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와 삼성전자 직업병 피해자 지원 단체 반올림은 조정기관이 마련할 중재안 수용을 최종 약속했다. 조정기관에 대한 신뢰를 전제로 내용이 어떻든 중재안 자체를 받아들인다는 위임 약속이다. 삼성전자 직업병 문제 해결을 두고 10년 간 이어진 장기 투쟁이 일단락됐다.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과 삼성전자는 24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법무법인 지평 사무실에 모여 삼성전자·반올림·조정위원회(삼성전자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 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 간 중재합의서에 최종 서명했다. 조정위가 구성된지 4년 만, 양측 대화가 시작된지 5년 만이다.

▲ 삼성전자·반올림·조정위원회 중재합의서. 사진=민중의소리
▲ 삼성전자·반올림·조정위원회 중재합의서. 사진=민중의소리

합의 골자는 두 달 여 뒤 조정위가 낼 최종중재안을 사전에 수용하는 것이다. 조정위는 지난 1월부터 삼성전자와 반올림의 입장을 확인하는 등 조정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조정위는 입장 조정으로는 합의를 이끌어내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중재방식을 권고했다. 양 측이 중재방식에 동의해 23일 공개 서명식이 열렸다.

조정방식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배경엔 2015년 1차 조정의 실패 경험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2014년 12월 구성된 1차 조정위는 2015년 7월 독립기구인 공익법인을 설립해 피해자 보상과 재발방지책 총괄을 맡길 것을 권고했다. 반올림은 큰 틀에서 수용했으나 삼성전자는 반대했다. 양 측은 △보상 △사과 △재발방지책 수립 등에서 큰 의견 차를 보여온 터였다. 이후 삼성전자가 조정권고안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보상을 진행하면서 양 측은 3년 넘게 대립해왔다.

직업병 피해자는 서명 전 삼성전자를 향해 쓴소리했다. 13년 전 백혈병에 걸려 숨진 딸을 둔 황상기씨는 “유미(고 황유미씨)가 백혈병에 걸려 치료받던 중 사표를 쓰는 과정에서 내 돈 치료비 일부 5천만원을 준다고 하고선 사표를 받아간 다음에 5백만원을 줬다”며 “대기업이 자기 회사에서 일하다가 화학약품에 의해서 백혈병에 걸려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한 약속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버리면 안된다“고 말했다.

황씨는 “돈 없고 힘 없고 가난한 노동자”라 이어 말하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작업현장에서 화학약품에 의해 병들고 죽어간 노동자를 10년 넘도록 해결하지 못한 것은 참으로 섭섭한 일”이라며 “정부도 회사도 존재하는 이유를 안물어 볼래야 안 물어 볼 수가 없다”고 밝혔다.

▲ 반올림 대표로 나선 황상기씨가 서명식에서 발언을 하던 중 눈물을 흘렸다.
▲ 반올림 대표로 나선 황상기씨가 서명식에서 발언을 하던 중 눈물을 흘렸다.
▲ 황상기씨가 작성한 입장문. 황씨는 이를 서명식 종료 후 기자들 앞에서 읽었다. 사진=반올림
▲ 황상기씨가 작성한 입장문. 황씨는 이를 서명식 종료 후 기자들 앞에서 읽었다. 사진=반올림

중재안 수용을 약속한 이유로 양 측은 사회적 필요성과 조정위에 대한 신뢰를 말했다. 서명에 나선 김선식 삼성전자 전무는 “중재방식 수용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완전한 문제 해결만이 발병자 및 가족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사회적으로 가치있는 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라 밝혔다.

반올림 측은 “조정위가 처음 출범할 때부터 이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인식하고 해결책을 마련하겠다 하신 약속을 믿기로 했다”고 밝혔다.

김지형 조정위원장은 “앞으로 보상, 사과, 재발방지 및 사회공헌 등의 사항에 관해 중재안을 마련할 것”이라며 “중재안엔 산업안전보건 문제의 불확실성에서 비롯되는 직업병 발병의 위험에 실효적으로 대처하는 방향까지 담는 방안을 모색해 볼 것”이라 밝혔다.

황씨는 합의서 서명 후 기자들과 만나 “노동자들이 이렇게 많이 병들고 죽는데도 끝까지 책임회피하면서 10년이 넘도록 있다가 이제야 미흡하게 해결하는 것은 정말 섭섭하고 못난 삼성”이라고 비판했다. 황씨는 또한 “삼성노동자가 각종 화학약품으로 병들고 죽어가는데 삼성반도체 공장 근로감독이나 처벌을 한 번이라도 해본 적이 있느냐. 정부가 노동자 문제에 소홀한 점 너무너무 섭섭하다”고 밝혔다.

조정위는 중재안 마련을 위해 산하에 자문위원회를 둘 예정이다. 반올림과 삼성전자는 자문위 구성에 관여하지 않는다. 중재안은 이르면 9월 경 나올 것으로 보인다.

반올림은 오는 25일 지난 1022일 간 유지한 농성장 철거를 시작한다. 중재합의서엔 합의가 이뤄진 후 수일 내 삼성전자 앞 농성을 해제한다는 의무가 적혀 있다. 반올림은 2015년 1차 조정 실패 후 삼성전자의 일방적인 보상 추진을 반대하며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노숙농성을 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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