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처음엔 되게 까칠했어.”(김이종)
“팽목항에 있을 때부터 정부가 하도 심해서 그땐 정부 프락치로 의심했지.”(김영오)
“세월호 일이라면 아내가 더 독촉했어요. 그것 밖에 못하냐고 더 잘하라고 혼나기도 했죠.”(원재민)
“2년 전과 현재를 비교하면, 같은 언론이 맞나 싶기도 해요.”(이보라)

2014년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46일 동안 단식했던 ‘유민아빠’ 김영오씨. 그가 기자에게 술잔을 권하며 말했다. “만약 헌법재판소가 탄핵 기각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언론은 다시 돌아갈 거야. 어디에 줄을 서야 할지 알고 있는 애들이잖아.” 반가운 만남에 싱그레 미소를 띠며 이야기하던 그는 ‘대통령 탄핵’이 안주거리로 올라오자 표정이 무거워졌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절대로 촛불이 꺼지면 안 돼.”

김씨의 단식농성을 말없이 돕던 이들이 지난달 30일 한자리에 모였다. 한의사 김이종씨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이보라 사무국장은 김영오씨 건강을 책임지는 주치의로, 원재민씨는 세월호 가족대책위원회 법률지원단 변호사로서 김씨 곁에서 함께 했다. 

▲ 유민아빠 김영오씨가 지난달 30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2014년 단식 당시 시민들은 김씨에게 지지와 연대의 뜻을 전했다.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극우사이트 일간베스트 회원들은 단식농성장을 찾아와 ‘폭식 투쟁’을 벌였다. 조선일보·MBC 등은 김씨 사생활을 겨냥했다. 인터넷상에는 악성 댓글이 달렸다. 왜곡된 정보로 유가족을 모욕하는 여론이 커졌다. 

정부와 언론이 주도했던 여론몰이에 김씨는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 ‘아내와 이혼 후 딸인 고(故) 김유민양에게 양육비를 주지 않았다’는 주장에 반박하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입출금 내역을 떼러 다녔다”는 말에서 아물지 않은 상처의 아픔이 전달됐다. 이들 모임이 있기 전 김씨와 2시간 동안 세월호와 한국 언론, 촛불집회와 대통령 탄핵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그동안 어떻게 지냈나.

“tbs 라디오에서 매주 금요일 오전 ‘가슴에 담아온 작은 목소리’를 진행한다. 어제도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을 만나고 왔다. 해고 당한 이들은 1인당 강제이행금 8200만 원을 대학에 내라는 판결을 받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학생들은 취업 등의 압박으로 대놓고 노동자들을 지지하진 못했지만 응원하는 마음은 똑같았다.”

- 기억에 남는 방송은 무엇이었나?

“아무래도 세월호 유가족이라설까. 지난해 7월 고(故) 김관홍 민간잠수사 편이 잊히지 않는다. 그는 정말 ‘내 새끼 구하는 심정’으로 바다에 들어갔다. 당시 민간잠수사들은 하루에 4~5번씩 물속으로 들어갔다. 정부는 뒷짐만 졌다. 검찰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공우영 잠수사를 기소하기도 했다. 청와대는 ‘민간잠수사가 시신 수습 시 1구당 500만원을 받는다’며 언론에 흘렸다. 사실과 다른 이야기다. 우리(세월호 유족)로 끝났다면 모르겠지만…. 미안할 뿐이다.”

김씨는 지난해 3월부터 tbs라디오 ‘가슴에 담아온 작은 목소리’ 진행자 겸 현장 리포터를 맡고 있다. 본인도 ‘세월호 유가족’이라는 권력의 피폭자이면서 도움과 연대가 필요한 이들을 만나러 매주 현장으로 향한다. 김씨는 “대한민국에서 내가 가장 슬프고 아픈 사람인 줄 알았는데, 취재를 하다보면 정말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 많더라. 나보다 슬프고 아프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고 했다. 정찬형 tbs 대표는 지난달 27일 김씨에게 “따뜻한 시선과 배려의 마음으로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을 찾아 이들의 아픔을 위로하고 함께 나눔으로써 tbs가 시민의 방송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며 특별상을 수여했다.

-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세월호를 대하는 시민들의 반응도 달라졌을 것 같다.

“길거리가면 많이 느낀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엔 사람들이 당당하게 노란 리본을 달라고 하더라. 과거엔 서로들 참 눈치를 많이 봤다. 유가족들도 쉽게 다가서지 못했다. 이젠 먼저 와서 인사하고 손을 잡아주시고 안아주신다. 언론이 계속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을 다뤄주면서 정부의 무능에 분노하고 세월호 참사에 공감하는 것 같다.”

- 솔직히 원망스러운 감정은 없나? 진작 관심을 가졌다면 유가족들의 고통도 덜했을 텐데.

