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해 보이는 ‘할배’ 23명의 반주를 곁들인 점심. 왁자지껄 오가는 대화는 마냥 가볍지 않았다. “독립 운동하던 사람에게 돈이 나온 적 있던가.(웃음)”, “왜 해직자 특별법만 기다리고 있어요? 동아일보에 우리가 이겼다고 아직 살아있다고 알려야지.”, “동아투위가 법률적으로 정당했다는 걸 정치권이 인식하고 표현할 수 있도록 우리가 지금부터 준비해야….”, “폭도, 빨갱이 누명을 이제야 벗었네.”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이듬해 동아일보에서 쫓겨났던 해직 언론인들은 박정희 독재 정권과 이에 굴복한 경영진에 의해 부당 해고됐다는 ‘사실’을 41년이 지나서야 ‘인정’받았다. 

대법원은 지난 4월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위원 113명 가운데 13명에 대해서만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과거사위 진상규명을 신청한 인사 가운데 민주화보상법에 의해 생활지원금을 받지 못한 이들만 자격이 있다고 협소하게 판단한 결과였다. 

동아투위의 한 위원은 “동아투위 13명만의 승리는 아니”라며 “박정희의 중앙정보부 압력에 부당하게 해고됐다는 사실이 인정됐다. 우리가 옳았다”고 말했다.

▲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들이 지난 17일 오후 서울 경복궁 인근 식당에서 정기 모임을 갖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지난 17일 오후 경복궁 인근에서 만난 정연주 전 KBS 사장(71)은 이 자리에서 말없이 ‘선배’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1975년 30살이던 그는 막내였다. 후배를 맞지 못하고 거리로 쫓겨났다. 

이날 오찬 말미에 그가 “오늘 회비 만 원 가지고 돼요?”라고 묻자 한 위원은 “모자라면 배상금 받는 사람이 내겠지”라고 말하며 미소를 보였다. 이날 모임의 마지막은 할배들의 기분 좋은 갹출이었다.

정 전 사장도 배상 요건에 해당됐지만 이번 소송에 참여할 수 없었다. 자신을 향한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보수언론의 공격이 동아투위 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 

이 때문에 정 전 사장은 관련 소송을 따로 제기했으나 1심에서 패소한 뒤 항소하지 않았다. 각종 소송에 지쳐버린 탓이었다. 

MB정부 출범 뒤 정권은 그를 KBS 사장에서 쫓아내기 위해 감사원·검찰·국세청 등을 동원해 없는 ‘배임죄’를 만들어 해임시켰고 보수언론은 정 전 사장을 도마 위에 올려 물어뜯었다. 

대법원은 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40여 년의 언론생활에서 그가 겪은 두 차례 해고는 모두 정권이 개입된 불법이었다. 공영방송 정상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분출하고 이에 20대 국회가 움직이는 지금, 그가 미처 이루지 못했던 공영방송의 이상은 무엇이었을까. 아래는 정 전 사장과의 일문일답.

▲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지난 17일 경복궁 인근 식당에서 동아투위 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동아일보 해직 언론인에 대한 국가배상이 인정됐다.

“비합리적인 기준으로 일부만 인정했지만 박정희 독재 정권의 중앙정보부가 1975년 동아일보 해직사태에 개입한 ‘부당 해고’라는 점과 이에 국가 책임이 있다는 걸 인정한 판결이다. 1‧2심에서 패소했고 상고하면서 인지대 부담 등으로 1억 원에서 1000만 원으로 배상 청구액을 낮췄다. 모두가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받았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가슴 아픈 일이다.”

- 앞서 동아투위 모임에서 동아일보에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동아일보는 41년 동안 사죄한 적이 없다. 책임을 지려 하지 않았다. 지난 40년 동안 동아투위 선배들이 분노하는 이유다. 박정희가 총살되고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커졌을 때는 대화 움직임을 보였지만, 전두환 체제가 들어서자 입을 싹 닦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였던 게 동아일보다.”

- 동아일보 해직 언론인 다수는 언론계로 복귀하지 못했지만 정 전 사장은 언론계로 복귀해 활동했다.

“1975년 해직사태 이후 반듯한 직장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기자가 되겠다고 동아일보에 입사했는데 그 꿈이 좌절된 채 본인이 원하지 않았던 직장에 들어갔던 선배들이 많았다. 저널리스트라는 꿈만 갖고 평생을 살아왔던 거다.”

- 선배들에게 마음의 빚이 있을 것 같다.

“미안한 마음 왜 없겠나. 상대적으로 나이가 적어서 언론계에 복직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겨레 특파원으로 활동할 때 다른 선배 몫까지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곤 했다.”

