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과 북, 그리고 북과 남에서 기자생활을 경험한 전 세계 유일한 인물. 그녀가 다시 언론계로 돌아왔다. 3년만이다. 경영진의 보도탄압으로 2015년 10월 회사를 떠났던 최선영 연합뉴스 북한전문기자가 연합뉴스 경영진 교체 이후 최근 재입사했다.

최 기자는 지난 2009년 1월 장용훈 연합뉴스 기자와 함께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일의 후계자가 3남 김정은’이라고 특종한 것으로 유명하다. 정부 당국보다 먼저 해당 사실을 알았다는 이유로 국정원이 최 기자를 사찰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최 기자는 자유롭게 기사를 쓸 수 없다면 떠나겠다며 사표를 내기도 했지만 동료들이 말렸고, 경영진은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이 언론탄압을 시작했지만 당시 경영진은 언론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있었다고 최 기자는 회상했다.

남북관계가 단절되고 언론탄압이 가속화하는 중에도 보도자율성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지난 2015년 봄 박노황 사장이 취임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박노황 경영진은 첫 인사에서 동료 전문기자인 장 기자를 산업 전문 월간지를 만드는 동북아센터로 발령냈다. 연합뉴스 홈페이지에서 장 기자의 기사가 사라졌다. 혼자 남은 최 기자는 수차례 감사를 받거나 경위서 제출요구를 받았다. 그는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말을 남기고 같은해 10월30일자로 사직했다.

정권이 바뀌고 지난 3월 연합뉴스 새 경영진이 들어섰다. 새 경영진은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최 기자에게 재입사를 요청했고 그는 지난달 임시로 복귀해 정상회담을 취재했다. 지난 1일 최 기자는 북한을 취재하는 통일외교부 기자로 정식발령을 받았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10일 서울 종로 연합뉴스에서 최 기자를 만나 그간의 이야기를 들었다. 최 기자는 “한반도 비핵화가 논의되고 평화로 가는 대전환 시기에 기사를 쓸 수 있는 게 행복하다”고 다시 펜을 든 소감을 밝혔다.

MB 정권, 전방위 압박

“(김정은 후계자 특종은) 당시 청와대·국정원에서 모두 아니라고 했어요. 기사 나갈 때부터 태클이 들어왔고요. 장용훈 기자가 일본을 통해서도 확인했는데… 한국 정부만 몰랐던 거죠.” 정부에서 ‘김정은 후계자 특종’을 전면 부인해 한국기자협회에서 주는 한국기자상은 한해 뒤인 2010년에야 대상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녀는 관훈언론상·한국신문상·삼성언론상 등을 휩쓸었다.

▲ 최선영 연합뉴스 북한전문기자. 2010년 1월 관훈언론상을 받는 모습. 사진=최선영 제공
▲ 최선영 연합뉴스 북한전문기자. 2010년 1월 관훈언론상을 받는 모습. 사진=최선영 제공

밖에선 능력을 인정받았지만 사내에선 오히려 2010년 5월 비취재부서인 데이터베이스 부서로 발령을 받았다. 최 기자의 북한발 기사를 불편해하는 이가 적지 않았다는 게 언론계에 알려졌다. 같은해 7월 최 기자의 남편이 몸담고 있는 국정원 산하 연구기관 책임자가 한 말은 논란이 됐다. 최 기자 부부가 여행을 위해 보고하자 책임자는 남편에게 ‘최 기자가 국정원 내사를 받고 있어 출국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최 기자는 “당시 일은 사실”이라며 “나와 남편에게 전방위로 압박했다”고 말했다. 국정원은 사찰 의혹을 부인했다. 신동아 등 당시 보도를 보면 이명박 정권 들어 국정원이 무능하다는 이유로 청와대와 국회의 질타를 받고 있었다. 중요한 정보가 국정원이 아닌 언론보도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최 기자는 국정원 사찰 사실을 알았을 때 “멘붕”이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기자들 눈치를 보던 경영진이 있었다.

탄압하는 정권보다 부역하는 경영진이 더 문제

연합뉴스는 이명박·박근혜 정권 하에서 박정찬(2009~2013)·송현승(2013~2015) 사장이 거쳐 갔다. 최 기자는 해당 경영진을 ‘엄혹한 시절에 최소한의 양심은 지키려던 경영진’으로 기억했다. 2015년 3월 취임한 박노황 사장이 기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박 전 사장은 취임하자마자 현충원을 방문하고 사옥 앞 태극기에 국기게양식을 하는 등 기이한 행동을 보였다. 최 기자는 “정권도 문제지만 경영진에 따라 언론의 본분을 유지할 수도 있다”며 “박노황 사장은 언론인으로서 양심 같은 게 없었다”고 평가했다.

▲ 2015년 3월30일 오전 박노황 당시 연합뉴스·연합TV 사장(맨 오른쪽)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2015년 3월30일 오전 박노황 당시 연합뉴스·연합TV 사장(맨 오른쪽)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그때 사내에 경위서 안 쓴 사람 거의 없을 겁니다. 지방발령 받은 사람도 많고. 박 사장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북한부 기사가 박근혜 정부와 맞지 않는다’, ‘쟤네(최선영·장용훈 기자)는 들어내야 한다’고 말했어요. 저도 감사를 몇 번 받았는지 모르겠어요.”