“오는 9일이면 세월호 참사 1000일이다. 지난 2년9개월을 고통 속에서 살았다. 일베들의 공격은 정신적인 스트레스였다. 언론의 공격은 무자비했다. 하지만 언론을 원망했어도 시민들을 원망하진 않았다. 과거 나를 욕하던 이들이 ‘정말 죄송하다’며 문자를 보내온다. 이제라도 진실을 알아준다는 사실이 고마울 따름이다.”

▲ 유민아빠 김영오씨가 지난달 30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국회 탄핵 가결 당시 무엇을 하고 있었나?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들었다. (탄핵 찬성) ‘234석’이라고 할 때 감정이 복받쳤다. 울분에 쌓여있던 것들, 억울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유민이 생각도 많이 났다. 사람들 앞에선 눈물을 감추고 싶어 혼자 중얼거리면서 왔다. ‘아빠가 해냈어. 유민아’라고. 진실의 문을 열었기 때문에 떳떳하게 유민이를 만날 수 있겠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불안하다.”

- 뭐가 불안한가?

“단식농성을 하면서 교황을 만나고 국민들이 동조단식을 했다. 촛불 서명 운동에 많은 시민들이 동참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나니까 하나씩 촛불이 꺼지는 게 보였다. 나에 대한 신상털기와 대리기사 폭행 논란 등등. 정부는 유가족과 특조위를 끝까지 집요하게 방해했다. 정권이 교체되지 않으면 진상규명은 힘들겠구나 싶었다. 그러다 1000만 촛불이 켜졌다. 그게 다시 꺼질까봐 불안하다. 헌재 결정이 날 때까지 촛불을 끄지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다.”

정부의 세월호 진상규명 방해 공작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고(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남긴 업무일지 2014년 8월23일치에는 김기춘 당시 대통령비서실장을 뜻하는 ‘장(長)’자와 함께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자살방조죄. 단식 생명 위해 행위. 단식을 만류해야지 부추길 일 X. 국민적 비난이 가해지도록 언론 지도. 생각 포기.” 김씨가 광화문 광장에서 41일째 단식을 하던 때였다.

메모 이후 벌어졌던 일들은 야만에 가까웠다. 일베 등이 단식농성장 인근에서 ‘폭식 투쟁’을 벌였다. 언론은 김씨의 이혼 및 노조활동 경력을 끄집어내 비난 여론을 조성했다. 종합편성채널은 김씨를 조리돌림했다. 자식을 잃은 부모를 ‘처리하는’ 한국 권력의 방식이었다.

-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업무일지 관련 보도, 어떻게 봤나?

“23일날 본격적으로 신상이 털리기 시작했다. 금속노조, 국궁, 양육비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이런 정보를 보수단체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위에서 정보를 주고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제야 의혹이 풀렸다. 기나긴 단식으로 병원에 실려간 날, 국정원은 병원장을 찾아 주치의인 이보라 선생의 신상을 캐물었다. 국정원이 개입돼 있을 거라고 줄곧 의심했다.”

- 언론의 공격이 상당했다.

“종편에서는 거의 매일 비방을 해댔다. 그런데 그런 유언비어가 나돌면, 취재를 하는 게 맞지 않나? 날 인터뷰 해간 언론사가 없었다. 멋대로 편파보도를 한 것이다. 범죄자라도 변호인을 쓰게 하는 게 이 나라 법 아닌가. 아무리 ‘나쁜 아빠’였대도 내 이야기, 입장을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악성댓글과 왜곡 보도에 씻으려고 머리를 감으면 한주먹씩 머리카락이 빠졌다. 2년을 겪으며 이젠 강해졌다. 성인군자가 돼버렸다.(웃음)”

- 정정 보도를 했던 언론사가 있었나?

“없다. 최순실 게이트 이후 한번은 조선일보가 내 페이스북을 받아서 쓴 적이 있다. 주시하고 있다는 건데 정정 보도를 한 적은 없었다. 기자라면 그렇게 할 수 없다. 맹목적으로 윗선 지시를 따라 한 사람을 폄하하고 비난하는 것이 언론인가. 이제라도 진실을 밝혀주길 바란다. 그렇게 해준다면 그동안 원망했던 거 내려놓을 수 있다.”

-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행적을 보도했다. 지상파에서 보기 어려운 시도였다. 파장은 어떠했나?

“유가족들이 전국을 다니며 설명해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2년 동안 우리가 그렇게 만난 시민이 과연 만 명을 넘을까. 지상파가 보도를 제대로 하면 완전히 판이 바뀐다. 언론을 곧이곧대로 믿는 국민이 상당수다. 취재진들은 ‘아버님 죄송합니다. 어쩔 수가 없네요. 잘리네요’라고 말하곤 했다. 언론사가 나쁘지 기자들은 나쁘지 않다라는 생각에 ‘취재한 거 절대 버리지 마세요. 세상이 바뀌면 그때 공개해주세요’라고 했다. 여전히 언론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고 생각한다.”

