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환영 전 KBS 사장, 기계적 중립 포기하라 지시”
“길환영 전 KBS 사장, 기계적 중립 포기하라 지시”
남부지법, 김시곤 전 KBS 국장 징계소송기각… “정부에 유리하게 개입에 편승, 그때 저항했어야”

세월호 참사 이후 KBS 보도에 부당하게 간섭해왔다는 비판을 받았던 길환영 전 KBS 사장이 보도내용에 개입해 보도본부의 독립성을 침해했다는 내용의 법원 판결이 나와 주목된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직후 길 전 사장이 KBS 뉴스에서 기계적 중립을 포기하라고까지 간부들에게 요구했다는 사실도 재판 과정에서 드러났다.

이 재판은 길환영 전 사장의 보도 간섭을 폭로했다가 정직 4개월 징계를 받은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현 KBS 방송문화연구소 공영성기획부장)이 제기한 징계무효 확인소송이다. 서울남부지법 민사13부(재판장 김도현 부장판사)는 지난달 29일 김 전 국장의 징계무효소송 선고공판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김 전 국장이 패소한 것이다.

다만 판결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김 전 국장이 폭로한 ‘길 전 사장의 보도개입’이 있었는지에 대해 재판부는 폭로내용이 사실이며, 길 전 사장이 KBS 보도의 독립성을 훼손했다고 판단했다.

9일 미디어오늘이 입수한 판결문에 따르면, 재판부는 길 전 사장이 KBS 보도본부의 독립성을 침해해 왔는지 여부에 대해 지난 2013년 3월 경 김시곤 전 보도국장을 비롯해 이화섭 당시 보도본부장 및 국장급 간부들과 만난 자리에서 ‘기계적 중립(내용의 진위 여부를 떠나 방송 노출시간과 카메라 각도, 피사체의 크기 등을 기계적으로 동등하게 취급하는 최소한의 공정성 원칙)’을 포기하라는 발언을 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기계적 중립’에 대해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기계적으로 중립을 지킨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지만 전체적 맥락을 무시하고 여러 의견을 단순화시키며 의견 비율도 1:1로 방송함으로써 사안의 본질을 외면하거나 진실을 가리게 된다는 비판도 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기계적 중립을 포기하라’는 길환영 전 사장의 발언은 KBS 뉴스 보도 개입과 그 개입 내용, 길 전 사장의 지위와 김시곤 전 국장 등 간부들과의 관계 등에 비춰 보면, 정부와 여당에 유리한 편파적 보도를 요구한 것으로 해석하거나 그러한 의혹을 사기에 충분해 보인다”며 “길 전 사장이 국장급 간부들에게 ‘기계적 중립을 포기하라’는 발언을 통해 KBS 보도본부의 보도 내용에 개입해 독립성을 침해했다고 보인다”고 판단했다.

이 같은 ‘기계적 중립 포기’ 요구 발언은 이번 판결을 통해 처음 공개된 내용이라고 김시곤 전 보도국장이 전했다.

▲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 사진=이치열 기자
정부와 여당에 유리한 보도를 하도록 지시하거나 개입한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재판부는 김 전 국장이 지난 2014년 5월 폭로한 다음과 같은 사례를 제시하며, 모두 인정되는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길 전 사장은 취임 이후 원고(김시곤 전 국장)에게 오후 5시를 전후하여 9시 뉴스 큐시트(뉴스 아이템 및 순서/처리 방식 등을 담은 뉴스진행용 문서)를 전송할 것을 지시했고, 원고로부터 이를 지속적으로 받았다.
-길 전 사장이 지난 2014년 4월23일 원고에게 9시 뉴스에서 대통령 관련 리포트 순서를 앞쪽으로 배치하라는 요구를 하자 원고(김 전 국장)는 길 전 사장에게 ‘오늘은 대통령 리포트 순서를 뒤로 배치하고 내일부터 자연스럽게 앞쪽으로 배치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자칫 역풍이 불면 대통령께도 누가 될 수 있다’는 취지의 답을 했다.

-2014년 5월3일 9시 뉴스에서 ‘안철수 대표 “대통령 통렬한 사과 요구” VS 새누리 “사고 수습이 먼저”’라는 내용의 하단 스크롤 자막이 나가자 길 전 사장이 원고에게 ‘자막 송출을 당장 중단시키라’고 지시하자, 원고(김 전 국장)는 길 전 사장에게 ‘시스템 상 9시뉴스 진행 중에는 내릴 수 없으니 이후에는 나가지 않도록 조치하겠다’고 답했다.
-길 전 사장은 2014년 5월5일 14시30분 원고, 보도본부장, 편집주간, 취재주간이 참석한 회의에서 ‘9시 뉴스에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하여 해경 비판을 자제하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이에 따라 같은 날(5월5일) 9시 뉴스에서 해경에 대한 비판기사 원고의 내용이 상당 부분 완화돼 방영됐다.

