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을 넘기고 지천명이라고 하는 오십 줄에 막 들어서면서 깨닫는 게 있다. 삶의 모든 것이 소중하고 어떤 경험이라도 나름 배울 게 있다는 것이다. 살아생전 부친은 이와 관련해 ‘세 명이 길을 가면 그 중의 한명은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는 공자님 말씀으로 대신하셨다. 2013년 여름, 안동에 있는 도산서원을 방문한 것 역시 그런 돌아볼수록 값진 경험 중 하나다.

뜻밖에도 당시 이곳을 추천해 주신 분이 중학교 때 은사님이다. 당시에는 ‘사랑의 매’라는 것이 아주 흔했기 때문에 정말 엄청난 훈육을 하신 분이었다. 학교에서 자리를 잡은 직후 술자리를 빌어 그 연유를 물어본 적이 있다. “선생님, 그때 왜 그렇게 저를 많이 때리셨어요? 지금도 궁금합니다.” “내가 좀 지독했지. 근데 막상 교사로 부임한 뒤에 너희를 보니까 앞날이 깜깜하더라. 무엇을 해서 애들이 먹고살까? 다행히 머리는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그쪽으로 몰아갔지. 그래도 너희 동기가 다 잘된 것 보면 내 방식이 완전히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의 대화를 옮기면 이 정도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당시 전교생 200명도 안되고 남녀 한반씩 각각 50명 남짓했던 그때 무려 20명 이상이 대학을 갔다. 그 중에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사이버안보 전문가로 일하는 친구도 있고, 고위 공무원도 3명이나 있고, 의사와 교수도 있다. 사업가 역시 빠질 수 없다. 대학을 못간 친구도 지금은 다들 괜찮은 곳에서 먹고 산다.

그런 당신이 퇴계 이황이 후학을 기른 도산서원을 추천했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했다. 안내 해설자가 설명해준 현판의 내용을 통해 그 뜻을 깨쳤다. “모르고 행하지 않으면 큰 허물이 아니지만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그 죄 값이 무겁다”는 요지였다. 명색이 유학을 다녀온 제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에둘러 가르치고자 했던 자리였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 선임을 둘러싼 소문을 듣고 부득이 세치 혀를 놀리게 되는 것은 이런 까닭에서다. 남들보다 잘났거나, 뭔가 특별한 선견지명이 있어서, 또는 K씨로 알려진 이사장 후보자와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그러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학자의 양심 또는 최소한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아는 지식노동자의 항변 정도로 봐주면 좋겠다.

▲ 방송통신위원회가 위치한 과천정부청사. 사진=이치열 기자.
▲ 방송통신위원회가 위치한 과천정부청사. 사진=이치열 기자.
국내 언론은 크게 신문, 방송, 인터넷과 뉴스통신 등으로 구분되어 있다. 그중에서 방송과 관련한 업무는 방송통신위원회에서 관할하고 위원장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장관급 대우를 받는다. 언론분야의 꽃이라고 불리는 보직이다. 신문과 인터넷(신문)은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관할한다. ‘신문 등의 진흥에 관한 법률’에 보면 제3장에 재단의 구성, 역할과 책임 등이 나온다. 지금 문제 삼고 있는 자리는 재단이사장으로 3년 임기가 보장되고 연봉은 1억대 중반 정도가 된다. 방송에 종사하는 사람이 꿈에 그리는 자리가 KBS, MBC 사장이라면 신문과 관련한 기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자리다. 그 밖에, 연합뉴스를 비롯한 통신사는 ‘뉴스통신진흥법’에 의해 감독을 받는다. 이사회는 주로 연합뉴스와 관련이 있는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이 독점한다. 공직 중 어느 것 하나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지금 말하는 자리는 희소성이 있다는 것과 언론이라는 특수성이 있다는 점 또 워낙에 잠정적 후보가 많다는 점에서 최소한 이 분야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늘 주목한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다. 지난 5월 대선에서 승리한 이후 문재인 정부는 상당히 신선하고 파격적인 인사를 선보였다. 국정지지도가 80%를 넘어선다는 것은 인사가 잘 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렇지만 만약 알려진 대로 K씨가 이사장으로 임명된다면 그간의 노력이 공염불이 될 가능성이 높다. 언론재단은 단순한 공직이 아니라 언론을 지원하는 공공재단이다. 정부와 언론의 관계가 남달라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언론이 예뻐서가 아니라 정부라는 막대한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언론의 숙명이기 때문이다. 근데 그 자리에 캠프 출신의 공신을 내려 보낸다는 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언론을 전리품으로 생각한다’는 오해를 부른다.

