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법은 개정해야 한다. (방송법 개정은) 내가 특별히 주장하고 있는 거다. 그러나 KBS 이사와 사장 선출과 관련해 현재 국회에 상정돼 있는 것보다 정치적 영향을 덜 받는 방식의 개정안이어야 한다. 지금 법안은 오히려 (KBS에 대한) 정치적 영향을 강화시킬 수 있다.”

이인호 KBS 이사장은 7일 오후 미디어오늘과 두 차례 통화에서 이처럼 말했다. 첫 번째 통화에서 ‘방송법 개정’ 질문을 하자 급하게 전화를 끊던 이 이사장은 기자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와 위와 같이 말했다.

이 이사장 발언은 지난해 7월 당시 야당이 발의했던 일명 ‘언론장악방지법’ 통과를 외면하던 자유한국당이 최근 태도를 바꿔 방송법 개정을 외치는 상황과 따로 떼어 설명하기 어렵다. 성재호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장은 “이 이사장 입장이 추석 이후부터 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 고영주 KBS 사장, 이인호 KBS 이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연합뉴스
▲ 고영주 KBS 사장, 이인호 KBS 이사장. 사진=이치열 기자, 연합뉴스
현재 국회에서는 자유한국당·국민의당·바른정당이 일제히 방송법 개정을 촉구하고 있다. 반면 지난해까지만 해도 법안 통과에 사활을 걸었던 언론노조는 이러한 움직임을 ‘정치 야합’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왜 야당과 언론노조 입장이 바뀐 걸까. 이 이사장은 느닷없이 ‘방송법 개정’을 주장하고 나선 걸까. 

지난해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 등 야3당이 발의한 언론장악방지법은 공영방송 이사진 구성을 여‧야 추천 7대6으로 재편하고, 사장 선임 시 이사회의 사장추천위원회 구성을 의무화하며 재적 이사 3분의 2의 찬성을 요구하는 ‘특별다수제’가 골자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는 어떤 세력이 정권을 잡을지 모르는 ‘불확실성’이 크기에 여·야 모두 공영방송 이사진 구성이 여권 편향적인 기존 방송법보다, 대선 패배 가능성까지 고려해 개정안을 택할 것이라는 전략이었다.

김환균 언론노조위원장은 5·9 대선 직전 미디어오늘 인터뷰에서 “대선 전 우리가 법 통과에 목소리를 높였던 이유는 누가 정권을 잡을지 모르는 ‘불확실성’ 하에서 합의가 가능하리라고 판단했다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과 언론 진영에 중요했던 것은 법안 통과 ‘시기’였다. 이 법안 부칙 1·3조를 보면 “이 법은 공포 후 3개월이 경과한 날부터 시행한다”, “공사(KBS) 이사회 및 집행기관은 이 법 시행 후 3개월 이내에 이 법의 규정에 의해 구성돼야 한다”고 쓰여 있다.

이와 관련 전국언론노조 MBC본부가 지난 7일 특보를 통해 “당초 방송법 개정안은 고육지책의 성격이 강했다. 권력에 장악당한 공영방송 이사진과 사장만이라도 우선 교체하자는 응급처치 목적의 법안이었다. 그만큼 한계 또한 분명한 법안이었다”고 주장한 배경이 여기 있다.

개정된 방송법 시행 후 공영방송 이사진과 경영진은 3개월 내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당시 KBS 사측 관계자는 “부칙이 있으면 (KBS 사장이 교체되는데) 어떻게 받겠느냐”며 언론장악방지법에 불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신상진·박대출 등 새누리당(한국당 전신) 소속 의원들은 해당 상임위에서부터 법안을 막아섰고 법안은 1년 넘게 계류되어 왔다. 그랬던 한국당이 문재인 정부 들어 ‘방송법 개정’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언론 진영 상황도 급박하게 돌아갔다. 언론 노동자 스스로 고대영·김장겸 체제를 견딜 수 없다며 파업을 선언하고 거리로 나왔다. 방송법이 개정되고 새 이사회가 구성돼 경영진이 교체되는 상황을 앉아서 기다렸다간 공영방송 재건은 영영 불가능하다는 위기 의식이 컸다. ‘언론 적폐 청산’을 요구하는 촛불 민심을 받든 파업으로 공영방송 사장의 ‘조속한 퇴진’은 언론 진영의 최우선 과제가 됐다. 

