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진창입니다.”

지상파방송사 상품권 협찬 대행사 전 대표인 A씨의 말이다. 지난 23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A씨는 “KBS는 방송사가 내야 할 세금(부가가치세)을 대행사에 전가하고 납부한 상품권보다 적은 금액을 장부에 기록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독립제작 인력의 임금으로 현금 대신 ‘상품권’을 지급해 비판을 받아온 지상파 방송사가 정산 방식이 불투명한 협찬의 맹점을 이용해 장부를 조작했다는 것이다. KBS는 답을 내놓지 않고 있다.

A씨의 대행사는 KBS를 비롯한 지상파 방송사에 패널 광고 협찬 대행을 담당해왔다. 패널 광고는 방송 막바지에 “프로그램에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XX회사에서 백화점 상품권을”이라는 문구와 배너가 함께 등장하는 광고를 말한다. A씨의 대행사는 특정 프로그램의 패널 광고가 들어갈 자리를 수주한 뒤 이 곳에 광고를 할 회사로부터 돈을 받고 상품권을 구입하고 배송하는 방식의 대행 영업을 해왔다.

 

 

 

 

▲ 지난 23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상품권 협찬 관행 공익제보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이치열 기자.
▲ 지난 23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상품권 협찬 관행 공익제보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이치열 기자.

 

 

 

 

A씨는 KBS에서 업무를 할 때마다 이상한 점을 느꼈다고 했다. 자신들이 수주한 상품권 금액 100만 원을 KBS에 입금한 다음 KBS 전산시스템을 보면 계산이 다르게 나왔기 때문이다. KBS는 100만 원을 받고선 70만~80만 원을 받은 것처럼 기재했다. 이 뿐 아니라 대행사는 KBS가 내야 할 세금 10%를 ‘대납’했지만 KBS 전산시스템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파료’라는 명목으로 입력됐고, KBS는 자신들이 세금을 낸 항목을 별도로 기재했다.

2016년 8월 KBS 예능프로그램 ‘해피선데이 슈퍼맨이 돌아왔다’ 정산 내역을 보면 KBS가 발행한 세금계산서에는 KBS가 A씨 회사로부터 234만2829원을 수주한 것으로 나온다. 여기에 KBS는 세금 23만4289원을 추가로 납부했다. 그런데 A씨가 소속됐던 업체의 전산 내역을 보면 상품권 비용 280만 원(70만 원씩 4주)을 KBS에 냈으며 ‘전파료’ 명목으로 28만 원을 입금해 총 308만원을 납부한 것으로 돼 있다.

여기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 방송사가 부담해야 할 세금을 대행사에 떠넘기면서도 KBS가 세금을 납부한 것처럼 명시한 것, 대행사가 낸 세금을 세금이 아닌 ‘전파료’명목으로 기재한 것, 그리고 KBS가 실제 수주한 상품권 금액보다 적은 금액을 ‘축소신고’한 것. 지상파 3사에서 상품권 협찬 계약 업무를 했지만 이런 경우는 KBS 뿐이었다고 A씨는 밝혔다.

“특정 프로그램 이름을 말하기 힘들다.” 몇 개의 프로그램에서 이 같은 관행이 이어졌는지 묻자 A씨는 이렇게 답했다. “상품권 협찬을 받는 모든 프로그램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다. ” 다수 KBS예능과 일부 교양프로그램에서 장부에 축소 기재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는 것이다.

 

 

 

 

▲ 지난 23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상품권 협찬 관행 공익제보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이치열 기자.
▲ 지난 23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상품권 협찬 관행 공익제보 기자회견이 열렸다. 사진=이치열 기자.

 

 

 

상품권은 느슨하게 관리됐다. 협찬을 받은 프로그램의 상품권을 다른 프로그램에 지급하는 관행도 있었다고 한다. A씨는 “이 경우 KBS 별관에서 담당 PD를 직접 만나 상품권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2003년부터 현재까지 이 같은 관행이 이어졌다면 적지 않은 금액이 빼돌려졌을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오늘은 문자메시지와 전화를 통해 상품권 협찬 담당자인 KBS 마케팅 전략부 관계자의 입장을 지난 26일부터 요구했으나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최근 논란이 된 ‘상품권 페이’ 관행은 얼마나 비일비재했을까. 상품권 협찬은 방청객이나 프로그램 자문 등의 인력에게 지급해야 하지만 A씨는 상품권 수령자 명단에서 스태프의 이름을 심심치 않게 발견했다. 스태프와 같은 주소로 입금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스태프의 가족 명의로 추정된다.

한국PD연합회는 지난 19일 성명을 통해 사과를 하면서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방송 규제완화를 상품권 페이의 구조적인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A씨는 2003년부터 상품권 협찬 업무를 시작했고, 처음부터 이렇게 입금하는 게 ‘관행’이었다고 했다.

‘상품권 페이’가 논란이 되자 A씨는 부끄러웠다고 밝혔다. 공익제보를 결심하게 된 계기다. “양심에 찔리면서도 일을 해왔다. 사정이 어려워 상품권 지급이 늦어질 때가 있다. 방송 자문해주신 분들은 지급이 늦어지면 빨리 달라고 연락이 온다. 그런데 스태프들은 항의를 못 한다. 누가 스태프인지 알고, 그들은 항의를 못하는 걸 알게 되니, 회사가 어려우면 그분들의 상품권 발송을 늦추곤 했다.”

‘상품권 페이’가 논란이 되자 SBS는 예능 프로그램 상품권 협찬을 3월부터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A씨는 이 결정에 문제를 제기했다.

“SBS는 30여개 대행사가 연관돼 있다. 다들 구좌(패널광고 한 자리)를 몇개씩 터놓고 그걸로 돈을 버는 구조였다. 방송사는 다른 방식으로 돈 벌면 되지만 패널광고 구좌가 갑자기 사라지면 연관된 대행사들은 다 망한다. 시키는대로 해온 대행사들의 밥줄을 일방적으로 끊겠다는 것이다.” 급작스런 정책결정이 또 다른 ‘을’에 대한 횡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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