언론과 관련된 지난 정부의 적폐가 캠프 출신의 낙하산을 임명함으로써 언론을 통제하고자 한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상식이다.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려는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노무현 2기’를 만들겠다는 의혹도 만들 수밖에 없다. 지난 촛불시위와 탄핵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복권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지난 정책을 되풀이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이 부분에서 한 치도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물론 캠프 출신이라고 하더라도 정말 역사적 소임을 다할 적임자라면 또 다른 문제다.

▲ 지난 6월28일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공항 이륙 후 기내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 지난 6월28일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서울공항 이륙 후 기내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은 과연 어떤 언론정책을 갖고 있을까? 대선 기간 중 제대로 된 언론정책을 발표한 기억이 별로 없다. 청사진이 없는데 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가 있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다. 공영방송은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이효성 교수와 같은 진보적인 성향의 학자를 방통위원장으로 임명하는 것은 일면 수긍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K씨는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신문유통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이다. 공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이 조직은 이미 재단에 흡수 통합된 상태다. 유통원을 이끌던 당시 이분이 추구했던 개혁의 내용도 잘 알려져 있고 2017년 그와 같은 개혁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의문이다.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언론인으로서 올곧은 길을 걸어왔고 언론계에 이만한 분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많은 언론계 관련 인사를 모독하는 생각이다. 언론계와 언론학자 중에 그렇게 사람이 없다고는 보지 않는다. 만약 청와대에서 그런 사람을 찾지 못한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것을 자백하는 것이고 알고도 찾지 않는다면 제 식구 챙기기다.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공직을 과감하게 포기했던 양정철, 이호철, 최재성과 같은 측근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지난 정부에서 언론재단은 많이 망가졌다. 법안의 개정으로 졸지에 문화체육관광부 산하기관으로 편입되었고 해마다 ‘공공기관’ 경영평가를 받는다. “뉴스생태계의 전문적이고 공정한 조력자”라는 소명보다는 정부의 방침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수행하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고품격 언론을 위한 사업보다는 ‘읽기문화’나 ‘신문사 재정지원’과 같은 상당히 변질된 역할에 더 충실하다.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 아는 입장에서 봤을 때 현재 재단이 하고 있는 일 중에서 과연 얼마 정도가 <신문법>에서 명시한 목적에 충실한 것인지 의문이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언론재단 시절의 역할로 돌아가야 할 이유가 상당하다. 문제는 제대로 된 이사장이 와야 복원을 위한, 개혁을 위한, 적폐 청산을 위한 노력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물론 공신은 대접받아야 한다. 역사에서 공신을 차별하고 성공한 정권은 없다. 그러나 재단이 직면하고 있는 많은 과제를 또 한국 언론이 직면한 신뢰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있어 ‘공신’이라서 더 잘할 것 같지는 않다. 재단의 독립성을 높이고, 언론을 위한 공정한 지원을 확대하고, 전문적이고 윤리적인 언론인을 양성하고, 제대로 된 뉴스교육을 실시하는데 있어 오히려 방해가 된다. 굳이 쓸데없는 오해를 받는 리더가 추진력을 갖기는 어렵다. 솔직히 이 역할을 얼마나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역량도 의문이다. 대통령이 챙겨 줄 수 있는 자리는 상당한 것으로 안다. 굳이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는 재단이사장을 전리품으로 챙겨줄 필요는 없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달콤하고 누구나 취할 수밖에 없다. 겨우 재단이사장 하나를 두고 누가 신경 쓸까 하는 유혹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언론은 공공재다. 대통령과 캠프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선물이 아니다. 각자 제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하자. “언론의 것은 언론에게 공신의 것은 공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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