이런 식이었다. 최 기자가 공휴일 근무일을 착각해 편집회의에 참가 못하자 경영진은 ‘고의로 불참했다’며 경위서를 쓰게 했다. 그는 “난 보직에도 관심이 없고 기사를 어떻게 하면 잘 쓸까 고민하며 기사 쓰는 낙으로 살았다”며 “선배들에게 ‘경영진이 몇 사람을 타깃 삼고 있는데 너도 속해있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감사 결과 징계거리가 나오지 않자 ‘태도’를 문제 삼았다.

북한 보도는 망가졌다. 확인 안 된 사실을 인용하거나 찌라시 수준의 방송을 베껴야 했다. 사내외에서 비판이 쏟아졌다. 사내 미디어전략팀에선 이를 담은 보고서를 만들었다. 그러자 경영진은 해당 부서 책임자에게 경위서를 쓰게 하고 ‘최 기자와 짜고 만들었다’고 공격했다. 박노황 경영진이 들어온 지 6개월 만에 그는 사표를 썼다. 사표는 기다렸다는 듯 두 시간 만에 수리됐다.

“경영진이 바뀌더라도 정권이 그대로 있다면 똑같을 거 아니예요. 그 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고 대통령을 탄핵해 새 세상이 올 줄 전혀 몰랐어요. 당연히 정권이 연장할 줄 알았어요. 박노황 사장에게 줄섰던 이들은 ‘분단이 있는 한 영원히 집권하니 지금 경영진에 잘 보여야 한다’고 대놓고 말했어요. 희망이 없었죠. 접어야 할 때구나.”

20년 만에 휴식, 그리고 재입사

최 기자는 탈북해 1996년 1월 한국에 왔다. 북에서 기자로 일했던 경험 덕에 같은해 가을 내외통신에 입사했다. 1999년 국정원 산하에 있던 내외통신이 연합뉴스에 흡수됐다. 북한에서 한국으로, 북한 기자에서 한국 기자로, 내외통신에서 연합뉴스로 이동을 거듭했다. 새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이 살아왔다. 그는 퇴사 당시 동료들에게 “한국에 온지 어언 20년, 참 치열하게 살았다”고 사직인사를 전했다.

퇴사 이후 어떻게 지냈을까. “너무 힘들어서 병원을 다녔죠. 엄청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 하더라고요. 타사에서 콜도 왔는데 그건 싫더라고요. 아예 접었는데. 2년반 동안 여행 많이 다녔어요. 멍 때리면서 놀고 싶더라고요.”

새 정권이 들어서고 박 전 사장이 물러났다. 동료들이 ‘다시 돌아오라’고 했지만 ‘뭘 이제 와서 돌아가나’ 싶었다고 했다. 지난 1월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남북관계가 진전됐다.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요. 엄청난 변화가 오겠구나.” 최 기자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동생 김여정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내려올 때 변화를 예감했다. “토씨하나 안 틀리고 다 듣고 싶은 거거든요. 다른 사람이 오면 일부 거르고 보고할 수도 있잖아요.” 동시에 기사를 쓰고 싶다는 욕구도 생겼다.

조성부 신임 사장이 지난 3월 취임하자마자 회사에서 최 기자에게 연락을 했다. 4월1일부터 출근했다. 남북정상회담을 전했다. “엄청 고마워요. 기자로 들어온 게 행복하죠. 2년 반동안 놀아서 그런가(웃음). 기사를 쓸 수 있다는 게 행복하고, 좋은 기사를 쓰면 여운이 며칠 가네요.” 최 기자는 전문기자를 다시 신청할 계획이다.

김정은식 경제성장 들여다 보고싶어

앞으로 어떤 기사를 쓰고 싶은 걸까. 최 기자는 최근 정세변화와 북한 경제 발전모습을 전하고 싶다고 했다. “일단 북미관계를 어떻게 가져갈지 제일 궁금해요. 북미관계를 해결하면 IMF 등 세계금융체제 지원을 받고 한국·중국·일본 나아가 유럽의 자본이 들어가 경제성장을 할 수 있겠죠.”

