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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암살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국회프락치사건. 세 가지는 친일세력의 친위쿠데타였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1949년 6월26일 현역 육군소위 안두희가 김구를 암살했다. 친일청산의 정신적 지주가 사라진 사건이다. 안두희가 단독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1992년 4월 안두희는 자신의 배후에 김창룡이 있었다고 말했다. 김창룡은 일제시기 독립운동을 추적해 일제에 고발했던 일본관동군 헌병출신 인물로 해방 후 ‘이승만의 양자’로 불린 사람이다.

▲ 1949년 6월26일 낮 12시 서대문 경교장 2층 서재에서 현역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저격 당한 직후의 백범 김구. 7월5일 국민장. 사진=국가기록원

20일전인 6월6일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요원들은 치욕을 겪었다. 당시 조사관이었던 정철용의 회고록에 따르면 이날 오전 9시 정철용은 특경대원 2명과 함께 출근했다. 반민특위 정문 경비경찰은 처음보는 얼굴이었고 복장도 평소와 달랐다. 경비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정문을 열어줬다. 들어갔더니 경찰이 그를 에워쌌다. 그는 신분증과 권총을 뺏기고 사무실 뒷마당에 끌려갔다.

미리 출근한 요원들이 머리에 손을 얹고 무릎을 꿇고 있었다. 특별검찰부장 권승렬(검찰총장)이 말단 순경에게 총과 신분증을 빼앗긴 뒤 쫓겨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이놈들, 내가 누군 줄 아느냐” 그러자 순경이 “네, 검찰총장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내게 그런 불손한 태도를 취하느냐”고 꾸짖자 순경은 “상부지시입니다”라고 했다. 이어 권승렬은 “너희들의 최고 상부가 내가 아니냐?”라고 했다. 습격사건 배후에 경무대가 있었던 것이다.

오전 11시경 경찰들은 반민특위 소속 특경대원들을 끌고가 경찰서에서 구타했고 전치 1개월이 넘는 부상자까지 발생했다. 각종 서류는 찢어지거나 분실됐다. 이후 반민특위 요원들은 의욕을 잃었다. 특별법이 보장한 헌법기관을 현직 경찰들이 폭력으로 제압한 ‘반민특위 습격사건’이다.

반민법(반민족행위처벌법)을 만든 국회의원에 대한 공격도 진행됐다. 1949년 5월부터 8월까지 소장파 국회의원 노일환·김약수 등 14명이 검거·기소됐다. UN 한국위원단에 외국군 철수를 요구하는 입장을 밝힌 것이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국회프락치부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혐의(국가보안법 위반)였다. 반공은 친일기득권층이 친일파 처벌 주장에 맞서기 위한 전략이었다.

해당 사건은 월북을 시도한 남로당원 정재한 음부에서 나왔다는 문서가 유일한 증거였다. 피의자들이 정재한을 증인으로 요청했지만 정재한은 공판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14명은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미대사관 문정관으로 있던 핸더슨은 정재한이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의심했다. ‘국회프락치사건’은 한국전쟁 때 피고인들이 탈주하면서 끝났다.

같은해 7월6일 국회에서는 반민특위 공소시효를 1950년 6월20일에서 1949년 8월31로 단축하는 안이 가결됐고, 모든 조사위원은 사퇴했다. 7월14일 이인 전 법무부장관이 새 위원장으로 취임해 반민특위 해산을 마무리했다. 반민특위 업무가 완료되면 요원들을 당시 직급대로 정식 임용하겠다던 약속도 사라졌다.

▲ 2010년 7월19일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우남 이승만박사 45주기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이 분향후 고개숙여 묵념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런 흐름의 최정점에는 대통령 이승만이 있었다. 민족문제연구소 김민철 연구원은 당시 이승만의 반민특위 방해공작을 “벌거벗은 폭력”이라고 표현했다. ‘국부(國父)’로 칭송받는 이승만의 민낯을 더 살펴보자.

국회에도 삐라 살포

대한민국의 ‘삐라(전단)’는 북한을 먼저 향하지 않았다. 반민법 논의가 한창이던 1948년 8월26일 국회의원 숙소와 시내 각처에는 ‘행동위원’ 명의로 다음과 같은 삐라가 살포됐다.

