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15일 오전 9시50분, 신성호 중앙일보 기자가 대검찰청 이홍규 공안4과장 사무실로 들어섰다. 서서 서류를 보고 있던 이 과장은 신 기자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자리에 앉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경찰 큰일났어” 신 기자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일단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입니다. 요즘 경찰들 너무 기세등등했어요.” 이어진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그 친구 대학생이라지. 서울대생이라며?”
“아침에 경찰 출입하는 후배 기자에게서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조사를 어떻게 했기에 사람이 죽는거야. 더구나 남영동에서…”

남영동은 대공분실이 있던 곳이다. 곧 바로 신 기자는 추가 취재를 통해 사망한 대학생 이름이 박종O이고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이라는 것까지 알아냈다. 이후 서울대 출입기자가 박종철 이름과 주소를, 부산 주재기자는 박종철의 부모님이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서울로 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기사 1보가 완성됐다.

기사를 확인한 사회부장이 신 기자에게 물었다. “자신있어? 이런 사건을 사실과 다르게 보도했다간너와 나는 물론이고 국장, 사장까지 줄줄이 남산에 불려간다.” 남산은 안전기획부가 있던 곳으로 정권에 불리한 기사를 쓴 언론인들이 불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게다가 당시 석간이었던 중앙일보의 윤전기는 이미 돌아가고 있었다. 신 기자는 “자신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금창태 편집국장 대리가 돌아가던 윤전기를 멈춰 세웠다. 해당 기사는 사회면 2단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는 작은 크기였다. 박종철 사망기사 1보는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 1987년 1월15일 중앙일보 기사
▲ 1987년 1월15일 중앙일보 기사
“염불 책하고 철이 사진 가지고 전부 올라오그라…”

같은 시각, 서울에 간 아버지로부터 부산 집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염불 책하고 철이 사진 가지고 전부 올라오그라”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박종철의 누나 박은숙은 가슴이 내려앉았다. 전날 경찰이 찾아오긴 했지만 가족들은 박종철이 경찰에 잡혀 간 정도로만 생각했다.

14일 오전 6시40분, 박종철의 하숙집에 경찰 6명이 들이닥쳤다. 4명이 박종철을 붙잡아 차에 태웠고 나머지 2명은 하숙집에 남아있다가 오전 7시께 하숙집 주인에게 목격됐다. 박종철을 태운 차는 오전 7시55분께 남영동 대공분실 정문을 통과한 것으로 기록돼있다.

대공분실 5층은 철저하게 조사 혹은 고문을 위해 설계됐다. 먼저 창문의 크기가 다른 층과는 달리 좁고 길다. 자살 가능성을 막고 밖을 내다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책상, 침대, 의자 등 4.09평 공간의 가구들은 자해를 방지하기 위해 모두 바닥에 고정돼 있다. 벽에는 ‘흡음시설’이 설치돼있다.

박종철이 선배 박종운의 소재를 대지 않자 고문이 시작됐다. 박종철은 물고문 중 욕조 턱에 목이 눌려 사망했다. 박종철은 끝까지 박종운의 소재를 대지 않았다. 사실 박종철은 박종운의 소재를 몰랐다. 박종운은 신문 기사를 통해 박종철의 사망 소식을 알게됐다. 훗날 박종운은 한나라당에 입당해 국회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서울대 졸업생과 재학생 등 6백여명의 학생이 반정부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와 고 박종철 군의 대형영정을 앞세우고 박종철 명예 졸업장 수여를 요구했다. 사진=연합뉴스
▲ 서울대 졸업생과 재학생 등 6백여명의 학생이 반정부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와 고 박종철 군의 대형영정을 앞세우고 박종철 명예 졸업장 수여를 요구했다. 사진=연합뉴스
“신경민이는 끝도 없이 단신을 하냐”

중앙일보 1보가 나간 날 오후, 반응이 나오기 시작했다. 국내 언론이 취재에 들어갔고 외신들은 중앙일보를 인용보도했다. 결국 이날 저녁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수사관이 주먹으로 책상을 탁 치며 혐의 사실을 추궁하자 갑자기 억하며 책상 위로 쓰러져 긴급히 병원을 옮기던 중 차 안에서 숨졌다”고 발표했다.

동시에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이 전달됐다. 신문의 경우 사회면 3단, 방송은 영상없는 단신으로 처리하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MBC는 15일 저녁 9시 뉴스데스크 말미 ‘간추린 뉴스’ 맨 마지막에 이 소식을 전했고 1월16일 조간인 조선일보, 한국일보는 3단 크기로 보도했다.