그는 김정은의 리더십이 아버지와 전혀 다르다고 분석했다. “김정일은 좋게 보면 신중하지만 나쁘게 보면 꼼수를 쓰죠. 미국과 잘해보고 싶지만 이해관계만 챙기는. 김정은은 다릅니다. 현재까지는 전향적이죠.” 그는 경제성장 의지가 강하다고 판단한다. “박정희식 개발독재로 경제성장하고 싶은 욕망이 있어 보어요. 박정희 향수가 있듯 북한도 성공한다면 김정은이 영웅이 되지 않을까요.”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27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집앞에서 국군의장대 사열을 마친 후 정상회담장으로 이동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한국공동사진취재단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27일 오전 판문점 평화의집앞에서 국군의장대 사열을 마친 후 정상회담장으로 이동하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한국공동사진취재단

최 기자는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는 방향이 아닌 평화와 화해를 추구하는 기사를 쓰고 싶다고 했다. 또한 열심히 공부하되 모르는 내용을 섣불리 쓰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도 그랬죠. 북한은 보안이 철저해 자기가 일하던 분야 말고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그분도 그랬는데 다른 탈북자의 말을 너무 신뢰해선 안 되죠. 몇 년 전만해도 김정은 이복누나 김설송이 김정은 체제에서 실세로 활약하고 있다는 보도가 많았어요. 북한 권력층을 조금만 알아도 터무니없다는 걸 알 수 있죠. 엄마가 다른 자식은 배제당하거든요.” 북한 전문기자를 양성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북한 기자, 북한 기사

최 기자는 북에서도 7년 간 기자생활을 했다. 평양에 있는 김일성종합대학 조선어문학부 문학과를 졸업하고 문학신문, 현대조선문학 등에서 일했다. 캠퍼스커플로 만난 남편은 북 외무성에서 일하다 최 기자와 함께 한국에 왔다.

▲ 4월27일 일산 킨텍스 메인프레스센터에서 생중계되는 남북정상회담 화면. 북측 사진기자가 '기자'라고 써있는 빨간색 띠를 두르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 4월27일 일산 킨텍스 메인프레스센터에서 생중계되는 남북정상회담 화면. 북측 사진기자가 '기자'라고 써있는 빨간색 띠를 두르고 있다. 사진=이치열 기자 truth710@

북한에선 어떻게 기자가 될까. 전공에 맞게 입사시험을 보는지, 인기는 있는지 등을 물었다. 최 기자는 손을 휘저었다. “노동당에서 배치하는 겁니다. 사회인문대는 김일성대 밖에 없으니까 기자들이 많이 배출되긴 하죠. 노동당 간부들이 김일성대 학생들을 나누죠. 중앙당에서 일할 사람, 지방으로 가는 사람, 중앙언론사로 갈 사람을 구분해요. 지망을 써내긴 하지만.” 당의 판단이 개인의 선호를 우선했다.

“여자들에겐 기자가 인기가 있었는데 남자들에겐 인기가 없었어요. 우리 나이 대는 여자들이 갈 수 있는 자리가 많지 않았어요. 기득권층은 남자들이 주로 가니까. 그래서 제 또래는 여기자가 굉장히 많아요.”

당시 당 기관지·내각 기관지 등 중앙 언론 몇몇을 제외하곤 출판사 내부에 신문사가 있었다. 최 기자는 작가를 취재하는 등 신문 업무를 하다가 이후엔 출판 편집 업무를 했다. 적성에 맞았느냐고 물었다. “그냥 했어요. 그때는 모르고 했어요. 즐거움이나 성취감이 있어야 하는데 적성에 맞는다는 것도 모르고 당에서 배치를 하니까 한거죠.”

한국에서 기자가 된 뒤 새로운 난관에 가로막혔다. 기사체가 완전히 달랐다. “한국은 보통 핵심을 처음에 쓰고 뒤로 가며 덜 필요한 걸 쓰는데 북한은 처음은 서론, 핵심은 마지막에 있어요. 설명 중복도 많고 미사여구를 많이 써요. 문학신문에서 일했으니 미사여구가 더 많죠. 지금도 북한 중앙언론을 보면 복합문장이 많고 한 문장에 네줄도 기본이죠.”

유난히 문장이 길고 미사여구가 많은 북한 문학신문에서 일하던 그가 한국에서도 가장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이 기사를 쓰는 연합뉴스에 온 것이다. “새롭게 정착하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자신감이 뚝뚝 떨어지고. 주변에 관심을 쏟을 수가 없었어요. 오죽하면 광우병 소고기 파동이 뭔지도 몰랐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도 그날 아침에 알았으니까.”

정치는 자신과 관련 없는 줄 알았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선 그래도 괜찮았다. 이명박 정권 들어서면서 국정원이 왜 자신을 사찰했는지, 한국사회가 왜 북한 보도를 악용하는지 공부하게 됐다. 최 기자는 “전에는 북한 싫어서 왔으면 보수라고 해서 그런 줄 알았다”며 “이젠 세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명박·박근혜 정부도 내겐 필요한 시기였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산전수전 겪었으니 이젠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않았을까. “한번은 운전하고 가다가 술취한 사람이 앞에서 차를 막고 안가는 거예요. 그 옆에 경찰이 있어서 도움을 요청했죠. 그랬더니 술취한 사람이 제 말투를 듣고 ‘조선족이네, 불법체류자 경찰이 데려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탈북자를 향한 삐딱한 시선이 불편해요.” 적응해야 하는 사람은 탈북자가 아니라 이들을 맞이하는 한국인이다.

최 기자는 주요 언론사에 입사한 첫 탈북자다. 그는 “계약직 기자로 일하는 탈북자가 있다고 들었다”며 “앞으론 탈북자들이 보직도 받고 제대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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