- 앞서 모임에서 인상 깊었던 건 “우리가 오래 살아야 한을 풀 수 있다”는 동아투위 위원들의 다짐이었다.

“동아투위 113명 가운데 지난 41년 동안 25명이 세상을 떠났다. 내가 막내인데 71살이니까 다들 연로하셨지. 건강이 좋지 못한 분들도 많다. 최근 2년 동안 7분이 돌아가셨다. 지난해 동아일보 앞에서 항의 농성할 때, 서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동아투위에 이제 남아있는 큰일은 이별하는 거 아닌가.’ 오늘은 그래도 23명이 나오셔서 기쁨을 더 많이 나눌 수 있었다.”

박정희 유신체제 하인 1978년 11월, 정 전 사장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됐고 1980년 5·17 때는 ‘국기 문란자’로 수배돼 떠돌아다니는 도망자 신세였다. 그는 1982년 37세의 나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1989년 한겨레 워싱턴 특파원으로 발령받았다. 2000년 귀국 후 한겨레 논설주간을 역임했다가 2003년 3월 퇴사했다. 그해 4월25일 KBS 사장에 임명됐다.

▲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지난 17일 경복궁 인근 커피숍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최근 KBS 뉴스 본 적 있나?

“실시간이나 인터넷으로 가끔 본다. 총선 전 북한 기사로 도배됐을 때 그런 기사를 누가 썼는지 살펴보기도 했다. KBS뉴스가 정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 현재 KBS 상황은 어떻게 판단하고 있나?

“KBS 사장의 정치적인 성향이나 세계관이 현 체제, 수구 기득권들의 생각과 비슷하다. 사장이 심어놓은 KBS 보도본부 주요 간부들도 대동소이하다. 이들이 원하는 대로 뉴스가 생산되는 구조다. 결론은 뻔하다. 그들의 공고한 체제에 비판적 목소리를 반영할 가능성은 적다. KBS새노조(언론노조 KBS본부)를 중심으로 한 젊은 언론인들의 문제 제기는 무시되겠지. MBC, YTN, 연합뉴스 등 정부 영향력 아래에 있는 언론기관 상층부가 다 비슷한 상황이다.”

- 조직 인사라는 것은 사장의 성향과 따로 떼어서 설명하기 어렵지 않나?

“실제 한나라당,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수구 기득권 세력들은 KBS를 ‘정연주 사람’으로 채워놨다고 맹비난했다. 맞다. 다만 차이를 얘기하자면, 임원 인사만 하고 이외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최대한 자율권을 부여한 것이다. 결국 주목해야 하는 것은 ‘KBS뉴스가 살아있었느냐 죽어 있느냐’는 성과와 결과다. 제작진이나 기자들에게 직접 그 차이를 물어보소.(웃음)”

이명박, 박근혜 보수 정권 하에서 공영방송의 권력 감시 기능이 거세됐다는 평가는 일상이다. MBC와 YTN에서는 대량 언론인 해직사태가 발발했고 공영방송을 관리감독하는 이사회는 극우 뉴라이트 인사들이 장악했다. KBS에 사표를 내고 뉴스타파로 자리를 옮긴 최문호 기자는 지난 3월 미디어오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민주정부 10년은 호남 정권을 기반으로 들어온 KBS 수뇌부들과 기득권을 지닌 영남 세력의 균형을 통한 견제가 이뤄졌던 시기다. 그 균형이 ‘염치’라는 이름으로 효과를 발휘했던 거다. 그 와중에 정연주라는 사람이 독특하게 들어와서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아마 정연주 같은 사람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2008년 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하면서 모든 것이 영남으로 넘어갔다. 그들은 더 이상 눈치 보지 않았다. 원래 KBS는 그렇게 살았다. 암흑기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잠깐 정연주 5년 동안 특이한 경험을 한 것이다. 정연주라는 변수에 의해서 사람들이 각성한 거지.”

- 한국 언론사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특히 참여정부에서 언론의 자유가 보장됐다고 평가하는 언론인과 전문가들이 다수다.

“노무현 정부는 ‘탈권위’라는 시대정신에 의해 자율이 확대되던 시기였다. 해직 언론인이자 한겨레 출신인 아웃사이더가 KBS 사장이 되던 때였고.(웃음) KBS 사장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자리다. 나는 줄곧 ‘떠날 때 가장 힘없는 사장이 되겠다’고 말했다. 자율성을 강조했고 실현하고자 했다. 다만, 정치권에서 부는 바람(외압)만큼은 막는 병풍이 되고자 했다.”