“대통령은 민족의 신성이다. 절대로 순응하라. 민족을 분열하는 반민법을 철회하라. 민족처단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走狗)다. 인민은 여기에 속지 말고 가면의원을 타도하라. 민의를 이반하는 의원은 자멸이다. 한인은 지금에 뭉쳐야 한다.”

삐라는 다음날인 8월27일 국회의사당 안에서도 나타났다. 김인식 의원이 친일 혐의가 있는 유진오를 법제처장으로 임명한 것을 지적하자 이신태·차랑보 등 방청객 2명이 “반민법은 시기상조다. 너희들도 친일파가 아니냐”, “국회에서 친일파를 엄단하라고 주장하는 자들은 빨갱이다”라는 내용의 삐라를 뿌렸다.

삐라 살포자 2명은 그 자리에서 체포돼 내무부(경찰청)에 넘겨졌으나 같은해 9월6일 불구속 석방됐다. 현행범을 석방시킨 내무부는 반민법 제정 반대의 핵심기구였고, 장관 윤치영은 1941년 전쟁협력 친일단체인 임전대책협의회에 참여한 민족반역자였다. 내무부는 9월23일 ‘반공국민대회’도 주관했다.

반민법 반대 국민대회

이승만이 반민법을 공포한 1948년 9월23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반공국민대회’는 명목상 반공대회였으나 실상은 반민법 반대 국민대회였다. 국민대회를 준비한 이종형(반민특위 2호 체포)은 자신이 경영하는 ‘대한일보’를 통해 꾸준히 “반민법은 망민(網民)법”이라고 비난했다.

▲ 왼쪽부터 무초, 이범석, 윤치영. 미군정청 간부로부터 행정권을 이양받는 이범석 총리와 윤치영 내무장관, 이범석의 뒷줄에서 지켜보는 사람은 유진오.

윤치영 장관은 ‘애국적인’ 대회라며 해당 대회를 허가했다. 대회장에서 대통령 이승만이 축사를 했고, 국무총리 이범석, 반민피의자 이종형과 그의 가족 등이 참석했다. 대회장에는 “반민법은 반장이나 통장까지 잡아넣을 수 있다”, “민족분열의 법률을 만든 것은 국회 안에 있는 공산당프락치의 소행”, “국회 내 김일성 앞잡이를 숙청해야 한다”는 삐라가 살포됐다.

반역자 처벌 앞장서 반대한 이승만

이승만은 반역자 처벌에 대한 속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승만은 1948년 9월23일 반민법을 공포하는 담화에서 “용서받을만한 경우도 참작해 의혹이 있는 경우에는 가혹한 편보다 후한 편으로 (처벌하라)”고 말했다.

같은해 10월1일 이승만은 기자회견에서 “정권이양 시기이므로 현직에 있는 사람을 처단하는 것은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며 “반민특위법으로 검경찰관들이 동요한다는데, 정돈이 되거든 (친일파를) 처단하자”고 주장했다.

1949년 2월2일 친일파문제에 대한 담화에서 ‘반민특위의 활동이 삼권분립에 위반되기 때문에 조사위원들은 조사에 그쳐야 하고, 조사도 조속한 시일 내에 완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달 15일에는 “대통령령으로 검찰청과 내무부장관의 지휘 하에 특별경찰대(특경대)를 없애고 특별조사위원들이 체포·구금하는 것을 막아서 혼란 상태를 정돈케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민특위의 실질적인 조사와 실력행사를 가로막겠다는 의도였다. 이날 국무회의에서 반민법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이어 반민특위를 직접 비판하기 시작했다. 같은달 21일 이승만은 “경찰의 기술로 지하공작과 반란음모를 예방해야 하는데 (반민특위) 조사위원들은 이럴 생각이 꿈에도 없다”고 말했다. 이승만을 국부로 모셔야 한다는 주장은 민족반역자 청산을 막는 것이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라고 판단하는 것과 같다.

