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뉴스의 특성부터 보자. 말과 영상으로 된 뉴스는 다른 상품과 달리 사실일 수도, 의견일 수도, 광고일수도, 아니면 선동일 수도 있다. 영혼 전달에 특화된 상품이기도 하다. 뉴스는 늘 사실만을 담고 있지도 않다. 어쩌면 그것은 페이크뉴스(Fake News)일지 모른다. 이 가짜뉴스의 역사야 인간이 생각을 좀 하기 시작하고, 진짜와 가짜도 구별할 줄 알며, 역사를 만들어가던 시대, 예컨대 로마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언론학 교과서에서 빠지지 않는, 무려 B.C. 59년에 나온 저널리즘의 원시형태인 악타 디우르나(Acta Diurna)에도 가짜뉴스가 있었다. 오보의 역사는 정말 오래되었다.
가짜뉴스의 유통 ‘현상’은 저널리즘 ‘본질’을 바꾸고 있다. 여기 가짜뉴스를 신속하게 유통시키는 황당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것은 우선 뉴스생산자이겠으나, 가짜뉴스인지 검증하지 않고 퍼나르는 뉴스소비자 자신들이기도 하다. 이 자유로운 개취의 소비자들은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뜻이 맞는 사람들과만 소통하는 배타성과 편협성을 가진 존재들이다. 이른바 필터 버블(Filter Bubble)에, “관심의 감옥”에 갇힌 존재들이다. 이것은 얼마전 미국 인터넷운동가 엘리 프레이저(E. Praser)가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좋아요’를 누를 때마다 페이스북은 이를 기억해두었다가 비슷한 성향의 글을 추천하여 보여준다. 당신의 취향, 관심, 검색기록 등을 수집하고 분석하여 맞춤형 정보를 제공한다. 알고리즘이 필터링하면 당신만의 세계가, 정보의 ‘버블’이 탄생한다. 당신이 보수라면 보수의 필터를 거쳐 보수주의의 버블에 갇히고, 진보도 역시 그러하다. 여기 해시태그(#)는 이를 강화시키는 장치인데, 공유된 관심사는 ‘내용적인 것’을 넘어 그 자체로 즐거움이 된다. ‘상호이해’라는 딱딱한 본질을 밀어내고 ‘상호재미’라는 느낌적 쾌감의 현상이 지배한다. 공유되면 즐겁다. 공유될수록 버블은 커진다.
소셜미디어 버블은 물론 언론사 기자와 정치인의 관계에서 아주 중요한 기능을 한다. 양자는 모두 거대한 버블을 소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역시 언론학 교과서에 빠지지 않는 저 유명한 20세기 커뮤니케이션 경험론의 대가 라자스펠트(P. Lazarsfeld)의 ‘오피니언 리더’ 개념이 소셜미디어 시대에도 유효하다. 예컨대 오피니언 리더 중의 오피니언 리더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트위터는 24시간 365일 관심을 받고 있다. 내리막길을 걷던 트위터 월간 활성 이용자가 200만명이나 늘어난 것은 덤이겠다. 트럼프의 버블은 점점 더 많이 공유되고 있다.
버블에 갇히면 객관적 팩트로 잘 정리된 진짜뉴스보다는 느낌 충만한 가짜뉴스를 서로 주고받으며 놀이하려는 욕망이 강해진다. 사정이 이러니, 이런저런 법적 처방만으로는 약효를 보기 어려울 것 같다. 가짜뉴스임을 표기하도록 규제할 수 있으나, 종이신문과 TV는 두고 소셜미디어만을 규제하는 것은 형평성에도 맞지 않는다. 더구나 종이신문 시절에야 뉴스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려서 삭제와 정정보도가 통한다 해도, 이제 광속으로 퍼져나가는 정보를 사후 삭제한들 삭제가 될까.
가짜뉴스 구별이 어려워지는데 대한 책임이 적어도 SNS 자체에 있지 않다는 점은 명백하다. 오히려 계급적 현실과 테크놀러지의 역(逆)시너지효과로 나타난 필터 버블이 구별을 어렵게 한다. 여기 사회과학적 사고가 필요한 까닭이 있다. 유물론적 사회과학이라면 금상첨화겠다. 계급과 버블이데올로기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이다. 먹고사는 일에 바빠 별도로 사회과학을 공부하기 어려우시다면, 우선 당신 자신에게 한번 묻는 방법도 있다. 뉴스를 퍼나르기 전에, 공유하기 전에 팩트 체크를 하고 있는가. 사실인지, 의견인지, 광고인지, 아니면 선동인지 구별하고 있는가. 이것이 당신이 감당해야할 책임이다. 페이크뉴스와 싸우지 않으면 삶이 페이크가 될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