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환성PD가 살아있었다면 분노했을 공정위 결정
박환성PD가 살아있었다면 분노했을 공정위 결정
박PD, 지난해 EBS 간접비 강요 문제제기 폭로…공정거래위원회, 11개월 만에 ‘무혐의’ 판단

고 박환성·김광일 독립PD 사망 이후 방송계 불공정을 개선하겠다며 나선 공정거래위원회(위원장 김상조, 이하 공정위)가 ‘EBS가 간접비를 요구했다’며 지상파의 갑질 의혹을 폭로했던 박 PD의 생전 신고 건과 관련, EBS 무혐의로 심사를 종료했다. 박 PD 유족과 독립PD들은 공정위가 무성의한 태도로 시종일관 조사에 임했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박 PD 동생 박경준씨가 지난 2일 통보받은 공정위의 ‘한국교육방송공사(EBS)의 거래상 지위 남용 행위에 대한 건’ 조사 결과에 따르면 공정위는 EBS가 박환성 PD(블루라이노픽처스 대표)–한국전파진흥협회(RAPA) 간 계약에 ‘지식 재산권이 EBS에 있다’고 수정을 요청한 것이 공정거래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 촬영 중인 박환성 PD 생전 모습. 사진=박환성 페이스북
▲ 촬영 중인 박환성 PD 생전 모습. 사진=박환성 페이스북
앞서 박 PD는 EBS 다큐프라임 ‘야수와 방주’ 편을 찍기 위해 EBS에 제작비 2억1000만원을 신청했지만 EBS는 7000만원이 부족한 1억4000만원을 지원했다. 제작비가 부족해 고민하던 박 PD는 ‘2017년 차세대 방송용 콘텐츠(UHD) 제작 지원 사업’에 선정돼 RAPA로부터 제작 지원금 1억2000만원을 받게 됐다.

박 PD가 지원금을 받게 되자 EBS는 박 PD와 RAPA가 계약한 협약서에 ‘모든 지적 재산권은 방송사업자에 양도할 수 있다’는 문구를 넣을 것을 요구했다. 이를 두고 공정위는 “박 PD가 EBS와 2016년 8월 맺은 외주제작계약에 따르면 지식재산권이 EBS에 있으며 EBS가 박 PD에게 RAPA 협약서상 지식재산권 관련 내용을 수정·보완할 것을 요청한 것”이므로 “공정거래법에 위반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된다”며 무혐의 처분했다. EBS 역시 “해당 협약 전 이미 EBS가 전액 제작비를 집행하고 제작하기로 계약 완료됐다”며 “RAPA 협약서에 이 내용이 반영되지 않아 수정을 요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정위는 박 PD가 RAPA에서 받은 정부 제작지원금의 40%를 EBS가 간접비로 요구했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간접비를 강요했다고 볼만한 정황을 확인하기 어려워 판단이 불가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박경준씨는 12일 기자와 만나 “형이 EBS와 계약을 위반했다는 걸 전제하고 나온 결과 같다”며 “계약위반 여부는 진상 조사로 밝혀야 할 부분”이라고 밝혔다.

EBS는 박 PD가 RAPA 제작지원 신청과 관련해 EBS와 사전 협의를 한 사실이 없다며 박 PD를 문제 삼고 있다. 하지만 박 PD와 김아무개 EBS 편성PD와의 통화 녹취록에 따르면 박 PD는 “(제작비) 깎인 부분은 내년 초에 한국콘텐츠진흥원이나 RAPA에 (제작비 지원을 신청해) 충당하면 어떻겠느냐고 김 PD님이 말씀해주신 게 기억난다”고 말한 대목이 등장한다. EBS PD의 제안으로 박 PD가 정부 제작지원금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는 지점이다.

