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현장가면 스태프들 눈이 다 풀려있어요. 사고가 많이 나죠. 어디 부러지고 하는 안전사고가 많아요. 응급치료 정도만 해줘요. 다른 피해보상은 전혀 못 받아요. 이후 치료받느라 일 못한 건 자기부담이고”

김두영 희망연대 방송스태프지부장은 “지난 1일부터 300인 이상 방송사에 노동시간을 주 최대 68시간으로 제한했지만 실제 제작현장에는 크게 달라진 게 없다”고 지적했다. 여전히 최소한의 휴게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채 방송계 프리랜서와 비정규직은 최말단에 매달린 부품처럼 살고 있다.

방송스태프지부가 공개한 스태프 A씨의 촬영일지를 보면 그는 지난 16일(월)부터 19일(금)까지 총 84시간51분 근무했다. 5일 중 3일은 오전 6시에 출근했고, 다음날 새벽에 퇴근한 날도 있었다. 일부 현장에는 ‘주 68시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안내문이 내려오기도 하지만 실제 노동시간이 줄어든 사례를 거의 없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25일 오후 서울 상암동 한 카페에서 김 지부장을 만나 노조 설립 이후 상황과 향후 계획 등을 들었다. 지난 4일 민주노총 서울본부 희망연대노조 산하에 창립한 방송스태프지부는 제작현장을 방문해 조합 가입을 주문하고, 다양한 제작현장의 노동시간을 조사하고 있다. 방송계 ‘관행’의 힘은 만만치 않았다.

스태프 노동권 외면하는 방송사

지난 6월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부처와 드라마제작사협회, 방송스태프지부, 언론노조,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등이 참여한 ‘드라마 산업발전을 위한 TF’ 회의가 있었다. 김 지부장은 “방송사가 참여하지 않으면 민원창구밖에 안 된다는 의견이 나왔는데도 TF가 뭘 해야 할지 목표도 못 정했다”며 “방송통신위원회 쪽에 방송사 참여를 요청했는데 2차 회의도 안 잡혀있다”고 지적했다. 사실상 무용지물이다.

▲ 김두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이 25일 서울 상암동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장슬기 기자
▲ 김두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이 25일 서울 상암동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장슬기 기자

김 지부장은 방송사가 노동시간을 줄이려는 의지가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방송사는 탄력근무제를 얘기한다. 방송사 정규직은 3개월을 집중근무하고 3개월 유급휴가를 보내면 되지만 우리는 일당직이라 일이 없으면 무일푼”이라며 “우린 주 68시간이 아니라 1일 12시간 이상 일을 못하게 만드는 방식을 주장한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최근 실태조사하다가 하루에 ‘24시간 근무’를 명시한 계약서까지 발견했다.

방송사와 제작사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존재여서일까. 지난 4일 방송스태프지부 설립 이후 26일 현재까지 KBS·MBC·SBS 등 주요 방송사에선 방송스태프지부 관련 소식을 보도하지 않았다. 김 지부장은 “국회의원회관에서 창립 기자회견할 때 방송사에 보도자료 다 보냈는데 한 줄도 안나왔다”며 “전 세계적으로 방송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처우가 이렇게 나쁜 곳이 없어 해외에서도 관심이 있다”고 말했다. 최근 뉴욕타임스도 방송스태프지부를 상세히 취재해갔다고 전했다.

조직화 힘쓰는 집행부

이런 방송사에 대항하려면 힘을 키워야 한다. 김 지부장을 비롯해 노조 집행부는 제작현장을 찾는 게 최근 주요 일정이다. 김 지부장은 “여전히 스태프들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어서 어쩌다 쉬는 날 찾아와 가입하긴 어려워 우리가 직접 사업장으로 찾아간다”며 “여의도 3번 출구에 스태프 버스가 수십대 출발하니까 새벽 6시부터 가입서 주며 홍보한다”고 말했다. 노동시간·노동권을 보는 사회 분위기가 변한 만큼 조합원 수는 급격히 늘고 있다.

노조를 결심한 계기를 물었다. 김 지부장은 한국발전차연합회 사무총장 당시 경험을 꺼냈다. 발전차는 제작현장에 필요한 전력을 공급한다. 김 지부장은 “주유비 등을 표준화해 제작사 쪽과 협의하려 했는데 결국 잘 안 됐다”고 말했다. 사단법인이 아닌 노조를 생각한 계기다. 그는 “방송스태프 뿐 아니라 작가, 카메라, 독립PD 등도 각각 노조를 생각하고 있더라”고 말했다. 올 봄부터 오픈카톡방 ‘방송계갑질119’에서 오프라인 모임을 몇 차례 진행하면서 노조의 필요성을 서로 확인했다.

보통 방송사와 제작사는 방송스태프 각 직군 감독과 턴키계약을 맺는다. 그러면 감독이 스태프를 구해 그들과 계약을 맺는다. 김 지부장은 “방송사·제작사가 감독에게 몇억씩 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조항도 있다”며 “문제가 생겨도 방송사·제작사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왜 언론노조 아닌 희망연대노조였나

노조를 만들겠다고 다양한 직군이 모였다. 고충을 털어놨지만 서로 공감하지 못했다. 김 지부장은 “독립PD들이 이렇게 혼자 짐까지 들고 다니면서 운전도 하고 드론도 띄우고 하는 줄 몰랐다”며 “스태프보다 나은 환경에서 일하는 줄 알았던 작가나 PD도 처참했다”고 말했다. 결국 ‘어느 한 부분만 바뀌어선 안 되겠구나’, ‘행복한 일터를 만들어야 하구나’ 싶은 생각을 했다.

조명·장비·카메라·분장·작가·독립PD 등 방송 제작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프리랜서·비정규직이 다 뭉치기로 했다. 직군으로 보면 언론노조가 맞지만 현장에서 언론노조에 속한 방송사 정규직은 이들에겐 ‘사용자’다. “갑을관계인데 한 노조에 들어가서 어떻게 우리 의견을 관철시키겠느냐”는 현실적인 고민에 다른 노조를 알아봤다는 게 김 지부장의 설명이다. 그는 “희망연대노조는 비정규직 전문이고 정책·조직적으로 잘 단련돼 있어서 뜻이 맞았다”고 했다.

▲ 지난 15일 고 김광일, 박환성 PD 1주기 추모행사에서 김두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왼쪽)과 송호용 한국독립PD협회장이 공동성명서를 읽고 있다. 사진=독립PD협회
▲ 지난 15일 고 김광일, 박환성 PD 1주기 추모행사에서 김두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장(왼쪽)과 송호용 한국독립PD협회장이 공동성명서를 읽고 있다. 사진=독립PD협회

방송스태프지부는 공식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지난 15일 서울 방송회관에서 열린 고 김광일·박환성 PD 1주기 추모제에서 공동성명서를 김두영 지부장과 송호용 한국독립PD협회장이 함께 읽었다. 망가진 방송생태계를 외면해 온 방송사나 제작사에 책임을 묻겠다는 뜻이다. 김 지부장은 “모든 스태프가 감독급이 아닌 방송사·제작사와 직접 근로계약서를 써야 한다”고 말했다.

김 지부장은 최근 제작환경이 열악하다는 제보를 받고 KBS와 한 드라마제작사에 공문을 보냈다. 지난 4일 노조 출범 이후 정식으로 처음 요청한 면담이다. 다음주중에 테이블에 앉을 예정이다. 김 지부장은 “7월1일부턴 바뀌어야 하지 않느냐는 현장의 목소리가 모두 묵살됐다”며 “이제 시작이다. 제1호 성과를 내보려 한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