“방송법 개정 물론 해야 한다. 지난해 야당이 발의한 방송법 개정안에는 단순히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안만 있는 것이 아니다. (편성위원회 위원 노사 동수 5대5 구성 등) 내부에서 싸울 수 있는 장치도 마련돼 있다. 하지만 부칙 조항에 의해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된 날로부터 3개월 뒤 시행되고 시행한 날로부터 3개월 후 이사진이 구성되고 사장이 선출된다. 기본 6개월이 걸린다. 내년 8월이면 KBS 이사진 임기가 만료된다. 내년 11월 고대영 사장 임기가 끝난다. 방송법 개정을 통한 ‘고대영 체제’ 청산은 사실상 불가능하다.”(성재호 언론노조 KBS본부장)

한국당은 언론장악방지법에 담긴 노사 동수 편성위원회 구성과 앞서 설명한 3개월 내 KBS 이사회 개편을 요구한 부칙 등에 반대하고 있다. 한국당이 방송법 개정안을 새로 발의할 경우 기존 개정안보다 후퇴한 내용으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다. 

이 이사장이 “현재 국회 상정돼 있는 것보다 정치적 영향을 덜 받는 방식의 개정안이어야 한다”며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개정안에 반대하는 것과 비슷한 취지로 보인다. 자유한국당·극우 세력이 공영방송 이사진 재편과 관련해 先방송법 처리, 後인사를 주장하고 있는 목적이 공영방송 ‘적폐’ 사장의 임기를 최대한 끌어보겠다는 의도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 전국언론노조는 “한 마디로 고대영, 김장겸 체제를 유지하자는 것이다. 공영방송의 파업을 잠재우고 현재의 불공정 편파보도 구도로 지방선거를 치르겠다는 심산”이라 주장하며 날을 세웠다. 

전국언론노조는 지난 3일 성명에서 “야3당이 조속처리를 요구하는 방송법 개정안은 2013년 논의 당시부터 최근까지 국회에서 제대로 논의된 적도 없다. 특히 자유한국당은 새누리당 시절부터 신상진 국회 과방위원장을 앞세워 방송법 개정안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거부하며 상임위 안건으로 다루는 것도 막아섰다”며 달라진 태도를 비판했다.

이어 “이제 와서 법안 처리 후 공영방송 이사회와 사장을 새롭게 선출하자는 주장은 공영방송 정상화를 지연시키기 위한 정치적 술수”라고 강조하며 “눈에 뻔히 보이는 당리당략 정치 야합을 마치 방송정상화인 것처럼 둔갑시키는 행태 또한 낯부끄럽기 짝이 없다”고 주장했다. 

설령 야당이 당리당략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방송공정성에 대한 고민의 깊이가 달라져 논의를 주장했다 하더라도, “법 개정 논의와 적폐 청산은 각각 따로 진행해야 한다”는 게 언론노조 입장이다. 촛불시민혁명과 정권교체에 따라 언론노조의 입장도 주어진 상황에 맞게 바뀐 셈이다. 

언론노조는 “방송법과 노조법을 위반하거나 뇌물죄 혐의로 수사 대상이 된 이들을 법과 절차에 따라 해임하고 그 빈 자리를 임명권자가 임명하는 것이 방송장악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라고 되물은 뒤 야3당의 공동행동을 두고 “식물상태로 전락한 공영방송이 한시라도 빨리 정상화돼 공정성을 회복하고 시청자 국민들로부터 신뢰받도록 정치권이 힘을 모아도 모자를 판에 위법 행위와 비정상을 방치하자는 떼쓰기”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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