친일세력, 반민특위요원 암살시도

민족반역자들이 독립운동가를 때려잡던 역사가 해방 후에도 재현됐다. 1950년 4월18일 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친일경찰 노덕술(수도경찰청 총감), 서울시경 소속의 최난수·홍택희, 중부서장 박경림 등은 테러전문가 백민태를 고용했다. 범행에 필요한 자금 30만원(현 시세로 수십억대)을 약속했고, 서울시경에서 권총 1정, 실탄3발, 수류탄 5개, 등을 지급했다.

자금은 반민특위에 가장먼저 체포된 박흥식(화신백화점 사장)이 공급했다. (박흥식은 훗날 군부독재정권이 실현한 ‘강남개발’과 ‘원전개발’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계획은 이랬다. 1948년 반민법 실시를 주장한 김웅진·김장렬 의원, 윤치영 장관을 비판한 노일환 등을 납치한 후 강제로 “난 이남에서 국회의원 노릇하는 것보다 이북에 가서 살기 원한다”는 성명서를 작성하게 해 성명서를 대통령·국회·언론사에 보내게 하고 38선 가는 길에서 애국청년이 공산주의자를 살해한 것처럼 위장한다는 음모였다.

암살 대상자에는 김병로(특별재판부장), 권승렬(특별검찰부장), 김상덕(반민특위 위원장), 이청천, 김두한 등도 있었다. 암살은 1949년 1월8~9일 사이에 추진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백민태가 평소 존경하던 인물이 포함된 것을 알고 조헌영·김준연 의원에게 이 계획을 제보했다. 사건을 꾸민 피의자들은 같은해 2월 기소됐다. 하지만 12월말 서울 고등법원은 “백민태가 범죄행위를 하지 않았으니 피고인들의 교사죄는 성립되지 않는다”며 풀어줬다.

반민특위 요원들에 대한 협박과 테러는 전국에서 벌어졌다. 1949년 2월 경상남도조사부의 투서함에는 “인종의 말단 놈들이 한데모여서 반민법이니 무엇이니 허허! 인간이 살기를 위해 한 것이니 자인하여라. 너희들은 살려둘 수 없다. 신변을 주하게 모조리 죽일터이다”라는 투서가 들어왔다.

같은해 3월28일 강원도조사부 사무실에서는 특경대원 김영택이 권총 오발로 가장해 김우종 위원장을 암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당시 김영택은 돈이 없어서 돈을 받고 범행을 저지르려 했다. 배후에는 강원지역 유력 민족반역자가 있었다. 당시 친일파들의 ‘뇌물제공’과 ‘줄대기’는 해방 직후부터 자행됐다.

협박은 계속됐다. 같은해 5월30일과 6월2일 전남조사부에는 “생명과 처자를 아끼려거든 2주일 내에 총퇴진하라”는 협박장이 날아왔다. 6월13일 김상돈 부위원장을 비롯해 조사위원 김명동, 특별검찰부 노일환·서용길, 국회의원 이재형·강욱중 등의 집에도 협박장이 날아왔다. ‘폭탄대장명의’였고 “삼천만 민중을 대표해 적구(공산당 앞잡이) 국회의원에게 폭탄형을 내린다”는 내용이었다.

전라북도조사부에서는 같은해 3월6일 김제경찰서장 이성엽을 체포한 직후에 김제군에 설치한 투서함이 파괴됐다. 4월29일 서울 명륜동에선 특별검찰관 서성달 등이 괴한에게 총을 맞았다. 반민특위 조사관들은 실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맞서며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미군정의 친일파 기용, 이승만의 동조

지도자 김구의 암살은 반민특위 중단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반민특위 실패를 “백범과 임시정부 계열이 친일파 문제에 대해 의지 부족”이라 탓하는 목소리가 꽤 있다. 백범 개인비서였던 선우진의 증언에 따르면 백범 환국 직후 박흥식이 300만원을 들고 와 정치자금으로 헌납하려 하자 백범은 “나를 왜놈으로 착각하는가, 친일파 근성을 바로잡지 못하거든 썩 물러나라”고 호통을 쳤다.

1945년 9월3일 백범은 ‘임시정부 당면정책’을 발표했다. “독립운동을 방해한자와 매국적에 대해 공개적으로 엄중히 처리할 것”, “적의 일체 법령의 무효와 신법의 유효를 선포” 등 백범의 반역자 청산 의지는 확실했다.

