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에도 당시 이곳을 추천해 주신 분이 중학교 때 은사님이다. 당시에는 ‘사랑의 매’라는 것이 아주 흔했기 때문에 정말 엄청난 훈육을 하신 분이었다. 학교에서 자리를 잡은 직후 술자리를 빌어 그 연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선생님, 그때 왜 그렇게 저를 많이 때리셨어요? 지금도 궁금합니다.” “내가 좀 지독했지. 근데 막상 교사로 부임한 뒤에 너희를 보니까 앞날이 깜깜하더라. 무엇을 해서 애들이 먹고살까? 다행히 머리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그쪽으로 몰아갔지. 그래도 너희 동기가 다 잘된 것 보면 내 방식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의 대화를 옮기면 이 정도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당시 전교생 200명도 안되고 남녀 한반씩 각각 50명 남짓했던 그때 무려 20명 이상이 대학을 갔다. 그 중에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사이버안보 전문가로 일하는 친구도 있고, 고위 공무원도 3명이나 있고, 의사와 교수도 있다. 사업가 역시 빠질 수 없다. 대학을 못간 친구도 지금은 다들 괜찮은 곳에서 먹고 산다.
그런 당신이 퇴계 이황이 후학을 기른 도산서원을 추천했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했다. 안내 해설자가 설명해준 현판의 내용을 통해 그 뜻을 깨쳤다. “모르고 행하지 않으면 큰 허물이 아니지만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그 죄 값이 무겁다”는 요지였다. 명색이 유학을 다녀온 제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에둘러 가르치고자 했던 자리였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 선임을 둘러싼 소문을 듣고 부득이 세치 혀를 놀리게 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남들보다 잘났거나, 뭔가 특별한 선견지명이 있어서, 또는 K씨로 알려진 이사장 후보자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그러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학자의 양심 또는 최소한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아는 지식노동자의 항변 정도로 봐주면 좋겠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다. 지난 5월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문재인 정부는 상당히 신선하고 파격적인 인사를 선보였다. 국정지지도가 80%를 넘어선다는 것은 인사가 잘 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렇지만 만약 알려진 대로 K씨가 이사장으로 임명된다면 그간의 노력이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언론재단은 단순한 공직이 아니라 언론을 지원하는 공공재단이다. 정부와 언론의 관계가 남달라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언론이 예뻐서가 아니라 정부라는 막대한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언론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근데 그 자리에 캠프 출신의 공신을 내려 보낸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언론을 전리품으로 생각한다’는 오해를 부른다.
언론과 관련된 지난 정부의 적폐가 캠프 출신의 낙하산을 임명함으로써 언론을 통제하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상식이다.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려는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노무현 2기’를 만들겠다는 의혹도 만들 수밖에 없다. 지난 촛불시위와 탄핵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복권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지난 정책을 되풀이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이 부분에서 한 치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물론 캠프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정말 역사적 소임을 다할 적임자라면 또 다른 문제다.
지난 정부에서 언론재단은 많이 망가졌다. 법안의 개정으로 졸지에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으로 편입되었고 해마다 ‘공공기관’ 경영평가를 받는다. “뉴스생태계의 전문적이고 공정한 조력자”라는 소명보다는 정부의 방침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수행하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고품격 언론을 위한 사업보다는 ‘읽기문화’나 ‘신문사 재정지원’과 같은 상당히 변질된 역할에 더 충실하다.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입장에서 봤을 때 현재 재단이 하고 있는 일 중에서 과연 얼마 정도가 <신문법>에서 명시한 목적에 충실한 것인지 의문이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언론재단 시절의 역할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상당하다. 문제는 제대로 된 이사장이 와야 복원을 위한, 개혁을 위한, 적폐 청산을 위한 노력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물론 공신은 대접받아야 한다. 역사에서 공신을 차별하고 성공한 정권은 없다. 그러나 재단이 직면하고 있는 많은 과제를 또 한국 언론이 직면한 신뢰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있어 ‘공신’이라서 더 잘할 것 같지는 않다. 재단의 독립성을 높이고, 언론을 위한 공정한 지원을 확대하고, 전문적이고 윤리적인 언론인을 양성하고, 제대로 된 뉴스교육을 실시하는데 있어 오히려 방해가 된다. 굳이 쓸데없는 오해를 받는 리더가 추진력을 갖기는 어렵다. 솔직히 이 역할을 얼마나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역량도 의문이다. 대통령이 챙겨 줄 수 있는 자리는 상당한 것으로 안다. 굳이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는 재단이사장을 전리품으로 챙겨줄 필요는 없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달콤하고 누구나 취할 수밖에 없다. 겨우 재단이사장 하나를 두고 누가 신경 쓸까 하는 유혹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언론은 공공재다. 대통령과 캠프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선물이 아니다. 각자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하자. “언론의 것은 언론에게 공신의 것은 공신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