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한반도를 중립국으로 만들자는 주장이 나왔다. 더는 주변 강대국이 한반도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게 해 평화를 유지하자는 아이디어다.

김동춘 성공회대 NGO대학원장은 남북정상회담 사흘 전인 지난 4월24일 한겨레 칼럼에서 한반도 중립화를 제안했다. 그는 “한반도는 그 지정학적 위치의 특성 때문에 주변 강대국 간의 패권 경쟁이 격심해지면 그것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며 “두 국가 체제의 공존, 한 국가 두 체제의 길을 모색하면서 주변국과 국제사회에 영세중립국으로서의 지위 보장을 받아내는 문제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립국 논의는 일본제국주의 등이 한반도를 침략할 20세기 초에도 국내 지식인들이 주장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지난달 29일 계간 ‘황해문화’와 한국냉전학회가 인천 인하대 정석학술정보관에서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중립국 논의를 국내 지식인 뿐 아니라 미국도 진지하게 논의했고, 현재 미국의 이해관계에도 부합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놨다.

남북·북미 정상회담이 이어지면서 북한의 체제보장과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자는 내용도 나왔다. 박 교수는 “막상 평화제제로 어떻게 이행할 것인가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고 했다. 평화체제 문제가 통일과 연결돼 있고, 남북 뿐 아니라 주변 열강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27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집앞에서 국군의장대 사열을 마친 후 정상회담장으로 이동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한국공동사진취재단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27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집앞에서 국군의장대 사열을 마친 후 정상회담장으로 이동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한국공동사진취재단

특히 남북 간 군사 불균형까지 해결해야 한다. 북한이 비핵화를 하더라도 한국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 있는데 북중관계가 한미관계와 달라 북한이 중국의 핵우산에 들어갈 가능성이 없으니 불균형이 해소가 되지 않는다는 게 박 교수의 분석이다. 한반도를 중립화하면 북한 체제를 보장한다는 남북·북미정상회담의 합의도 이룰 수 있고, 중립화가 비동맹 방식으로 이뤄지면 열강들의 입김이나 핵우산 문제에서도 자유로워진다.

미국, 한반도 중립화 검토

박 교수는 미국이 1950년과 1953년 한반도 중립화를 논의한 사실에 주목했다. 1950년 애치슨 국무부 장관이 안보라인에서 한반도를 제외한 것이 논란이 됐다. 박 교수는 ‘애치슨 라인’ 발언 뿐 아니라 애치슨 장관이 한반도를 미국이 아닌 국제기구를 통해 지원하겠다고 했는데 여기에 미국의 고민이 있었다고 했다. 재정 문제 때문에 부담스럽지만 외면하긴 아까운 지역이라는 딜레마에 빠졌다는 뜻이다.

1950년 10월19일 극동담당 법률부보좌관 대리였던 스노우는 극동국 기획보좌관 에머슨에게 ‘한국의 항구적 중립화’라는 제목의 문서를 보냈다. 문서 초안에는 유엔위원단이 소련을 포함해 여러 국가와 한국의 중립화를 추진하는 방안이 있었다. 중립화는 적국이 되는 것을 막고 다른 열강들에게 이용되는 것을 막는다. 당시 문서에선 스위스·벨기에·룩셈부르크를 예로 들었는데 스위스를 제외하곤 중립화 시도가 실패했다. 자체 군사력이 있어야 가능한 문제였다.

1953년 한반도 중립화가 다시 논의됐다. 1953년 6월15일 입안한 NSC 154문서를 보면 미국은 정전협정을 맺더라도 중국 등의 자유진영 공세는 지속될 걸로 예측했다. 한반도를 중립국으로 만들면 공산진영에 이용되지 않을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당시 브래들리 장군 등은 한국의 중립화가 비무장화를 가져올 수 있어 우려했지만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스웨덴처럼 미국 편에 있으면서 중립을 지킬 수 있다고 반박했다.

박 교수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급격하게 증가한 미국 국방비 부담을 줄이려고 정전협정 이후 심각하게 중립화를 논의했지만 이후 냉전이 격화하면서 중립화 논의가 나오지 않았다”며 “그럼에도 이후 주한미군을 감축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특히 미국 공화당이 정권을 잡았을 때 논의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그는 “한반도 중립화는 통일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주한미군 재정지출을 줄이는 게 목적”이라고 덧붙였다.

미국, 주한미군 감축 원해

박 교수는 “닉슨 행정부는 아이젠하워 집권기보다 더 급한 처지”였다고 했다. 베트남 전쟁으로 군사비 지출이 컸기 때문이다. 박 교수는 “(재정난으로) 닉슨 행정부가 1971년 금본위제를 중지하고 수입관세를 부과했다”며 “베트남에서 군을 철수하고 한국·태국 등의 미군의 철수·감축을 추진했다”고 설명했다.

닉슨 행정부는 주한미군 1개 사단을 감축하면서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 측 수석대표를 미군에서 한국군 장성으로 교체를 추진했다. 국내에선 미국의 이런 조치가 미군 철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고, 결국 군사정전위원회는 수석대표를 바꾸지 않기로 했다.

박 교수는 “닉슨은 아이젠하워와 달라 긴장완화를 통해 주한미군을 감축하려 해 마오쩌둥을 만났다”며 “한반도에서도 민간 수준에서 남북 접촉이 시작됐다”고 했다. 1970년 8월15일 박정희 대통령은 ‘평화통일구상’에서 남북 대화가능성을 거론했다. 이는 1971년 남북적십자 회담으로 이어졌다. 박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닉슨의 긴장완화 정책을 따라갈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 196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닉슨 미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대통령기록관
▲ 196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왼쪽)과 닉슨 미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사진=대통령기록관

박 교수는 “1968~69년 안보위기가 가장 심했던 시기인데 1년도 지나지 않아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해서 박정희의 ‘8·15선언’은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며 “이 과정이 사회적 합의로 진행되지 않고 정권이 독단으로 진행했기에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힘을 받지 못하고 유신으로 연결됐다”고 지적했다.

1989년 아버지 부시 행정부에서도 해외주둔미군 재배치 계획(GPR)이 나왔다. 레이건 행정부에서 냉전정책을 강화해 군사비가 급증해 이를 줄일 필요가 있고, 소련 붕괴로 냉전질서가 해체하자 군 전략의 재검토가 필요했는데 여기서 주한미군 감축이 중요하게 논의됐다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부시 행정부는 닉슨 행정부에서 추진했던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 수석대표를 한국군으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2000년대엔 한국에 작전권을 넘겨주는 문제도 부상했다. 하지만 아들 부시 때 북한 핵실험으로 주한미군 대규모 감축은 어려워졌다.

한반도 중립국 논의, 지금부터 해야

박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과 일본 정부가 미군주둔 부담비율을 늘리지 않으면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했는데 평택에 미군기지를 저렇게 지어놓고 어떻게 나가겠느냐”며 주한미군 철수는 어려울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이전 공화당 정부처럼 군사부담을 줄이기 위해 중립화가 매력적인 카드일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박 교수는 “50년 전 한국의 국력과 지금 국력은 다르고, 북한도 50년 전과 지금의 북한은 다르다”고 했다. 미중이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고, 북한은 지금도 사실상 중립화 상태로 볼 수 있다며 과거 어느 때보다 중립화가 현실화했다고 봤다. 박 교수는 “한국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10여년, 베트남전 이슈화도 15년 정도 걸렸다”며 “앞으로 계속 중립화를 제안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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