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탁월함에 언론의 옷을 입히다
학문의 탁월함에 언론의 옷을 입히다
지식 기반 대안 언론 ‘더컨버세이션’…사건 발생하면 전문가 4만명 리스트에서 적합한 저자 찾아 가장 전문적인 기사 작성

기자의 글쓰기는 빠르다. 대중적이다. 깊이는 아쉽다. 학자의 글쓰기는 느리다. 전문적이다. 눈높이는 아쉽다. 이 둘의 장점을 한데 모으고 단점을 메우는 언론사를 만들면 어떨까?

영국 ‘옵서버(The Observer)’와 호주 ‘디에이지(The Age)’ 편집장 출신 앤드루 재스팬(Andrew Jaspan)은 이 아이디어를 행동으로 옮겼다. 야후 뉴스의 제품 책임자와 아이디어를 나누며 의기투합했고 호주 빅토리아주 주지사를 설득해 재정 지원을 받아냈다. 오픈소스 소프트웨어 커뮤니티의 뛰어난 개발자를 영입했고 호주 최대 은행인 커먼웰스은행(CBA)으로부터 기술 지원을 약속받았다. 호주국립대(ANU), 멜버른대 등 5곳과 협력 관계를 맺어 학자들의 참여 문제도 해결했다. 기자들을 에디터로 뽑았다. 2011년 3월 24일 ‘학문의 철저함과 언론의 감각(Academic rigour, Journalistic flair)’을 추구하는 매체 ‘더컨버세이션(The Coversation)’은 이렇게 세상에 등장했다.

▲ 더컨버세이션 호주판 홈페이지 화면.
▲ 더컨버세이션 호주판 홈페이지 화면.
진실에 집중하는 언론 꿈꾸다

더컨버세이션 설립을 주도한 앤드루 재스팬이 문제의식을 갖게 된 지점은 ‘언론의 신뢰 하락’이었다. 그는 기성 언론사의 경영난에 따른 기자들의 대량 해고 사태, 이로 인한 양질의 뉴스 감소, 수익을 우선시하는 홍보성 기사의 남발 등이 저널리즘의 신뢰를 깎아먹는 위험한 추세라 보고 이를 극복할 대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그가 마지막으로 몸담은 호주 최대 미디어 그룹 페어팩스미디어 산하 매체 디에이지 편집장으로 4년간 활동하며 극대화된다. 기자를 포함한 직원 대량 해고, 출장을 제한하는 대신 전화 취재 지시, 사진과 제작의 외주화, 그룹 산하 매체 편집국의 통폐합, 지면 축소 등이 기성 언론이 제작하는 뉴스의 질을 급격하게 떨어뜨린다고 판단했다. 그는 사실에 더욱 입각하고, 좀 더 날카롭게 분석하며, 이용자에게 정말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가운데 저널리즘의 신뢰를 복원하는 게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대안에 대해 고민하던 그가 더컨버세이션의 핵심 아이디어를 떠올린 건 하버드대 케네디 행정대학원 토머스 패터슨 교수와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특히 패터슨 교수가 강조하는 ‘지식 기반 저널리즘(Knowledge-based Journalism)’에 크게 공감했는데, 보도 대상에 대한 명확한 책임, 사실과 분석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연구, 진실에 집중하는 저널리즘 행동 등이 핵심 요소였다.

더컨버세이션을 구체화하며 앤드루 재스팬이 직면한 핵심 문제는 언론사 내부에서 특정 주제를 오랜 기간 깊이 연구한 사람을 찾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그가 찾은 해법은 대학과 연구소였다. 자신의 연구 주제에 대한 전문성은 그 자체로 권위를 가질 수 있었고, 치밀한 연구 조사 방법 역시 ‘지식 기반 저널리즘’의 핵심 요소와 맞닿아 있었다. 재스팬이 할 수 있는 건 이들의 전문 지식을 일반 대중에게 연결하는 것이었다.

긴 연구 주기, ‘그들만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어려운 언어 등을 적절한 시의성을 갖추면서 대중의 언어로 전환해주는 게 바로 기자들의 재능이기 때문이다. 때마침 재스팬의 문제의식과 해결 방법에 공감대를 형성한 글린 데이비스 멜버른대 부총장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멜버른대와 호주 빅토리아주를 통해 소규모 지원금을 조성했고, 이를 계기로 호주연방정부 교육부, 연방과학산업기구(CSIRO), 호주국립대(ANU), 모나시대, 시드니공과대(UTS), 서호주대(UWA) 등이 합세해 더컨버세이션은 초기 론칭에 필요한 기본 재원과 필진을 확보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호주에서 디지털 뱅킹으로 가장 앞서 있는 커먼웰스은행이 기술 파트너로 참여해 더컨버세이션은 디지털 네이티브 언론사로 출발하는 중요한 버팀목을 마련하게 된다.

