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재위 11년인 1787년 예문관에서 숙직 하던 노론 시파의 신진관료 김조순과 이상황이 ‘평산냉연’이란 소설을 읽다가 정조에게 들켰다. 평산냉연은 요새 말로 ‘하이틴 로맨스’ 소설이다. ‘평, 산, 냉, 연’이란 네 명의 꽃미남과 꽃미녀가 등장하는 청나라의 유명한 연애소설이었다. 배웠다는 선비들이 밤새 로맨스 소설을 탐독했으니 정조는 기가 막혔다. 정조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책을 불태우라 명했다. 문체반정의 서막이었다.

정조는 호학(好學)군주였지만 그것은 오롯이 성리학의 질서 안에서만 작동했다. 정조는 새로운 문체의 불가역적 확산을 부정하며 역사의 시계를 되돌리려 했다. 김조순과 이상황, 남공철, 심상규 등 노론은 바짝 수그렸다. 이상황은 패관소설을 비난하는 시를 지어 정조께 바쳤다. ‘오패검협전’이란 무협지까지 직접 썼던 김조순도 정조 앞에 납작 엎드렸다. 정조는 ‘열하일기’를 배후로 지목해 박지원에게 반성문을 요구했다. 다른 노론과 달리 박지원은 끝내 반성문을 쓰지 않았다. 남인 출신 이덕무는 반성문을 쓰다가 죽었고, 이서구는 아예 대들었다.

대들었거나 엎드렸거나 문체반정은 유야무야 될 수밖에 없었다. 5언 율시, 7언 율시 같은 캐캐묵은 문장이 다가오는 19세기를 뒤로 돌릴 순 없었다. 늘 사상탄압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다.

▲ 조선의 제 22대 왕 정조
▲ 조선의 제 22대 왕 정조
다만 성균관 유생 이옥에게 정조의 문체반정은 지나치게 가혹하고 집요했다. 시종일관 수난 받은 건 이옥뿐이었다. 이옥은 죄인을 변방의 사병으로 근무시키는 유배와 비슷한 ‘충군’과 과거에서 1등을 하고도 낙제 처리까지 당하며 8년 동안 문체반정의 화살받이를 혼자 도맡았다.

정조는 보잘 것 없는 서얼 출신에, 소북이라지만 당색이랄 것도 없던 이옥에게 자신의 분노를 쏟아부었다. 연암과 다산이란 큰 별에 비해 이옥은 작고 초라했다. 이옥은 16년 동안 과거를 준비하면서 무려 7번이나 낙방했다. 의연히 과거를 거부했던 있는 집 출신의 연암과 달리 이옥은 절박했다. 이옥은 31살 1790년에 증광시에 2등으로 합격해 대과를 준비하며 1792~1795년까지 성균관에 머물렀다. 정조는 1792년 10월 성균관에 내린 시험 답안을 검토하다가 이옥을 불러 불경스런 문체를 사용했다고 화를 내며 정통문체에 맞는 시 50수를 지어라고 벌했다. 두 달 뒤 성균관 시험 때도 정조는 다시 이옥의 답안을 문제 삼아 10일 동안 율시 100편을 지어 바치라고 했다.

3년 뒤 1795년 성균관 백일장에서도 정조는 이옥의 문체를 시비 걸며 대과를 보지 말라고 명하고 충청도 청양군에 충군시켰다. 이옥이 다시 과거시험에 응시하자 정조는 다시 경상도 봉성(지금의 합천군)으로 충군시켰다. 임금이 그러거나 말거나 이옥은 꾸역꾸역 과거시험을 보러 왔다. 이옥은 정조 20년 1796년 2월 별시에 응시해 수석을 차지했지만 정조의 명으로 낙제 처리됐다. 정조는 죽기 직전 1800년 2월에서야 이옥을 사면했다.

이옥은 정조에게 찍힌 뒤에도 결코 자신의 문체를 버리지 않았다. 충군과 저항을 반복하면서도 이옥은 덤덤하게 자신의 글을 썼다. 그의 글 어디에도 북받치는 설움이나 터질 듯한 원망은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반성하는 기미도 없었다. 정조는 세 번을 지적했지만 이옥은 세 번 다 ‘개겼다’.

1800년 완전 사면된 이옥은 과거를 포기한 채 고향 화성에서 여전히 자신의 문체로 글을 썼고, 넉 달 뒤 정조는 죽었다. 겉으론 정조가 이겼지만 사실은 이옥이 이겼다.

이옥이 1800년 5월에 쓴 작품집 ‘봉성문여’는 봉성에 충군 가서 본 세상 관찰일기다. 봉성은 지명이지만, 문여(文餘)는 ‘정통 문장이 아닌 나머지 문장’이란 뜻이다. 말 그대로 ‘아웃사이더 글쓰기’다. 이옥은 세밀한 관찰력으로 당시 지방의 복식과 방언, 풍습을 맛깔나게 기록했다.

이옥의 글은 거창한 대항담론이 아니었다. 그의 글은 거대 담론으로는 결코 잡을 수 없는 미세한 욕망을 잡아내는 새로운 감수성을 담았다.

이옥과 같은 시기 문체반정에 휘말렸지만 금세 변절해 임금의 사람이 된 김조순은 정조시대엔 정조의 사람이었다가, 순조시대엔 정순왕후의 칼끝마저 피해 임금의 장인이 되는 요술을 부릴 만큼 처세술이 뛰어났다. 정권을 장악한 김조순은 안동 김씨 ‘60년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었다.

비슷한 출발점에 섰던 젊은 이옥과 김조순의 말년은 하늘과 땅 만큼 달랐다. 정조와 순조, 어떤 권력과도 타협하지 않았던 이옥의 글쓰기에서 지식인의 역할을 고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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