- 지금의 언론장악과 언론 자유 후퇴 상황을 생각하면, KBS 사장 시절 KBS 내 인적 청산이라든지 강경하게 인사권을 발휘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강연 같은 걸 하면 많은 분들이 말씀하신다. ‘쓰레기 청산’을 왜 제대로 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만약 정치적 성향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사권을 마음대로 휘둘렀다면, 보수정권의 KBS 사장들이 노동조합이나 젊은 언론인들을 어떻게 다뤘겠나? 물론 MBC 경영진은 기자‧PD들을 대량으로 해고했지만 그 결과는 재판에서 판판이 깨지고 있다. 이 문제는 내부에 맡길 수밖에 없다.”

- 해임 당시 외롭지 않았나?

“전혀. 외롭지 않았다. 촛불시민들이 ‘정연주를 지키자’라고 지지해줬는데.(웃음) 동아일보 제작거부에 참여할 때도, 1975년 3월17일 쫓겨날 때도, 긴급조치로 구속되고 그 뒤 도망 다닐 때도 ‘어느 것이 옳은가’라는 게 판단 기준이었다. 언론 자유를 위해 제작 거부에 참여하는 건 당연했다. KBS 사장이 돼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이었다. 내가 임기를 지키지 못하고 던져버리면 누가 정치적 독립을 지킬 수 있나?”

▲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지난 17일 경복궁 인근 커피숍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당시 KBS노동조합(정연주 해임 이후 ‘MB정부의 언론장악’에 맞서 KBS노동조합을 탈퇴한 기자·PD를 중심으로 제2노조인 KBS새노조가 출범했다), 공정방송노동조합 등 사내에서도 노골적으로 퇴진 운동을 벌이며 정 전 사장 축출 선봉에 섰는데?

“청와대, 검찰, 감사원, 교육부, 방송통신위원회, KBS 이사회가 나를 해고하기 위해 총동원됐다. 외롭지 않았으나 힘은 들었다. 특히 힘들었던 것은 KBS 수구 노조의 막무가내 정연주 퇴임 운동이었다. 어버이연합 등도 집까지 찾아와 연일 시위를 했다. 마치 산에 오르면 들러붙는 ‘날파리’ 같았다. 사실 산을 내려오면 사라지는 건데.(웃음) KBS 새노조가 생기기 전의 수구 노조 행태는 언젠가 큰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노동조합이라는 껍질을 뒤집어쓰고 권력을 지향했다.”

- 최근 KBS 간부들은 KBS 기자협회에 맞서 ‘KBS기자협회 정상화모임’을 만들어 자사 보도 감시 활동을 폄하하고 시민단체와 기자협회를 비난하고 나섰다. 어떻게 생각하나?

“협회 정상화를 내건 (수구적) 모임은 과거에도 있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KBS에 ‘공정방송노조’라고 있지 않나. MBC에도 비슷한 무리가 있고. MB정부 이후 사회가 수구화하면서 달라진 점은 ‘부끄러움’이 사라졌다는 거다. 동아일보 해직 때는 제작 거부에 참여하지 않은 인사들에게 일말의 부끄러움은 있었다. (정상화모임의 경우) 총선 전 새누리당 장기 집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에 부합하는 행동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이는 기회주의적인 행태다.”

- 최근 길환영 전 KBS 사장이 사사건건 보도에 개입했다는 내용이 담긴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비망록이 공개돼 파문이 일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대포로 개입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미련한 짓이다. (보수정권의) KBS 보도국 출신 사장들은 이처럼 미련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웃음) 지금도 보면 밑에서 다 알아서 하지 않나? 길 전 사장은 어처구니없고 비상식적으로 보도 독립성을 침해해온 것이다. 그는 세월호 참사 직후 유가족 가족이 사과를 요구할 때는 침묵하고 외면하다가 이후 청와대가 움직이면서 사과에 나섰다. KBS 구성원들에게 큰 상처를 줬다.”

- 20대 국회에서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문제가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제도 개선은 중요하다. 그러나 제도 개선이 만병통치약처럼 간주되면 안 된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확보해주는 마법은 없다. 내부 투쟁이 중요하다. KBS 구성원들이 낙심하거나 좌철하지 말고 내부의 치열함을 유지해야 한다. 그래야만 방송 독립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공영방송 독립은 중장기적으로 한 사회의 성숙도에 결정되지만, 가깝게는 끊임없이 내부에서 고민하고 싸워야 가능하다.”