하지만 언론사들은 보도지침을 지키면서도 사실을 알리려는 나름의 노력을 보였다. MBC 간추린 뉴스를 진행하던 신경민 앵커는 40초 분량으로 해당 소식을 전했다. 보통 단신은 10~20초 분량이었다. 보도국 내부에서는 “신경민이는 끝도 없이 단신을 하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MBC 보도에는 고문을 추정하는 어떤 단어도 들어있지 않았지만 전파는 신문보다 빨랐다. 이 단신은 박종철 이라는 이름을 전국으로 알린 최초의 보도가 됐다. 조선일보는 3단 크기를 지키면서도 박종철의 사진을 실어 ‘4단 같은 3단 기사’를 내보냈다. KBS는 해당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 1987년 1월16일 동아일보 기사
▲ 1987년 1월16일 동아일보 기사
동아일보, 쇼크사에서 고문사로 프레임을 바꾸다

이런 상황에서 보도지침을 과감하게 깬 언론사가 있었다. 동아일보다. 15일 특종을 뺏긴 동아일보는 지역판에 박종철 사망기사를 키웠다. 지역판에는 그나마 당국의 감시가 느슨했다. 다음날인 1월16일자 서울시내 석간 가판부터는 사회면 중간 톱으로 크게 해당 사실을 보도했다. 이 중에서도 11면 기사가 주목할 만하다.

11면 기사에는 시신을 처음으로 본 오연상 중앙대 용산병원 수련의와 부검 과정을 지켜본 삼촌 박월길의 인터뷰가 담겼다. 오연상은 “도착 즉시 박 군의 눈동자를 살펴보고 심전도 및 호흡상태를 살펴본 결과 이미 숨진상태였다”고 말했다. 병원으로 가다가 숨졌다는 경찰 발표를 뒤집는 것이었다.

삼촌 박월길은 고문사를 의심케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두피를 벗기자 머리 한쪽에 피멍자국이 드러나 보였으며 이마 뒤통수 목 가슴 하복부사타구니 등 여러군데에 피멍자국이 있었다.” 동아일보 보도를 통해 박종철의 죽음은 쇼크사에서 고문사로 프레임이 전환된다.

고문사 의혹이 제기되자 상황은 급속하게 전개됐다. 1월17일 오후5시 무렵 정구영 서울지검장은 물고문 혐의를 인정했고 이는 이날 석간신문 지방판과 다음날 주요 조간신문 1면 톱기사로 보도됐다. 사회면 2단 기사로 출발한 사건이 사흘 만에 1면 톱기사로 커진 것이다. 보도지침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결국 1월19일 치안본부는 박종철의 사인을 “경찰관의 가혹행위에 의한 질식사”로 발표했다. 조사경찰 2명이 구속됐다. 일간지는 한결 같이 내무장관의 사과문을 전제하고 자숙하는 경찰 내부 분위기를 자세히 보도했다. 이후 전두환 대통령의 유감표명이 부각되는 등 사건은 마무리되는 듯했다.

▲ 1987년 2월9일 동아일보 호외
▲ 1987년 2월9일 동아일보 호외
전두환, 김만철로 박종철을 덮다

추가적인 팩트취재는 나오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전두환 정권은 2월7일로 예정된 추도회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프레임을 전환시키려 했다. 일간지 머리기사를 보면 “추도집회 불법규정” ““오늘 추도회…전국 초긴장” 등이다. 박종철 사망 자체보다는 두 집단 간의 갈등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정부가 원하는대로였다.

결국 추도회는 열리지 못했다. 추도회가 무산되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급속하게 묻히기 시작했다. 그 정점이 ‘김만철 일가 탈북사건’이다. 1987년 2월11일 월요일, 신문들은 북한 의사출신의 김만철 일가 11명이 전날 밤 김포공항에 도착했다고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호외까지 발행했다.

“북한탈출 김씨 일가 서울 첫밤” (1987년 2월9일 매일경제 1면 기사)
“이렇게 좋은 옷은 처음…잔치같다” (1987년 2월10일 경향신문 6면 기사)
“데이트 남녀보고 ‘저래도 되느냐’”(1987년 2월10일 동아일보 10면 기사)

전두환 정권에게는 호재가 따로 없었다. 김만철 일가 관련 소식이 연일 보도되면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신문 지면에서 사라졌다. 3월3일 계획된 ‘고문 추방 및 민주화를 위한 국민평화 대행진’ 소식도 신문 한 귀퉁이에 작게 보도될 뿐이었다. 사건으로 사건이 덮힌 것이다. 이게 정말 우연이었을까.