EBS는 이 사건에서 정부 제작지원금을 ‘협찬금’이라며 지원금의 40%인 4800만원을 선납하라고 요구했다. 협찬금의 40%를 방송사에 주고 40%를 제작비, 20%를 제작사 인센티브로 사용하도록 돼 있는 EBS의 ‘외주제작사 상생 협력 방안’이 근거였다. 하지만 박 PD가 EBS에 보낸 내용 증명에 따르면 박 PD는 “해당 계약서에 ‘외주제작사 상생 협력 방안’이 첨부돼 있거나 박 PD에게 확인해준 사실이 전혀 없다”며 “RAPA의 정부 제작 지원금이 협찬금에 해당한다는 법적 근거도 없다”고 주장했다.

▲ 지난해 6월 박환성 PD가 국민신문고에 올린 민원 중 일부.
▲ 지난해 6월 박환성 PD가 국민신문고에 올린 민원 중 일부.
실제로 EBS 계약서 내 협찬 관련 부분은 정부가 권고하는 표준계약서와 차이가 있다. 방송 프로그램 제작 표준계약서 제15조(제작협찬) 4항에는 “방송사는 제작사에 무리한 협찬을 강요해선 안 되며 계약 후 제작사의 협찬 유치에 대해 방송사는 추후에 기 책정된 제작비를 감액해선 안 된다”고 돼 있다. 박 PD는 “정부지원금은 1원도 빠짐없이 작품 제작에 사용돼야 하는데 40%나 간접비로 입고시키면 빈 액수는 정부 측에 어떻게 보고 하느냐”며 문제제기에 나섰다.

박환성·김광일 PD가 지난해 7월 남아공 취재현장에서 사망한 이후 독립제작사 제작비를 후려치는 지상파 ‘갑질’ 논란이 커지자 EBS는 ‘외주제작사 상생 협력 방안’을 개정해 정부지원사업의 제작비 지원을 받을 경우엔 전액 제작비로 집행하는 규정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 PD 생존 당시 EBS측은 “이 건은 계약 위반이 맞고 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상당히 고민”이라며 “못 받아들이겠다고 하면 그땐 계약해지로 가겠다”고 말했다. EBS가 송출하는 조건으로 계약한 상황에서 박 PD 입장에서는 ‘압박’을 느낄 수 있는 발언이었다.

앞서 EBS 편성기획부 백아무개 PD는 박 PD에게 “협력제작업체 상생방안 기준에 의해 1억2천 수탁금에 대해 20% 인센티브, 40% 제작비 투여, 40% EBS 간접비 환수로 진행된다고 합니다. 제가 드린 말씀은 비공식적으로 상황을 알려드린 것으로 간주하시고 최아무개·유아무개 부장과 협의하십시오”라고 문자를 보냈다.

▲ 공정거래위원회
▲ 공정거래위원회
이에 공정위는 “박 PD가 EBS의 제작 지원금 지급 요구 근거로 제시한 자료는 EBS의 담당 부서(콘텐츠협력제작부)가 아닌 다른 부서(편성기획부) PD에게 외주 제작사 상생 협력 방안을 문의한 데 대한 단순 안내 문자”라며 “그 외 EBS가 박 PD에게 간접비를 강요했다고 볼만한 정황이 없어 더 이상 확인이 어렵다”고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이 사안에 밝은 한 독립PD는 “EBS의 ‘외주제작사 상생 협력 방안’이 법적 근거가 있거나 제작사와 방송사가 합의해서 만든 게 아니”라고 지적한 뒤 해당 문자에 대해서도 “우월적 지위에 있는 갑이 을에게 보낸 문자가 단순 안내 문자일 수 있느냐”고 주장했다.

박 PD는 ‘야수와 방주’ 편을 찍기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출국하기 전인 그해 7월 공정위 담당자에게 사건을 적극적으로 처리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첫 신고를 했던 지난해 5월 이후 11개월 만에 나온 결론은 박 PD의 기대와 달랐다. 박경준씨는 지난 2월 자신의 형과 공정위 측이 주고받은 이메일을 뒤늦게 발견하고 “이메일에 형이 실망하고 좌절한 내용이 있었다”며 “공정위가 원래부터 이 사건을 질질 끌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기사를 후원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