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제대로 데뷔조차 못 해본 서른 살 드라마 보조작가가 꿈을 접었다. 오랫동안 같이 일했던 드라마 제작사 감독에게 멸시와 함께 성폭행까지 당할 뻔했기 때문이다. tvN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고용이 불안정하고 업계 ‘블랙리스트’로 찍히면 퇴출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 ‘을’ 노동자들은 ‘직장 갑질’에 늘 시달리고 있다.

“이대로 그만두면 방송판 좁아서 어디서도 일 못 한다.” 방송사 비정규직 작가들이 실제로 프로그램 담당 PD로부터 들은 말이다. 한 방송사 막내 작가는 “한두 명의 PD나 팀장들이 작가를 뽑고, 그들이 언제든 작가들을 ‘자를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 한 이런 갑질은 계속 이어지지 않겠느냐”며 “누군가에게 ‘폭언을 들어도 되는’ ‘마음대로 부려먹어도 되는’ 존재가 아닌, 작가로서, 팀의 구성원으로서 정당하게 인정받으며 일하는 존재가 되고 싶다”고 호소했다.

지난 1일 노무사·변호사·노동전문가 등 241명이 참여해 출범한 ‘직장갑질119’는 이처럼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겪는 갑질과 부당한 대우를 고발하고 바로잡아 보자는 취지에서 캠페인을 시작했다. 75% 이상의 직장인이 갑질을 경험하고, 직장인 10명 중 4명은 장시간 노동에 추가 수당도 받지 못하고 있는데도 ‘참거나 모르는 척’(41.3%)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사진=직장갑질119 유튜브 영상 갈무리.
▲ 사진=직장갑질119 유튜브 영상 갈무리.
직장갑질119 스태프인 박점규 비정규직없는세상만들기 집행위원은 “직장 갑질은 다른 곳의 갑질과는 달리 고발하거나 신고하기가 대단히 어렵다. 직장 갑질은 직장을 다닐 때는 고발하기 어렵고 직장을 옮긴 후에도 같은 업종에 취직하려면 불이익을 각오해야 한다”며 “따라서 온라인을 통해 불만과 갑질을 공유하고 자료를 수집해 재발 방지를 마련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말 못 할 갑질 고통 혼자인 줄 알았는데… 뭉치면 이긴다”

직장갑질119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은 개설 후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업계 동료의 추천을 받고 채팅방에 들어와 비슷한 갑질 경험을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최근 선정적인 장기자랑 강요로 논란이 됐던 한림대 성심병원 사례도 채팅방에 들어온 간호사들이 병원 내 부당한 갑질에 대해 얘기하다가 누군가 재단 체육대회 장기자랑 동영상을 올리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한림 성심병원 직원들은 네이버 밴드를 만들어 뭉치기 시작했고, 노무사와 변호사 등 직장갑질119 스태프들도 참여해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섰다. 전문가 면담 결과 한림대 일송재단이 운영하는 6개 성심병원(한강성심병원·강남성심병원‧춘천성심병원·한림대학교성심병원·동탄성심병원·강동성심병원)에서 동일하게 △임금 갑질 △휴가 갑질 △임산부 갑질 △잡무 갑질 △영업 갑질 △비품 갑질 △성희롱 갑질 △정치 갑질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장갑질119 법률 스태프인 윤지영(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는 “성심병원 상황과 관련해서도 고용노동부 간부들과 면담했고, 철저한 근로감독 요구와 함께 전체적으로 직장갑질119에 접수된 각종 사례를 설명했다”며 “현실이 생각 이상으로 너무 심각한데 이렇게 문제가 만연한 이유는 정부가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 않고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게 크다고 지적했다”고 말했다.

직장갑질119 측은 오픈채팅방의 장점을 익명성과 접근성이라고 설명했다. 카카오톡 이용자는 누구나 채팅방에 승인 절차 없이 입장할 수 있고 익명을 사용할 수 있다. 박점규 위원은 “오픈채팅방에선 본인이 겪은 갑질을 고발하거나 노동 상담을 한다”며 “현재 준비되고 있는 직종별 모임을 소개받아 모임에 가입하거나, 같은 직종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 직종 모임을 결성하면 된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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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gcaption>지난 4월1일 방송된 MBC 무한도전 ‘국민의원’ 편 갈무리.</figca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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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iv><b><font color=쉬운 접근과 익명 창구에 온갖 갑질 피해가 쏟아졌다

기존에 개설된 직종별 인터넷카페가 주로 구인·구직을 위한 모임인 반면, 직장갑질119 직종별 모임은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직장인들이 같은 온라인 모임에 가입해 직장과 업계의 부당한 관행을 고발하고 자료를 모아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업종별 전문가와 노무사, 변호사들은 온라인 업종별 권리찾기 모임에 들어가 고민을 상담하면서 가장 효과적인 대응 방안을 찾도록 도와준다.