김만철 일가가 탈북한 때는 1월22일이었다. 김만철 일가는 배를 타고 탈북해 일본으로 갔다. 이는 이미 이미 언론에 여러차례 보도된 바 있었다. 그런데도 2월9일 대대적으로 보도된 데는 이유가 있다. 박종철 사건에 대한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전두환이 일본에 김만철 일가를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 서중석은 “신문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갔다”면서 “김만철 일가 탈북 사건으로 사회 분위기가 반전된 면도 있었지만 보수적인 제도 언론답게 언론이 익숙한 제자리로 돌아갔기 때문”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렇게 박종철은 세상에서 잊히는가 했다.

치안본부 총경, 내부고발자로 나서다

하지만 3개월 뒤 반전이 시작된다. 1987년 5월18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사건의 범인이 조작됐다”고 발표했다. 구속된 2명 외에 3명의 경찰이 더 있다는 내용이었다. 초기에 사제단의 성명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동아일보는 이를 사회면 2단으로, 중앙일보는 사회면 1단으로 각각 보도했다.

치안본부는 사제단의 성명에 대해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허위 사실이며 상식 밖의 주장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반박 하루 만에 검찰은 박종철을 숨지게 한 혐의로 경찰 3명을 추가로 구속했다. 사제단의 성명 내용이 진실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튿날 동아일보에서 결정적인 보도가 나왔다. 치안본부 배아무개 총경이 동아일보 기자에게 “차나 한잔 하러 오겠나”라고 물은 게 시작이었다. 당시 이를 취재한 동아일보 김차웅 기자에 따르면 배 총경은 도청을 의심한 듯 목소리를 나직하게 바꿔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김차웅 기자가 배 총경 사무실에 들어가자 그는 문을 잠근 채 이렇게 말했다. “이번 사건은 얼마 안 가 또 터질 것이 분명하다. 처음부터 사실대로 밝혔으면 한 번 매를 맞고 끝날 일인데 감추고 감추다가 계속 터지고 있다. 기왕 알려질 것이기 때문에 경찰 조직을 살리기 위해 말해주겠다.” 내부 고발이었다.

▲ 사진=6월항쟁기념관
▲ 사진=6월항쟁기념관
사건은폐→정권불신→정권퇴진, 프레임의 확대

5월22일 동아일보는 “관련상사 모임에서 범인축소 조작모의” 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1월18일 비밀회의에서 경찰당국이 체포된 고문 경찰관의 가족을 돌본다는 각본을 세웠고 구속된 조아무개 경위가 폭로할 기미를 보이자 “이를 무마했다”고 폭로했다. 이때부터 사건은 “범인이 3명 더 있다”가 아닌 “윗선에서 사건을 축소 은폐했다”는 프레임으로 바뀐다.

5월21일부터 5월24일까지 조선, 동아, 중앙, 한국, 서울 신문의 기사량은 209개에 이른다. 기사 제목을 보면 “조작, 몰랐나…속았나” “어떻게 믿겠는가” “얼마나 더 속여야 하나” “끝없는 거짓말” 등으로 정권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드러냈다. ‘정권 불신’으로 프레임이 확대된 것이다.

이후 언론은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까지 지면에 담아내기 시작했다. 5월26일부터 28일까지 5개 일간지의 관련 보도량은 170건인데 철저한 진상규명과 최대규모 개각을 요구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이전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퇴진요구” “못 믿을 맹공정권, 누구를 믿을까” 등의 단어도 사용됐다.

▲ 1987년 12월30일 동아일보에 소개된 오연상
▲ 1987년 12월30일 동아일보에 소개된 오연상
용기있는 ‘Deep Throat’

이렇게 박종철 사망은 6월 항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데는 보도지침에 맞선 언론의 노력도 있었지만 용기있는 ‘Deep Throat’ 들의 역할이 컸다. Deep Throat는 익명의 제보자를 뜻하는 단어로,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한 기자들이 끝내 취재원을 밝히지 않고 Deep Throat라고 부른 데서 비롯됐다.