이를 두고 재판부는 “길환영 전 사장은 KBS 대표이자 업무총괄자(방송법 제51조 제1항)로서 9시 뉴스 큐시트를 자유로이 받아볼 수는 있으나, 김시곤 전 국장은 국가기간방송으로서 방송의 목적과 공적 책임,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을 실현하여야 하는 등 공적 책임을 지고 있고(방송법 제44조), 취재 제작의 자율성이 강화된 편성규약을 제정하고 있으며, 책임자는 실무자의 취재 및 제작 내용이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수정하여서는 안 된다(KBS 편성규약 제5조 제4항)”며 “자신의 사장이라 해도 방송 공정성과 제작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어떠한 시도나 행위도 (김 전 국장이) 용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한 재판부는 길 전 사장이 소속 임직원의 인사권을 가진 사람으로서(피고의 인사규정 제17조) 단순한 (사장의) 의견제시라 해도 실질적으로 방송 취재 및 제작자들에게 강한 압박이나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다며 결과적으로 방송 내용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실제로 길 전 사장의 지시대로 실제로 세월호 침몰 사고 관련 해경에 대한 비판 뉴스도 그 비판 정도가 상당 부분 완화됐으며, 대통령 관련 뉴스 항목도 대부분 뉴스 시작후 20분 이내에 방송됐다고 재판부는 제시했다. 재판부는 “이에 비춰볼 때 길 전 사장은 9시 뉴스에서 정부와 여당에 유리한 내용이 방영될 수 있도록 수시로 지시·개입함으로써 피고 보도본부의 독립성을 침해해 온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길환영 전 사장이 정부여당에 유리하도록 KBS 뉴스에 개입한 것으로 보인다고 사법부에서조차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징계의 부당성에 대해서는 김시곤 전 국장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길 전 사장이 지난 2014년 5월9일 기자회견 직전에 청와대로부터 김 전 국장의 사표를 받으라는 지시를 받았는지 여부에 대해 “길 전 사장이 기자회견 직전 김 전 국장에 사직하라는 취지의 의견을 전달한 사실과, 당시 박준우 청와대 정무수석이 KBS측에 ‘사안이 심각하니 노력해 달라’는 취지로 말한 사실은 인정된다”며 “하지만 (이 정도의) 인정사실만으로는 길 전 사장이 청와대로부터 김 전 국장의 사직을 지시받았다거나 압력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김 전 국장 발언의 공익성에 대해 외견상 길환영 전 사장의 보도본부 독립성 침해 폭로를 통해 보도의 독립·자율성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는 공표행위여도 오로지 자신에 대한 사직 압박 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행해진 것이면 보도자율성 수호 자체는 진정한 목적으로 볼 수 없다고 가정했다.

▲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이 지난 2014년 5월9일 기자회견에서 길환영 전 KBS 사장의 보도개입을 폭로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시곤 전 국장 발언의 주된 목적에 대해 재판부는 △KBS 노조 등 구성원으로부터 독단적 업무방식 등을 이유로 사퇴요구를 받아왔으며 △세월호 침몰 사고 관련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유가족 뿐 아니라 국민적 비난을 받았고 △5월9일 첫 폭로 전까지 김시곤 전 국장은 길환영 전 사장의 부당한 지시·개입에 대해 배제하려는 노력이나 저항을 전혀 하지 않고, 오히려 이에 편승해 적극적으로 방송 독립성과 제작자율성을 침해해 온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재판부는 KBS가 2014년 5월9일 오후 유가족 반발에 정면돌파하는 김 전 국장의 기자회견을 하기로 했으나 회견 시작 30여 분 전(13:25) 길환영 전 사장이 김 전 국장에게 ‘퇴사하는 게 좋겠다’는 취지의 말을 해 김 전 국장이 그동안 지시에 따라 움직였음에도 버림받았다는 강한 배신감에 충동적으로 (보도 독립성 침해 사례가 있었다는) 폭로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또한 재판부는 김 전 국장이 이 같은 폭로를 통해 보도국장직에서 사퇴하는 선에서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었으며, (자신에 향하던) 비난 여론을 ‘부당한 지시개입으로 독립성을 침해한’ 길환영 전 사장에 돌리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길 전 사장의 부당한 보도 지시·개입 등 공익적 부분이 포함돼 있고 일부 개입사실이 밝혀졌다 해도 일부는 허위 과장됐거나 감정적·충동적 동기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며, 주된 목적은 당시 사퇴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이러한 사익적 목적에 기초한 김시곤 전 국장의 폭로행위는 정당한 공표행위를 벗어난 악의적인 공격에 해당해, 징계사유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원고인 김시곤 전 KBS 보도국장은 9일 미디어오늘과 통화에서 “판결의 핵심은 사적이익을 위해 길 전 사장의 행위를 폭로했기에 징계가 정당하다는 것인데, 그 당시 선택할 수 있는 경우의 수 가운데 제가 선택한 것은 오히려 저의 사적이익에 가장 반하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김 전 국장은 “이는 내게 가장 큰 피해가 예상되는 것이었다”며 “당시 폭로행위에 대해 후회는 없고, 똑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똑같은 결정과 똑같은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 전 국장은 “항소할지 여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며 “판결에 대한 세부적인 견해는 항소하게 되면 법정에서 얘기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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