 새로 사장이 올 때마다 나는 우선 제거대상자였다. 대기발령도 받아 봤고. ‘자기만의 방’이라는 연극 대본을 썼는데 그 이유로 문화일보홀 관리인으로 발령 날 뻔도 했다. 출판부, 인터넷뉴스팀, 조사부 등 기자 없는 지원부서로 여러 번 발령 났다. 부당노동행위 결정을 받고 원직 복귀 명령도 받았다. 내 인사 때문에 노조가 파업까지 가려고 하니까 당시 사장들(K모, N모)은 일개 여직원 하나 때문에 회사가 이렇게 난리가 벌어져야 하냐고 했다. 그때 마흔살 넘은 차장이었는데 그들에게 나는 일개 여직원일 뿐이었다. 그러면서 뒤로는 ‘얘 해고시켜라’ 했다. 내게 사직서를 못 받아낸 부장은 시말서를 쓰기도 했다.”

- 사표를 낸 계기는?

“이러다가 2003년 내가 비상임 방송위원이 됐다. 현대그룹 출신 김정국 문화일보 사장이었는데 신문사 이름을 빛내줘서 고맙다며 겸직하게 논설위원실로 발령 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윤구 논설실장이 대통령에게 방송위원 임명장 받은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 비판하는 사설을 쓰겠냐며 트집을 잡으며 반대했다. 사실상 문화일보가 정몽준 회사였는데 ‘네가 MJ한테 월급을 받으면서 어떻게 노무현한테 가서 녹을 먹냐’ 일종의 이런 거라고 난 생각했다. 결국 나는 논설위원실에 못 들어갔다. 그 정도 경력이면 ‘놈’들은 개나 소나 가는 논설위원실을 못 들어가고 다시 편집국으로 내려왔다. 당시 편집국장은 나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으니 제발 좀 튀지 말고 어디 해외연수나 가라고 했다. 나가라는 소리였다. 열심히 하진 않았지만 나하고 같이 노조 만든 사람 중 하나인데. 결국 후배 문화부장 밑에 전문위원으로 발령 났다. 문화부장은 내 기획을 계속 밀어냈다. 일하지 말라는 얘기지. 진짜 미치겠더라. 회사에 출근하면 숨을 못 쉬겠더라. 환청이 들리고 밤에 잠을 못자고 자려고 누우면 그대로 관속으로 들어갈 거 같았다. 너무 괴롭고 힘들었다. 1년 반 넘게 그런 기간이었다. 건강에 위협을 느껴서 못 견디겠더라. 2004년 8월 사표를 쓰고 나왔다.”

다음편 인터뷰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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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20~27일까지 신군부의 광주학살 보도 금지에 항의하면서 검열 및 제작 거부를 벌였다가 해직당한 기자가 1000여 명에 달한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보상자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됐지만 평생을 해직기자로 살았던 이분들은 명예회복은커녕 아직까지 제대로 된 배상조차 받지 못했다.

80해직언론인협의회는 다음달 6일 오후 2시 국회 의원회관 제2소회의실에서 ‘기획 세미나, 80 해직을 말한다’를 열어 1980년 언론인 해직 사건과 언론 민주화 운동을 다시 조명하고 해직 언론인들의 명예회복을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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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희 2018-08-20 15:18:47
존경합니다. 이부영 씨 (동아일보)도 민주화공헌자로 대접 해 주고 있나요? 그 분 고생 많이 한 걸로 아는데.....

남산 유기견견 2018-08-20 14:50:56
남영동의 그 뚱뚱한 새끼가 아직도 살아 있냐? 우리 유기견들이 잡아서 찢어 죽일 기라...

친일적페 단죄!! 2018-08-19 23:04:32
전두환 , 개세끼 !!!!! 와 , 찢어죽일 , 김기춘 !!!!!!!!!!!!!! 쌍늠의 세키와 , 부역자 년"놈들, 요 개쌍놈의 쪽바리 구멍서 나온 년"놈들, 모두 샅샅이 찿아서, 광화문 광장 앞에서, 돌로 쳐 죽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