▲ 유민아빠 김영오씨가 지난달 30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지난해 9월 산케이신문의 가토 다쓰야 기자를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진실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 시민 두 분과 가족 다섯 명이서 그를 만나러 일본으로 향했다. 어렵게 비공식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2시간여 동안 대화를 나눴다. (세월호 7시간 관련) 기사에 민감해했다. 기억에 남는 건 그가 ‘일본은 대통령 일정을 공개한다’며 신문 조각을 오려서 보여줬다. 아베 총리 일정이 담긴 신문이었다. ‘왜 아픈 사람들이 나서야 하느냐’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기자가 김씨를 인터뷰했던 건 2014년 8월이었다. 비정규직으로 살아온 삶을 조명한 기사였다. 단식 중단을 선언하고 서울 동부시립병원에서 어렵사리 미음을 뜨던 그는 불안한 모습이었다. 언론의 지나친 관심과 왜곡 보도에 힘겨워하고 있었다. 다시 만난 그는 2년 전과 달랐다. 김씨는 “만약 그러한 고초를 겪지 않았다면, 신상을 털리지 않았다면 주변에서 ‘아버님, 아버님’하고 띄우는 목소리에 한없이 우쭐대지 않았을까 싶다”며 “지금은 내 주장에 문제가 없는지 한번 생각하게 된다. 보다 신중함을 갖고 매사를 대하게 된다”고 밝혔다. 사회 참여에 적극적인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김씨는 사회적 약자에 먼저 손을 내밀었고 연대라는 가치를 실천하고 있었다. “나중에 세월호 진상규명이 되더라도 생명과 안전을 위해 봉사하고 연대하고 싶다”는 다짐은 숙연하게 만들었다.

- 고 백남기 농민의 빈소를 함께 지켰던 것으로 알고 있다.

“세월호 가족으로서 미안했다. 연대 집회를 하면서 사고가 났지 않나. 처음엔 미안해서 따님인 백도라지씨에게 인사도 못했다. 어르신 시신을 탈취하려고 경찰이 압박하던 때였다. 장례식장에서 일일이 인사받는 것도 힘들 텐데, 괜히 나까지 가서…. 나중에 주진우 기자가 같이 가자고 해서 따님을 만날 수 있었다. tbs라디오 취재를 하면서 노수석 아버지도 부검을 수락했다가 큰 고통을 겪었다는 걸 알게 됐다. 대한민국엔 참사 관련 책임자는 처벌되지 않는 관행이 있던 거다. 이걸 이젠 깨뜨려야 한다.”

-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특조위 방해꾼’으로 평가받는 조대환 변호사를 새 민정수석에 임명하는 등 세월호 참사에 대한 반성을 보이지 않고 있는데?

“대통령과 정부·여당은 세월호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이 사안을 놓고 정치적 유불리만 따졌다. 선거 전에는 유가족을 안아주다가 선거가 끝나면 180도로 바뀌었다. 보수세력이나 일베에서는 유가족들이 정치적이라고 비난했지만 야당만 바라보게 만든 건 정치권이었다. 우리 요구를 받아들여 제대로 책임자를 처벌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웠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위대한 대통령’이었겠지만 그런 의지는 한 번도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 이렇게 무너지는 게 아닌가 싶다.”

▲ 유민아빠 김영오씨가 지난달 30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새누리당에서 세월호 유가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인사는 한 명도 없었나?

“이재오 전 의원만 찾아왔다. 단식하면서 쓰러져 있을 때 유일하게 찾아왔다. 손을 잡고 ‘아버님이 원하시는 게 뭡니까’라고 하더라. 가족의 요구안을 전달했다. 그는 세월호 관련 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정치 성향이 어떻든 간에 찾아와준다는 게 고마웠다.”

그는 대선에 나서는 정치인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김씨는 “마치 헌재가 탄핵 결정을 한 것처럼 대선주자들이 행동하고 있는 것 같다”며 “지금 촛불의 목소리는 박근혜 대통령을 조기 탄핵하고 그 부역자들을 처단하자는 거다. 대선만을 목표로, 촛불의 힘을 끌고 가는 건 우려스럽다. 촛불이 말하는 건 ‘조기 탄핵’ 아닌가”라고 말했다. 

-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난 2년 9개월 동안 국민에게 실망했던 적도 있다. 내 일이 아니라 무관심한 줄 알았다. 그런데 역시 위대한 국민이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더 간곡히 호소한다. 이 순간 잠깐 힘들더라도 내 자식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당장 먹고 살기 힘들다고 침묵하면 참사는 반복된다. 진상을 규명한다고 해서 유가족들에게 돌아오는 건 없다. 떠나간 자식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싸우는 이유는 거지가 돼도 좋으니 아이들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데 있다. 엄마와 아빠의 당연한 마음이다. 정치인들이 국회 안에서 하는 활동이 정치의 전부는 아니다. 국민이 목소리를 내는 게 진짜 정치다. 계속 촛불을 지켜주시길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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