먼저 박종철의 시신을 제일 먼저 확인한 중앙대 용산병원 의사 오연상이다. 사망진단이 내려지자 수사관들은 담요로 박종철의 시체를 싼 뒤 들 것에 실어 용산병원으로 옮기려 했다. 병원 응급실에 갈 때까지 살았다고 주장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오연상은 긴급히 병원으로 연락해 시체를 병원으로 들이지 못하도록 했다.

이후 오연상은 동아일보 기자에게 “박군을 처음 보았을 때 이미 숨진 상태였고 호흡곤란으로 사망것으로 판단됐으며 (중략) 약간 비좁은 조사실 바닥에는 물기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 인터뷰 이후 그는 용산 그레이스 호텔에 끌려가 24시간 동안 경찰조사를 받고 다음날 신길동 대공분실에서 다시 조사를 받았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 역시 익명의 제보자를 통해 가능했다. 당시 영등포교도소에 근무하던 안유 보도계장이다. 대공분실 사람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수감된 고문경찰관들을 찾아와 “당신 둘이 죄를 덮으면 1억원씩을 주고 가족 생활을 보장하겠다. 조만간 가석방으로 꺼내 주겠다”며 회유했다. 각각 1억원이 입금된 통장을 보여주기도 했다. 안유는 이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당시 영등포교도소에는 민주화운동을 하다 투옥된 이부영 전 의원도 있었다. 우연히도 이부영과 안유는 일찍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고문경찰관들이 밤새 울고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을 본 이부영이 안유에게 이유를 묻자, 안유는 “먼 훗날 회고록에 쓰라”며 자신이 듣고 본 것을 말했다.

이부영은 “그러냐”고만 말하고 표정도 바꾸지 않았다. 하지만 기자 출신인 이부영은 이를 기억해뒀다가 종이에 적은 다음 외부로 보냈다. 만약 안유가 이부영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확대되지 않았을지 모른다. 안유의 존재는 25년이 지난 2012년에야 밝혀졌다.

박종철을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학 1과장 황적준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황적준은 경찰의 회유와 압박에도 부검 감정사에 ‘흉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라고 사인을 기록했다. 황적준의 부검 소견은 그 해 6월10일 민주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그리고 1년 후 황적준은 동아일보를 통해 회유와 압박이 기록된 일기장을 공개했다.

▲ 박종철 추모공간으로 바뀐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사진=이하늬
▲ 박종철 추모공간으로 바뀐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사진=이하늬
끝내 먹히지 않은 전두환 정권의 ‘뒤집기’ 

남영동 대공분실은 2005년까지 보안분실로 사용되다 ‘경찰청인권센터’로 탈바꿈했다. 지난 29일 경찰청인권센터를 찾았다. 22살 박종철이 차에 태워져 끌려갔던 그 길은 활짝 열려있었고 센터 입구에는 사람 허리 높이만한 경찰 마스코트 모형이 자리하고 있었다. 건물 앞 잔디에는 물이 뿌려지고 있었다.

당시 조사실이 위치한 5층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1층에서 5층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을 통하거나 1층과 5층에만 서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조사실 층수를 알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쇠로 만들어진 계단은 발이 닿을 때마다 소리가 크게 울렸다. 공포감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 길을 살아 내려오지 못한 이가 박종철 하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박종철 사망이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전두환 정권에 맞선 작은 용기들 덕분이었다. 애초 정권은 박종철 부모에게 9500만원을 주며 사건을 무마하려 했으나 중앙일보의 1보 기사로 세상에 알려졌고 의사 오연상의 동아일보 인터뷰로 ‘쇼크사’가 아닌 ‘고문사’ 의혹이 제기됐다.

이후에도 전두환 정권은 추도제를 ‘갈등’ 프레임으로 끌어가고 김만철 일가를 일본에서 불러 들이는 등 박종철 사건을 덮으려고 노력했으나 경찰 내부에서 익명의 제보자가 등장하는 바람에 오히려 사건은 더 확대됐다. 동아일보 기자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제보자는 아직도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다. 6월 항쟁은 박종철과 이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참고문헌>
신성호, 특종 1987-박종철과 한국 민주화
황호택, 박종철 탐사보도와 6월 항쟁 
심재철·이경숙, 국민의제 형성에서 탐사보도의 역할- 박종철 사건을 중심으로
이두석, 사건기자 ‘못다 한 푸념’
정구종, 산업·민주·정보화시대 언론인으로 달려온 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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