윤지영 변호사는 “직장갑질119 채팅방의 장점 중 하나는 고용노동부 등에 직접 진정을 할 때 밟아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가 없이 바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그동안 노동운동이나 조직운동은 오프라인에서 시작됐는데, 이제 온라인을 통해 많은 것이 이뤄지는 변화한 현실에 맞게 방법을 바꿔보자는 게 오픈채팅방 같은 SNS 플랫폼을 활용하게 된 이유”라고 말했다.

윤 변호사는 “실제 많은 사람이 직장 갑질에 매우 시달리고 힘들어하며 정부에 문제를 제기해도 잘 풀리지 않았는데, 여기서 익명으로 고발 가능하다니까 사람들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창구로 몰려들게 된 것”이라며 “단지 자신의 갑질 사례만 고발하고 전문가에게 상담받는 게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갑질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서로 위로하고 조언하기도 하는 등 자체적으로 이 방을 지키려는 노력이 크다”고 밝혔다.

직장갑질119가 출범 후 10일 동안 오픈채팅방과 이메일로 접수된 상담 591건을 전수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은 상담은 임금과 수당(112건, 19%)과 관련한 건이었다. 이어 직장 내 따돌림과 괴롭힘 등(108건, 18.3%)으로 특히 직장 내 폭언과 폭력, 폭력적인 분위기 조성, 인격 모독 등에 무방비로 노출된 경우가 많았다.

이외 직장 갑질 제보 중에는 ‘휴식시간 부족과 야근·휴일근무 강요’가 15.4%, ‘연차휴가가 없거나 출산·육아휴직 통제’는 11.7%에 달했다. 심지어 ‘사소한 이유로 징계(해고)당했다’는 제보도 42건(7.1%)이나 있었으며, ‘성희롱 등 성폭력을 당했다’는 상담도 18건, ‘일하다 다쳤는데 내 돈 내고 치료했다’는 사람도 6명 있었다.

“카톡 채팅방 열자 세포 분열하듯 자가발전”

연령대도 다양했다. 젊은 세대들에게 익숙한 온라인 ㅇ통로지만 실제 상담을 요청해온 이들의 직업군을 보면 청소 노동자, 간병인, 요양보호사 등 중·고령층도 직장 내에서 각종 갑질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호소했다.

윤지영 변호사는 “한편으론 젊은 사람들의 반응이 많고 상대적으로 연령이 높은 사람들은 접근이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고연령 직업군 종사자들도 꽤 많이 글을 남겨 신기하기도 했다”며 “어디에다 하소연할 곳 없이 외롭게 혼자서 끙끙 앓았던 사람들도 이 채팅방에선 ‘나만 외롭지 않다’는 감정을 느끼는 거 같다”고 했다.

지난 1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겪는 갑질과 부당한 대우를 고발하고 바로잡기 위해 노무사·변호사·노동전문가 등 241명으로 구성된 ‘직장갑질119’가 출범했다.  ⓒ 연합뉴스
지난 1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직장인들이 회사에서 겪는 갑질과 부당한 대우를 고발하고 바로잡기 위해 노무사·변호사·노동전문가 등 241명으로 구성된 ‘직장갑질119’가 출범했다. ⓒ 연합뉴스
윤 변호사는 “사람들의 자발성에 매우 놀랐다. 직종별로 별도로 대응하는 채팅방을 만들자고 하거나 노조에 대한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등 이곳에서 세포 분열하듯 자가발전하는 느낌이 들었다”며 “노동·법률 스태프들의 역할은 옆에서 전문가로서 조언하며 지원하는 역할이고 결국 직장의 문제를 민주주의로 풀 수 있도록, 혼자서 대응하기 어려운 것을 집단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 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직장갑질119는 각종 갑질·노동 상담을 통해 사례를 수집하고 갑질 유형을 분류, 실제 사실관계를 확인한 후 유관기관(고용노동부·공정거래위원회·국가인권위원회 등)에 제보해 근로감독 등도 이끌어낼 계획이다.

성심병원 사례처럼 언론을 통해 사회적으로 공론화해 직장과 업계에서 같은 갑질이 반복되지 않도록 여론을 조성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같은 일을 하는 직장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도록 한다는 게 이번 캠페인의 목적이다.

윤 변호사는 “현재 벌어지는 직장 갑질은 법이나 제도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있다. 예를 들어 상담 들어오는 것 중 화장실 가는 횟수를 제한하는 사업장도 있다”며 “여기에 실정법을 적용할 수는 없지만, 법을 만드는 것과 무관하게 최소한 우리 사회가 화장실 가는 걸 통제하면 안 된다는 문화를 만드는 것처럼 노동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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