정 전 사장은 노무현 정부인 2003년 시민‧언론단체의 추천 공모를 거쳐 KBS 사장에 임명됐다. 밀실 인사가 아닌 각계각층이 참여한 사장추천위원회에서 ‘개혁적 후보’로 그를 추천하고 대통령이 임명한 것이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그가 KBS 사장으로 제청되자 “비전문성, 친북 편향성, 편향된 언론관, 도덕성” 등을 문제 삼았다. 보수언론은 ‘코드 인사’라고 규정하고 날을 세웠다. 정 전 사장은 자신의 저서에서 “KBS 사장이 되기까지 내가 노무현을 직접 만난 것은 송건호 선생님 장례식, 당선자 시절 63빌딩 중식당과 한겨레 방문 때 등 세 번”이라고 밝혔다.

▲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지난 17일 경복궁 인근 커피숍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KBS 사장이 되기 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었는데.

“2001년 12월 고 송건호 선생님 장례식 때 뵌 게 처음이었다. 그분(노무현)과 개인적으로 정을 느낄 수 있는 자리나 기회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공적인 관계였다. 다만 동갑내기 친구(두 사람 모두 1946년생)처럼 느껴졌다. 비슷한 생각과 가치를 가진 사람이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 그가 자율과 독립을 주겠다고 말한 두 집단, 검찰과 언론이 모질게 몰아세운 것에 대한 분함도 있고.”

- 노 전 대통령은 실제 KBS 사장에게 전화 한 번 하지 않았나?

“KBS를 운영하는 데 있어 자율성을 저해하는 건 내 스스로 다 차단하려고 했고, 실제 전화는 없었다.(웃음) 정권 차원에서 왜 불만이 없었겠나. KBS가 참여정부 시절 비판 보도를 많이 해서 지지자들이 ‘KBS가 참여정부의 신뢰를 무너뜨렸다’는 항의도 많이 했는데. 한미FTA와 관련해 정부 인사가 내게 너무하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영방송은 언론 본연의 기능, 사실 전달과 권력 감시에 충실해야 한다.”

- KBS를 떠난 이후 노무현재단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인가?

“KBS 사장을 나온 뒤 그해 10월 처음으로 봉하를 찾았다. ‘사장으로 있을 때 전화해주지 않아 고맙다’는 인사도 할 겸 내려갔다.(웃음) 그때 노 전 대통령이 내게 함께 언론개혁운동을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좋은 숙제’라고 웃으며 넘겼지만 사실은 재판 때문에 정신이 없던 상황이었다. 이듬해 (검찰 수사로) 그가 힘들었을 때 힘내시라고 (내가) 힘을 북돋아줬다면 조금이나마 부채감을 덜었을 건데. 재판을 핑계로 그 이후 내려가지 못했다. 갑자기 돌아가시고 인간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웠다.”

- 노무현 전 대통령의 뜻을 잇는 활동을 하는 것과 관련해 부담감도 있을 법 한데?

“사실 일부 후배들이 더러 저널리스트 출신이 왜 그런 데 끼어드느냐는 비판을 한다. 인간에 대한 도리, 인간으로서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언론 자유를 위해 싸울 때 반(反)유신 투쟁으로 뜻을 모았던 것처럼,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그 방향이 같다면 얼마든지 함께 할 수 있다. 비판한다면 그건 내 몫이다. 그런데, 노무현재단 이사는 몇 년 전에 그만뒀다. 모든 책임 있는 자리에서 자유롭게 떠나고 싶어서다. 리영희재단 이사도 관뒀다. 이젠 조금 무명으로 살았으면 한다.(웃음) 이제는 후배들이 역할을 해야 한다.”

2시간 가까이 진행된 인터뷰는 동아투위, KBS, 노무현으로 이어졌다. 마지막은 정연주라는 ‘어른’이었다. 어버이연합으로 과잉 대표되는, 어른 같지 않은 어른의 시대. 그런 시대에서 권력에 맞서 지금껏 언론의 자유를 외치는 동아일보 해직 언론인들과 ‘인간의 도리’를 말하는 정연주 전 사장은 진정 어른의 자격을 갖춘 어른이었다.

“어른? 어른이라는 건 익어가는 것 같아요. 생각도 익어야 하고, 지혜도 익어야 하고. 그러려면 욕심을 버려야지. 과일이라고 보면, 잘 익은 과일이 돼야 하는데 욕심에 갇혀 버려 썩어버린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되죠. 그래서 이름없는, 무명으로 사는 태도가 중요한 것 같아요. 젊었을 때와 똑같은 기회를 갖길 원하는 건 욕심이에요. 사람은 잘 익어가야지. 잘 익어서 평화롭게 똑 떨어지면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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