하지만 당시 한반도 남쪽을 점령한 미군의 생각은 좀 달랐다. 미국은 태평양사령관 맥아더에게 ‘미군정장관의 지시 하에 조선총독 및 그의 일본인 참모진을 한국의 행정에 활용한다는 것이 기본계획’이라는 대일훈령을 내렸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 대한 특별조례’(1947)를 제정했지만 미군정은 인정하지 않았다.

매글린 대령은 일제시기 조선인 경찰에 대해 “일본인을 위해 훌륭히 업무를 수행했다면 우리를 위해서도 그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미군정은 조선인 고위관리로 영어를 잘 구사하고 교육수준이 높고 자유주의 이념을 옹호하는 친미적 성향을 가진 인물을 원했으며, 공산주의와 관계있는 조선인은 배제하고 싶어했다. 이승만은 이에 적격이었다.

▲ 1948년 5월 31일 열린 제헌의회 개원식. 우여곡절 끝에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법을 제정했다. 사진=국가기록원

당시 좌익세력은 숙청됐고, 우익 지도자는 김구와 이승만 뿐이었다. 둘 다 국내에 정치세력이 부족했다. 김구는 통일 조국을 원해 남한만의 단독정부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이승만은 친일파와 손을 잡아 정권을 유지했다. 실질적인 주인이었던 미군정의 요구에도 어긋나지 않았다. 김구가 지고 이승만만 남았다.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기회주의자들이 부활했다.

대놓고 친일을 말하진 않지만

“70세는 참회록을 쓰는 나이다. 해방 70년을 맞은 우리나라의 현재가 바로 그러한 때이다. 한 국가의 참회록은 과거에 대한 참회이면서 동시에 그 참회를 딛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결의이기도 하다.”

지난해 나온 책 ‘대한민국은 왜?’(김동춘)에 고 신영복 선생이 쓴 추천사다. 해방 71년이 흐른 2016년 8월, 여전히 대한민국은 참회록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반역사(反歷史)가 전개되기도 한다. 한국문인협회는 지난 2일 민족반역자(叛逆者) 이광수와 최남선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만들 예정이라고 밝혔다.

해방직후 이광수가 쓴 글은 그의 친일행적 때문에 출간하지 못했다.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기소 수감됐던 이광수는 8월29일 불기소처분을 받아 법적으로 면죄부를 얻었다.

당시 피폐했던 출판계는 생존을 위해 이광수의 저서가 필요했다. 1950년 1월부터 사회적 여론을 의식해 이광수 저서 출판을 미루고 있던 박문출판사와 한성도서주식회사에서 식민지시기 보유하고 있던 저작권을 근거로 인기소설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출판사의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진 것이다.

문인사회에서도 근대문학의 선구자인 이광수를 껴안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1950년대 분단은 문단을 우익 중심으로 재편했다. 좌익 문인을 문학사에서 배제하는 과정에서 이광수는 근대문학의 선구자로 부각됐다. 고전문학 중심이었던 당시 대학 국문학계에서 현대문학의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서도 문인들은 이광수를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실제 현장 문인들이 현대문학 교수진으로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 민족반역자 춘원 이광수

따라서 식민지 후반 일제에 협력한 전력을 새롭게 문제 삼기보다는 민족을 위해 헌신한 육당과 춘원의 삶을 높게 평가하는 흐름이 1950년대 지식인 사회를 뒤덮었다. 이광수는 ‘세계적인 문호’로 격상됐고 이후 수많은 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실렸다. 이광수의 반민특위 당시 수사·재판기록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다행히 시민사회계에서 반발이 일자 8일 한국문인협회는 “육당·춘원 문학상 제정을 철회한다”고 밝혔다. ‘이광수 문학상’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일제해방 71년, 참회하지 못한 현실의 한 조각을 잘 보여준다. 대놓고 친일을 찬양하진 못하지만 일제의 잔여물은 언제든 한국사회를 괴롭힐 수 있다.

※ 참고문헌

김종수, 1950년대 출판시장에서 이광수의 위상
이강수, 반민특위 방해공작과 증인 및 탄원서 분석
허종, 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반민특위 재구성> 연재목차

1. 세월호 특조위와 반민특위

2. 국부 이승만의 반민특위 방해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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