애초부터 지면이 아닌 온라인 매체로 작정하고 준비하던 재스팬에게 공동설립자로서 잭 레즈먼(Jack Rejtman)의 합류는 날개를 단 격이었다. 야후에서 언론사 제휴를 담당하고 야후 뉴스의 2008년 미국 대선 특집 코너를 성공으로 이끈 잭 레즈먼은 디지털 네이티브 언론사로서 더컨버세이션이 무엇을 어떻게 갖춰야 하는지 안내하고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는 청사진을 제시하며 진두지휘했다. 기술 책임자로 합류한 마이클 모리스(Michael Morris)는 앤드루 재스팬과 잭 레즈먼의 머릿속에 있던 더컨버세이션을 실제로 작동하는 시스템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덕분에 더컨버세이션은 필진과 독자 모두 만족하는 콘텐츠 제작시스템(CMS)을 갖추게 된다.

▲ 더컨버세이션 소개영상 갈무리.
▲ 더컨버세이션 소개영상 갈무리.
기사 쓰기는 연구자 몫

더컨버세이션의 기사 제작 과정은 여느 언론사의 기본적인 절차와 비슷하다. 매일 아침 에디터들이 모여 자신이 담당한 섹션별로 보도할 가치가 있는 아이템 회의를 한다. 중요도와 시의성에 따라 아이템이 선정되면 원고 의뢰 담당 에디터는 적절한 저자에게 원고를 의뢰한다. 원고를 의뢰하는 과정도 체계적이다. 다양한 영역의 학자와 연구자 4만여 명을 수록한 더컨버세이션의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해 원고 주제와 가장 걸맞은 저자를 찾는다. 만일 적절한 저자가 없다면 취재망을 동원해 가장 알맞은 저자를 찾아낸다.

이때부터 언론인의 감각과 더컨버세이션 CMS의 탁월함이 본격적으로 작동한다. 에디터는 저자와 함께 기사 개요, 단어 수, 마감 시각 등을 조율한다. CMS를 통해 저자가 1차 원고를 작성하면 저자, 에디터, 리뷰어가 동시에 편집기에 접속해 원고를 수정하고 리뷰한다. ‘식자의 언어’를 ‘대중의 언어’로 바꾸는 과정도 시스템에 내재했다. 저자와 에디터는 CMS에 내장된 ‘가독성 지표(Readability Index)’ 기능을 활용해 작성한 기사가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지 확인한다. 중등교육을 받은 16세를 기준으로 맞춰진 가독성 지표는 저자에게 대중을 위한 글을 작성하는 가이드라인도 함께 제공해준다.

▲ 더컨버세이션의 가독성지표.
▲ 더컨버세이션의 가독성지표.
기사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CMS에는 반드시 저자의 공개 진술서(Disclosure Statement)를 작성하게 돼 있다. 공개 진술서는 기사와 함께 공개돼 저자의 재정 지원 출처, 금전 이득과 정당 가입 여부 등을 공식적으로 명시해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다. 기사에 대해서는 발행 전 최소한 두 명의 에디터가 리뷰해 글의 난이도나 오류를 점검한다. 최종 발행권은 저자에게 있다. 리뷰를 마친 원고를 저자가 승인하고 발행 버튼을 누름으로써 기사는 이용자에게 노출된다.

발행된 기사가 세상에 노출되는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가장 기본이 되는 채널은 더컨버세이션 홈페이지다. 이곳에서 저자와 이용자는 댓글을 통해 토론을 벌일 수 있다. 더컨버세이션은 토론을 적극 권장하며 생산적인 토론을 위해 에디터들은 노력을 기울인다. 두 번째 채널은 소셜미디어와 이메일 뉴스레터다. 기사가 발행되는 즉시 에디터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 채널에 기사를 배포하고 뉴스레터를 통해 주요 뉴스를 소개한다. 더컨버세이션 론칭 초창기에 인지도를 확보하기 위해 가장 주력한 채널이 바로 소셜미디어기도 했다. 마지막은 다른 매체다.

더컨버세이션의 모든 기사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에 따라 어떤 매체든지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2016년 기준으로 더컨버세이션의 기사를 BBC, CNN, 워싱턴포스트 등 세계 유수 언론사가 받아썼으며 전체 2만2000곳의 미디어 사이트에서 활용하는 가운데 이러한 외부 사이트를 통해 월평균 3500회의 조회 수를 확보하고 있다. 특히 호주 공영 ABC방송은 2016년부터 아예 자사의 기자들을 더컨버세이션 뉴스룸에 배치할 정도로 적극적인 이용을 도모하고 있다.

기사 배포 과정에서도 더컨버세이션의 강력한 CMS가 빛을 발한다. 더컨버세이션은 론칭 당시부터 기사 소비 현황을 조망하며 분석할 수 있는 대시보드 시스템을 CMS에 내장해 저자에게 제공했다. 덕분에 저자는 자신이 작성한 기사가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읽히고 있는지 알기 쉽게 파악하며 사회적 파급력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2016년부터는 이를 더 고도화해 ‘연구 관여 측정 지표(Research Engagement Metrics)’를 개발 중이다.

▲ 더컨버세이션에 내장된 대시보드.
▲ 더컨버세이션에 내장된 대시보드.
이 측정 지표는 학자 개인과 학교나 기관의 연구가 학계나 대중사회에 얼마나 전달되는지 평가할 수 있게 설계됐다. 여기에는 연구를 소재로 한 기사가 얼마나 읽혔는지 측정하는 ‘지식 전달 활동(KTA: Knowledge Transfer Activity)’, 발행한 기사가 홈페이지상의 댓글 토론이나 소셜미디어 공유 등이 얼마나 활발하게 일어났는지 측정하는 ‘미디어 참여 강도(MEI: Media Engagement Intensiveness)’, 기사가 다른 매체에 얼마나 인용됐는지 측정하는 ‘미디어 영향력(MI: Media Influence)’ 등으로 구성돼 있다. 더컨버세이션에 파트너로 참여한 대학이나 연구 기관은 이러한 측정 지표를 활용해 연구자의 사회 기여도를 평가하는 방법 역시 모색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대안 언론

비영리 독립 언론인 더컨버세이션은 구독료, 광고, 기사 제공료 같은 수익 모델이 없다. 정보가 더욱 넓게 퍼지려면 무료여야 한다는 신념, 정확하고 깊이 있는 분석을 위해서는 광고주의 압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원칙, 중요한 정보를 두고 다른 미디어와 불필요한 경쟁보다는 협력을 더 우선시하는 철학 등이 더컨버세이션의 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

더컨버세이션의 모든 재정은 정부, 대학, 연구 기관, 재단, 이용자의 기부금 등으로 충당되는데, 호주판만 해도 2017년 기준 56곳의 정부 부처, 대학교, 기관 등이 여러 수준의 파트너와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에디션을 모두 합하면 전 세계적으로 278곳에서 더컨버세이션을 지원하고 있다. 모든 것을 무료로 이용하므로 저자에게 주는 원고료 역시 없다. 대신 저자는 자신의 글이 사회에 어떻게 파급되는지 정량적인 지표를 볼 수 있으며 미디어 트레이닝이나 세미나 등을 통해 대중적 글쓰기 훈련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기사를 접한 다양한 이해관계자로부터 인터뷰 요청, 콘퍼런스 연사 초청, 컨설팅 의뢰, 공동 연구 제안 등의 기회를 누릴 수 있다.

2016년 기준으로 등록된 저자 4만3000명 가운데 55%가 기사 발행 후 미디어 접촉의 기회를 얻었다. 또한 저자의 14%는 콘퍼런스 연사로 초청받았으며 11%는 공동 연구 제안을, 9%는 컨설팅 의뢰를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 자신의 전문성을 대중에게 전달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 공헌을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연구와 경력에 직접 도움이 되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이제 설립 7년 차를 맞이한 더컨버세이션은 그동안 양적 성장과 확장 역시 꾸준히 이뤄왔다. 론칭하던 해 30만 명 수준이던 월간 평균 방문자 수는 2016년 기준 380만 명으로 늘었다. 2012년 2000곳이던 외부 인용 미디어는 2016년 2만2000곳으로 11배 증가했다. 등록 저자 수 역시 4300명에서 4만3000명으로 10배나 늘었다. 2011년 호주판으로 시작해 이제는 영국, 미국, 프랑스, 아프리카, 캐나다, 글로벌 판이 추가돼 총 7개의 에디션을 운영 중이다. 11명이던 에디터는 가디언, BBC, CNN, 워싱턴포스트 등 쟁쟁한 언론사 출신 기자들이 합류해 어느덧 90명이 됐다.

앤드루 재스팬이 전통 언론사에 느낀 한계와 갈증을 풀기 위해 만든 더컨버세이션은 세계 곳곳에서 대안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진화하고 있다. 2017년 더컨버세이션은 이제 두 번째 장으로 넘어가는 중이다. 더컨버세이션의 개념을 고안했고 설립을 주도한 앤드루 재스팬이 더컨버세이션을 떠나 로열멜버른공과대(RMIT)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이다. 설계자가 떠난 더컨버세이션이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지 지켜볼 절호의 기회가 이제부터 시작된다. 기성 언론의 대안 모델을 제시하는 비영리 독립 네이티브 언론사의 행보를 주목해보자.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이 발간하는 월간 <신문과 방송>에 2017년 9월호에 실렸습니다. 언론재단의 양해를 구해 미디어오늘에서도 이 글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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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개진술서 2017-09-17 13:38:45
더 컨버세이션의 CMS같은 체제를 한국의 매체들이 도입하는 건 요원할 듯하고...그런데 필자(저자)가 자신의 기사에 붙이는 공개 진술서(Disclosure Statement)는 당장 반영해도 되지 않나 싶네! 필자가 공개진술서를 통해 어떤 의도와 배경에서 기사를 쓰게 되었는지, 재정 지원 출처는 어딘지, 금전 이득과 정당 가입 여부 등을 간단하게 밝히면 그만큼 기사의 신뢰도가 높아지지 않을까! 가령 필자가 더불어민주당 당원임을 밝힌다면 독자들은 그걸 감안하고 읽을테니까 투명성이 담보되는 거고....당장 미디어오늘부터 시도헤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